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가을에도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을이면 알밤을 주우러 산으로, 감을 주우러 골목으로, 메뚜기를 잡으러 온 들을 헤집고 다녔다. 어린 날의 우리들이었다. 아직 배가 여린 탓이었을까. 설익은 과일을 먹으면 자주 배탈이 났지만, 메뚜기는 탈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메뚜기는 벼의 색깔에 젖어가며 자란다. 벼가 한창 초록색으로 자랄 때쯤이면, 알에서 깨어난 메뚜기도 연한 초록색을 띤다. 그래서 어린 메뚜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벼이삭이 달려 자라날 무렵이면, 메뚜기는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벼이삭이 무르익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면, 메뚜기도 푸르면서도 여기저기 누르스름하게 다 자란다. 황금빛 들녘에서 잡은 황금빛을 띤 메뚜기를 볶아 먹으면 제일 맛있다. 그렇지만 다 자란 메뚜기는 벼와 같은 색깔로 교묘하게 위장을 한데다, 사람이 다가가면 볏대궁이며 볏닢 뒤편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메뚜기는 보호색으로 자신의 존재를 속인다. 우리도 논두렁을 천천히 따라가며 메뚜기를 살짝 속인다. 고요히 숨죽인 볏대궁 위로 마치 메뚜기 한 마리를 잡는 것처럼 갑자기 헛손질을 휘두르면, 숨어있던 메뚜기는 자신의 존재가 발각된 줄 알고 팔짝 뛰어오른다. 뛰어오르면 반드시 내려앉아야지. 앉는 곳을 잘 보았다가 잽싸게 낚아채면 된다.
<숨어 있는 메뚜기>
메뚜기는 속으로 말할 것이다. “네가 속으면,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도 헛손질을 하면서 메뚜기한테 말한다. “네가 속으면, 나는 잡아챌 것이다.” 운 좋게도 속아서 뛰어오르는 메뚜기들이 많기도 하다. 강아지풀 줄기에 주렁주렁 메뚜기들을 꿰어 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의기양양하다. 허리춤에 매단 전리품들이 출렁거릴수록 발걸음은 빨라진다.
메뚜기 볶는 것은 엄마를 부를 필요도 없다. 아궁이에 프라이팬을 달구고, 부뚜막의 이름 모를 기름 몇 방울을 두르고, 강아지풀에 매단 채로 메뚜기들을 올리고, 살짝 소금을 뿌리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강아지풀 줄기를 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메뚜기 날개들이 타서 떨어져나갈 때쯤이면 다 볶은 것이다. 불쌍하지만 너무 맛있다. 메뚜기를 간장에 찍어 보리밥 한 숟갈 위에 올려 먹으면 더욱 맛있다.
<철학하는 아우구스티누, 보티첼리 작 (1480), 이탈리아 Florenz, Chiesa di Ognissan 소장>
“속으면, 존재한다”(si fallor, enim sum, 《신국론》 11,26). 철학자이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말이다. 서양의 고대를 마감하고 중세를 시작한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내가 지금 속고 있다면, 그러면 나는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결코 속아 넘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의 단순한 격언도 아니다. 이 말 뒤에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찾으려는 기나긴 여정이 숨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게다가 서양역사에서 천년의 중세시대를 접고, 근대의 문을 두드리는 망치 같은 말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적 학문을 쌓을 수 있는 초석이 필요했다. 모든 의심을 단번에 쓸어버릴 확실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방법적 의심을 시작했다.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학문의 출발점으로 이 말을 내세운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 존재의 확실성 위에 모든 학문을 합리적으로 건축할 수 있고 여겼다.
