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물의 흐름, 땅과 숲, 해와 달, 구름과 비처럼 우리 조상은 자연과 종속관계를 존중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한국 정원은 조선 시대에 많이 형성되었다. 특히, 조선 중 후반에 사림들이 사화나 당파 정치의 염증을 느껴 낙향하여 조성된 경우가 많다. 또한 유배지에서 정자를 조성하고 시로서 인생을 달램과 동시에 임금의 부름을 간곡히 기다리거나 자신의 충정을 자연에 빗대어 노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이들이 한결같이 자연을 벗 삼아 주옥같은 문집을 남기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보길도 세연정>
정원을 조성할 때 풍수나 자연경관을 살펴보면 그 주변과 걸맞은 정자를 짓고 현판을 달았다. 세연정(洗然亭: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아함)은 고산 윤선도가 정치적 역경 속에서 보길도 부용동에 조성한 원림인 정자이다. 윤선도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 지었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이후 윤선도는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은거지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보길도를 드나들며 섬 이곳저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많은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자신의 낙원인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동천석실은 천하의 명산경승으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동천복지(洞天福地)’에 그 궤를 동일시하였으며, 낙서재 반대편의 산 중턱에 있다. 부용동 정원에서 백미라 할 수 있는 세연정 부근은 인공으로 원래의 물길을 다소 변형하면서 연못을 만들고 정자와 대(臺)를 지어 경관을 즐기도록 하였다.
세연정 연못은 곡지(曲池)와 방지(方池)로 구성된다. 곡지는 흐르는 내를 돌로 된 보로 막아 큰 바위들을 노출시켰으며, 방지는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방지의 물가에는 돌로 된 네모진 두 개의 단인 서대와 동대를 나란히 꾸며놓았다. 방지 남쪽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었는데 세연정은 아마 이 동산 위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는 섬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서 가장 알맞은 곳을 골라 살림집과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짓는 등 섬 전체를 차경의 개념을 도입하여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 스케일과 상상력의 크기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신선의 휴식처인 동천석실과 그 주변>
윤선도의 후손 가운데 누군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유사(家藏遺事)》에는 고산의 보길도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고산은 거처인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동천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였다. 세연정에서는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술과 가무로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면서 물위에 비치는 자연을 감상했다.”고 전한다.
고산은 아마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르자는 욕심없이 고요한 상태로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겨 물의 흐름 방향이나 물이 거슬러 솟구치는 인위적인 분수 같은 건 설치하지 않았다.
정원의 경계를 넘어선 대자연을 정원의 일부로 유입시키는 차경의 개념을 적극 도입하였다. 즉, 내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속의 내 것으로 간주하여 생각하는 우리의 개념을 확대하였다고 할까요?
고산은 어부사시사를 필두로 산중신곡, 오우가 등 주옥같은 자연을 찬미하였다. 효종인 봉림대군 형제의 사부로 대학자이며, 조선 시대 최고의 조경가였다. 대자연을 벗 삼는다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 은거지에서 효종 임금을 일편단심으로 그리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산세를 읽고 물길을 이용한 고산의 지리적 견해는 장소를 선정할 때마다 면밀히 살피는 신중함, 인간의 심성과 자연의 물리적 특성을 연관시켰다.
부용동 정원은 돌과 물로 비경을 만들어 낸 정원으로 못으로부터 남류하는 계류를 포함하는 상부 공간과 하부공간으로 구분하여 이러한 자연을 바탕으로 물의 역동미를 살렸다고 한다.
<세연정 앞의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바위>
고산은 보길도의 세연정 앞 세연지 연못에 있는 바위에 대해 동대, 서대, 흑약암(흑躍岩), 사투암(射投岩) 등 칠암을 정리하였다. 대표적인 바위인 흑약암과 사투암의 의미를 살펴보자. 흑약암은 ’역경’의 ‘건’에 나오는 ‘흑약재연’과 맥을 같이하며 ‘뛸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머문다’는 뜻으로 ‘마치 힘차게 뛰어 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해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귀암(龜岩)은 낙서재 앞마당에 있던 거북바위로, 고산이 낙서재 터를 고르는데 기준이 되었던 지형물이다.
<보길도 세연정>
보길도 정원의 오우가(五友歌)에 대한 시세계를 한번 살펴보자. 오우가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나의 지조를 아낌없이 노래하였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는 자연의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 즉,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 이 다섯을 내 벗으로 삼는다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고산 선생은 제1수의 시작에 변치 않고 지조 있는 수, 석, 송, 죽, 월을 대상으로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의 지조 있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네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 오우가 제1수 -
부용동 정원은 차경의 개념을 대자연 관점에서 조성자는 인식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원 조성지는 너무나 경관이 수려하다. 따라서 이러한 경관 좋은 곶에서 옛 선현들의 지혜를 되새기면서 아름다운 옛날 정원인 세연정을 찾아 좋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쁜 생각 등은 버리는 정신세계의 힐링 장소가 최고의 명품 장소가 되지 않을까.......
