[특별기고][ 한·중 정원가 예찬 3 ] 불로장생의 꿈을 원림으로 이룬 진시황 편



정원은 예부터 최고지배층의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그 역할을 담당해 왔다. 최고의 권력을 지닌 황제라 해도 자연 앞에 극히 작고 유한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원의 조영원리나 구성요소들에 조영자들의 갖가지 바램이 형상화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불로불사(不老不死)는 수많은 황제들이 꿈꾸던 삶이지만 그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사람은 없을 듯하다. 모택동이 가장 좋아했던 중국 최고의 황제, 그 황제가 꿈꿨던 원림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진(秦)나라의 황제 영정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건축과 정원을 통해 실현하는데 성공한 중국 최고의 황제로 꼽힌다.


 


진시황(BC 259-210), 성은 영(?)이고 이름은 정(政)으로 현 하북성에 위치한 한단에서 출생하였다. 본래 진나라는 춘추시기 제후국 중 하나였으나 훗날 영정(?政)때 이르러 6국(六國)을 정복(기원전 221년)하고 통일을 이뤄냈다. 그는 통일된 진조(秦朝)를 개국한 첫번째 황제로서 스스로에게 황제라는 호칭을 부여하여 ‘시황제(始皇帝, 최초의 황제)’라 칭하였고, 이런 그를 후대 사람들은 ‘천고일제(千古一帝)’라 칭송하였다. 진시황제는 통일 후 중앙집권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차동궤, 서동문 (車同軌, 書同文 - 차바퀴의 간격을 통일하여 도로의 너비를 통일함, 문서 작성 시 통일된 글자를 사용)’ 등을 실시하여 건축 토목 과학 문학 등의 발전을 꾀하였다.
원림(園林) 또한 더불어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이 시기에 진정한 황가원림이 시작되었다 말할 수 있다. 그는 정복전쟁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에 대해 기록하게 했고, 통일 후 함양(咸陽)지역 도시계획에 이를 적용하게 하여, 수도 주변에 각국의 궁전을 모방하여 중건하였다. 함양 계획을 통하여 진시황제는 이전에 전무했던 대규모 황가원림을 건설했고 황제나 귀족이 왕래하는 길, 여산묘(생전에 조성했던 황제능), 상림원, 아방궁, 장성, 함양궁 등 거대한 규모의 조성사업을 실행하였다. 진시황은 함양도성 계획을 할 때 하늘의 별자리를 근거로 하여 건축물들의 위치를 정하고 이름(命名)하였다고 한다.
이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을 몸소 실행하고자 한 것으로 《三輔黃圖》와《史記,秦始皇本紀》에 “關中計宮三百, 關外四百餘. ?外,咸陽之旁二百里內,還有宮觀二百七十 (섬서성 위하 유역 일대에는 궁전이 300개가 조성되어 있고 이외 함양 주변 100㎞내에는 이궁 270개가 조성되어 있었다)” 라 기록되어 있어 함양 도성 계획의 규모와 아울러 원림의 규모 또한 웅대함을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또 진시황과 관련된 사료를 살펴보면 ‘宮’과 ‘苑’이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고 있는데 이는 진나라를 대표하는 아방궁과 상림원에 기인한 것이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선왕이 조영한 궁전이 협소하다고 하여 위수(渭水)의 남쪽에 상림원(上林苑)을 조성하고 그 중심에 아방궁을 조영하여 대규모 궁궐을 완성하였다. 당나라 두보 등 많은 문인들이 진시황의 아방궁과 궁원(宮苑)인 상림원을 묘사하고 그 웅장하고 미려함을 예찬하였다. 상림원의 엄청난 규모는 장안, 함양 등 5개 현의 경계에 걸쳐 있으며 각종 위락시설 및 자연경물들로 가득한 진한 시대(秦漢時代)의 대표적 원림이라 할 수 있다. 상림원 내 조성된 아방궁은 이궁과 별관 등이 700개 이상이었으며 그에 따라 종류별 동식물과 6국(六國)의 보석이 가득하였으며 깊은 궁내에는 수많은 미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


 아방궁의 ‘아방’의 뜻은 여러 가지가 전해져 오나 딱히 정설은 없다. 《漢書 · 賈山傳》,“阿者,大陵也,取名阿房,是言其高若干阿上?房(아방궁은 궁전건축이 큰 구릉 위에 위치하여 이 이름을 얻었다)"라고 하기도 하며 민간에서는 진시황의 어린 시절 좋아하던 여인(자살로 생을 마감함)의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서동요처럼 고대중국인들도 이를 동요(阿房, 阿房 亡始皇: 아방 아방 결국 진시황제를 망하게 했구나)로 불러 시황제의 폭정을 비난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국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진시황 때에는 이 궁궐을 완성하지 못하였으며 당시에는 다만 전정구역만 건설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진시황은 미신과 신선방술(神仙方術)에 집착하기도 했다.
 일찍이 그는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고자 하였고 그 일환으로 난지궁(蘭池宮)을 조영하였다. 난지궁 원림에는 위수(渭水)의 물을 끌어 들여 못을 파고 섬을 쌓아 해상의 선산(仙山)을 형상화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욕망을 원림을 통하여 자족하였다. 진조(秦朝) 말년 난지궁은 진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지고 지금은 폐허의 유적만이 남아있다.

신현실  
북경대학교 세계유산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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