그런데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살짝 바꾼 것이다. 물론 의미는 거의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엄청난 불안 속에서, 지적으로 방황하고 타락하는 시행착오를 거쳐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낸 사상가다. 한 때 회의주의에 속고 사이비 종교에 빠진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까지 의심하게 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란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꿈과 현실, 진실과 거짓, 환상과 참상을 구분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불안에 떨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회의에 빠져 허덕이고, 사이비종교에 넘어간 자신의 비현실적 운명 그 자체는 참담하기 그지없었지만, 적어도 그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불안을 통해 확신을, 거짓을 통해 참을, 없는 것을 통해 있음의 무게를 느끼고, 비로소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저울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사이비에 빠진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빠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 벌어지는 엄연한 현실을 꿈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면,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착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실패의 나락에 떨어졌다면,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실패할 수도, 실수할 수도, 오류에 빠질 수도, 차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속아 넘어간다면, 나는 존재함에 틀림없다. 나의 존재를 확신하든 의심하든 속아 넘어간다면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단순히 속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속은 것을 알아채는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믿는 것이 사이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내 불안의 뿌리를 잡아채는 순간에 나의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닐까.
“속으면, 존재한다”는 말에는 역설도 숨어있다. 속는 자는, 속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자는 물론 자기 존재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속이는 자는? 속이는 자는, 속였다고 승리감에 도취하는 자는 결국 자기 존재감을 상실한다. 속이는 자에게는 속임수도 없던 일이어야 하고, 속이는 자 자신은 더 더욱 없는 것처럼 보여야하기 때문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 속이는 그런 일이나 속이는 그런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야만, 그 속임수가 성공하기 때문이다.
살다보니 메뚜기만 속인 것이 아닌 것 같다. 속여 먹어서 고소했던 그만큼, 나의 존재감을, 나의 자존감을 잃어버렸으니... 남은 게 없는 것 같다. 살다보니 깜박 속은 일도 많은 것 같다. 속아서 분하고 억울했던 그 만큼, 나는 존재하노니... 그나마 잃어버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하릴없이 무르익은 논두렁의 가을을 걸어본다. 나를 알아본 것일까? 배고프던 시절의 그 메뚜기들이 내 발걸음보다 앞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주니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이라 나는 이제 메뚜기 먹는 맛을 잃어버렸단다.
신창석 교수
국가민속문화재 제282호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풍요로운 가을에도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배고픈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을이면 알밤을 주우러 산으로, 감을 주우러 골목으로, 메뚜기를 잡으러 온 들을 헤집고 다녔다. 어린 날의 우리들이었다. 아직 배가 여린 탓이었을까. 설익은 과일을 먹으면 자주 배탈이 났지만, 메뚜기는 탈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메뚜기는 벼의 색깔에 젖어가며 자란다. 벼가 한창 초록색으로 자랄 때쯤이면, 알에서 깨어난 메뚜기도 연한 초록색을 띤다. 그래서 어린 메뚜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벼이삭이 달려 자라날 무렵이면, 메뚜기는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벼이삭이 무르익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면, 메뚜기도 푸르면서도 여기저기 누르스름하게 다 자란다. 황금빛 들녘에서 잡은 황금빛을 띤 메뚜기를 볶아 먹으면 제일 맛있다. 그렇지만 다 자란 메뚜기는 벼와 같은 색깔로 교묘하게 위장을 한데다, 사람이 다가가면 볏대궁이며 볏닢 뒤편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메뚜기는 보호색으로 자신의 존재를 속인다. 우리도 논두렁을 천천히 따라가며 메뚜기를 살짝 속인다. 고요히 숨죽인 볏대궁 위로 마치 메뚜기 한 마리를 잡는 것처럼 갑자기 헛손질을 휘두르면, 숨어있던 메뚜기는 자신의 존재가 발각된 줄 알고 팔짝 뛰어오른다. 뛰어오르면 반드시 내려앉아야지. 앉는 곳을 잘 보았다가 잽싸게 낚아채면 된다.
<숨어 있는 메뚜기>
메뚜기는 속으로 말할 것이다. “네가 속으면,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도 헛손질을 하면서 메뚜기한테 말한다. “네가 속으면, 나는 잡아챌 것이다.” 운 좋게도 속아서 뛰어오르는 메뚜기들이 많기도 하다. 강아지풀 줄기에 주렁주렁 메뚜기들을 꿰어 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의기양양하다. 허리춤에 매단 전리품들이 출렁거릴수록 발걸음은 빨라진다.