정중수 교수
국립안동대학교 공과대학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예나 지금이나 물의 흐름, 땅과 숲, 해와 달, 구름과 비처럼 우리 조상은 자연과 종속관계를 존중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한국 정원은 조선 시대에 많이 형성되었다. 특히, 조선 중 후반에 사림들이 사화나 당파 정치의 염증을 느껴 낙향하여 조성된 경우가 많다. 또한 유배지에서 정자를 조성하고 시로서 인생을 달램과 동시에 임금의 부름을 간곡히 기다리거나 자신의 충정을 자연에 빗대어 노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이들이 한결같이 자연을 벗 삼아 주옥같은 문집을 남기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보길도 세연정>
정원을 조성할 때 풍수나 자연경관을 살펴보면 그 주변과 걸맞은 정자를 짓고 현판을 달았다. 세연정(洗然亭: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아함)은 고산 윤선도가 정치적 역경 속에서 보길도 부용동에 조성한 원림인 정자이다. 윤선도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 지었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이후 윤선도는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은거지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보길도를 드나들며 섬 이곳저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많은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자신의 낙원인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동천석실은 천하의 명산경승으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동천복지(洞天福地)’에 그 궤를 동일시하였으며, 낙서재 반대편의 산 중턱에 있다. 부용동 정원에서 백미라 할 수 있는 세연정 부근은 인공으로 원래의 물길을 다소 변형하면서 연못을 만들고 정자와 대(臺)를 지어 경관을 즐기도록 하였다.
세연정 연못은 곡지(曲池)와 방지(方池)로 구성된다. 곡지는 흐르는 내를 돌로 된 보로 막아 큰 바위들을 노출시켰으며, 방지는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방지의 물가에는 돌로 된 네모진 두 개의 단인 서대와 동대를 나란히 꾸며놓았다. 방지 남쪽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었는데 세연정은 아마 이 동산 위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산 윤선도는 섬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서 가장 알맞은 곳을 골라 살림집과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짓는 등 섬 전체를 차경의 개념을 도입하여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 스케일과 상상력의 크기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신선의 휴식처인 동천석실과 그 주변>
윤선도의 후손 가운데 누군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유사(家藏遺事)》에는 고산의 보길도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고산은 거처인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동천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였다. 세연정에서는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술과 가무로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면서 물위에 비치는 자연을 감상했다.”고 전한다.
고산은 아마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르자는 욕심없이 고요한 상태로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겨 물의 흐름 방향이나 물이 거슬러 솟구치는 인위적인 분수 같은 건 설치하지 않았다.
정원의 경계를 넘어선 대자연을 정원의 일부로 유입시키는 차경의 개념을 적극 도입하였다. 즉, 내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속의 내 것으로 간주하여 생각하는 우리의 개념을 확대하였다고 할까요?
고산은 어부사시사를 필두로 산중신곡, 오우가 등 주옥같은 자연을 찬미하였다. 효종인 봉림대군 형제의 사부로 대학자이며, 조선 시대 최고의 조경가였다. 대자연을 벗 삼는다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 은거지에서 효종 임금을 일편단심으로 그리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산세를 읽고 물길을 이용한 고산의 지리적 견해는 장소를 선정할 때마다 면밀히 살피는 신중함, 인간의 심성과 자연의 물리적 특성을 연관시켰다.
부용동 정원은 돌과 물로 비경을 만들어 낸 정원으로 못으로부터 남류하는 계류를 포함하는 상부 공간과 하부공간으로 구분하여 이러한 자연을 바탕으로 물의 역동미를 살렸다고 한다.
<세연정 앞의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바위>
고산은 보길도의 세연정 앞 세연지 연못에 있는 바위에 대해 동대, 서대, 흑약암(흑躍岩), 사투암(射投岩) 등 칠암을 정리하였다. 대표적인 바위인 흑약암과 사투암의 의미를 살펴보자. 흑약암은 ’역경’의 ‘건’에 나오는 ‘흑약재연’과 맥을 같이하며 ‘뛸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머문다’는 뜻으로 ‘마치 힘차게 뛰어 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해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귀암(龜岩)은 낙서재 앞마당에 있던 거북바위로, 고산이 낙서재 터를 고르는데 기준이 되었던 지형물이다.
<보길도 세연정>
보길도 정원의 오우가(五友歌)에 대한 시세계를 한번 살펴보자. 오우가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나의 지조를 아낌없이 노래하였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는 자연의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 즉,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 이 다섯을 내 벗으로 삼는다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고산 선생은 제1수의 시작에 변치 않고 지조 있는 수, 석, 송, 죽, 월을 대상으로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의 지조 있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네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 오우가 제1수 -
부용동 정원은 차경의 개념을 대자연 관점에서 조성자는 인식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원 조성지는 너무나 경관이 수려하다. 따라서 이러한 경관 좋은 곶에서 옛 선현들의 지혜를 되새기면서 아름다운 옛날 정원인 세연정을 찾아 좋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쁜 생각 등은 버리는 정신세계의 힐링 장소가 최고의 명품 장소가 되지 않을까.......
정중수 교수
국립안동대학교 공과대학
정보통신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