메뚜기 볶는 것은 엄마를 부를 필요도 없다. 아궁이에 프라이팬을 달구고, 부뚜막의 이름 모를 기름 몇 방울을 두르고, 강아지풀에 매단 채로 메뚜기들을 올리고, 살짝 소금을 뿌리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강아지풀 줄기를 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메뚜기 날개들이 타서 떨어져나갈 때쯤이면 다 볶은 것이다. 불쌍하지만 너무 맛있다. 메뚜기를 간장에 찍어 보리밥 한 숟갈 위에 올려 먹으면 더욱 맛있다.
<철학하는 아우구스티누, 보티첼리 작 (1480), 이탈리아 Florenz, Chiesa di Ognissan 소장>
“속으면, 존재한다”(si fallor, enim sum, 《신국론》 11,26). 철학자이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말이다. 서양의 고대를 마감하고 중세를 시작한 위대한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내가 지금 속고 있다면, 그러면 나는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결코 속아 넘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의 단순한 격언도 아니다. 이 말 뒤에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찾으려는 기나긴 여정이 숨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게다가 서양역사에서 천년의 중세시대를 접고, 근대의 문을 두드리는 망치 같은 말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적 학문을 쌓을 수 있는 초석이 필요했다. 모든 의심을 단번에 쓸어버릴 확실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방법적 의심을 시작했다.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학문의 출발점으로 이 말을 내세운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 존재의 확실성 위에 모든 학문을 합리적으로 건축할 수 있고 여겼다.
그런데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살짝 바꾼 것이다. 물론 의미는 거의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엄청난 불안 속에서, 지적으로 방황하고 타락하는 시행착오를 거쳐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낸 사상가다. 한 때 회의주의에 속고 사이비 종교에 빠진 그는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까지 의심하게 된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란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꿈과 현실, 진실과 거짓, 환상과 참상을 구분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불안에 떨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회의에 빠져 허덕이고, 사이비종교에 넘어간 자신의 비현실적 운명 그 자체는 참담하기 그지없었지만, 적어도 그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불안을 통해 확신을, 거짓을 통해 참을, 없는 것을 통해 있음의 무게를 느끼고, 비로소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저울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사이비에 빠진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빠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 벌어지는 엄연한 현실을 꿈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면,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착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실패의 나락에 떨어졌다면,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실패할 수도, 실수할 수도, 오류에 빠질 수도, 차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속아 넘어간다면, 나는 존재함에 틀림없다. 나의 존재를 확신하든 의심하든 속아 넘어간다면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단순히 속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속은 것을 알아채는 순간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믿는 것이 사이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내 불안의 뿌리를 잡아채는 순간에 나의 안정을 찾는 것이 아닐까.
“속으면, 존재한다”는 말에는 역설도 숨어있다. 속는 자는, 속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자는 물론 자기 존재감을 얻는다. 그렇다면 속이는 자는? 속이는 자는, 속였다고 승리감에 도취하는 자는 결국 자기 존재감을 상실한다. 속이는 자에게는 속임수도 없던 일이어야 하고, 속이는 자 자신은 더 더욱 없는 것처럼 보여야하기 때문이다. 밝은 태양 아래서 속이는 그런 일이나 속이는 그런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야만, 그 속임수가 성공하기 때문이다.
살다보니 메뚜기만 속인 것이 아닌 것 같다. 속여 먹어서 고소했던 그만큼, 나의 존재감을, 나의 자존감을 잃어버렸으니... 남은 게 없는 것 같다. 살다보니 깜박 속은 일도 많은 것 같다. 속아서 분하고 억울했던 그 만큼, 나는 존재하노니... 그나마 잃어버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하릴없이 무르익은 논두렁의 가을을 걸어본다. 나를 알아본 것일까? 배고프던 시절의 그 메뚜기들이 내 발걸음보다 앞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주니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이라 나는 이제 메뚜기 먹는 맛을 잃어버렸단다.
신창석 교수
국가민속문화재 제282호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