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잘할까? 그 중에서도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쉽게들 말한다. “가장 잘하고,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가장 잘하는 일을 찾는 것이 어렵다. 찾았다 하더라도 확신하기는 더 어렵고, 확신하더라도 변치 않기는 더 더욱 어렵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싫은 것과 반대된다. 가장 잘하는 것은 가장 못하는 것과 반대된다. 그럼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2018 동해안 일출>
소싯적 우리 집의 빨래하는 날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빨래하는 소동이 아니라 빨래 감을 찾아내는 소동이 일어났다. 여러 식구들 가운데서도 특히 나는 벗은 옷을 제자리에 둘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땐 거의 그랬듯이 대가족인데다 형제들도 많아서 아이들의 공간은 일정치 않았다. 상방에서 숙제를 하고, 저녁에 안방에서 할머니의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를 졸라대고, 할아버지께서 부르면 사랑방에서 잤다. 그러니 제자리 둘 줄 모르는 나의 빨래감은 집안 곳곳에 숨어 있었고, 빨래 찾기 소동은 그칠 날이 없었다.
제자리 두지 않은 것은 빨래감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쓰는 물건들도 제자리에 놓을 줄 몰랐다. 책보자기는 상방에, 공책은 안방에, 연필이나 종이 자르는 손칼은 대청마루 여기저기에, 양말이나 셔츠는 들마루에, 종이딱지, 구슬, 새총과 같은 이런 저런 장난감은 부뚜막이나 마루밑 어딘가에, 다시는 찾지 않을 것처럼 던져놓곤 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나서지 않은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간혹 대청소를 할라치면 귀하디 귀하던 크레용 토막이며, 몽당연필, 구슬 등이 농 밑에서 나오곤 했다. 그렇게 찾다가 까맣게 잊어버린 동전이 나오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인 양 눈깔사탕을 사러 점방으로 달려갔다. 그래도 아무데나 던져버리고 늘 다시 찾아나서는 나의 어리석은 숨바꼭질은 거의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한 평생 나에게는 제자리 두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세월이 갈수록 제자리에 둘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 제자리를 알아차리는 것 자체부터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어디 사용하던 물건뿐이랴. 사람에게도 늘 제자리가 있다. 저마다 제자리에 자신을 둘 때 가장 자신다울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자리가, 남에게는 남의 자리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자리가 어디 늘 그 자리에만 박혀있겠는가. 자리마다 바뀌지 않는 자리가 하나도 없다 보니, 자리마다 간사하지 않은 자리도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앉을 때마다 의심에 빠지곤 한다. 나를 여기에 두어도 좋은가? 우리는 자리가 바뀔 때마다 생각에 빠진다. 제자리를 찾은 것인가? 나와 남들에게서 OK 싸인이 나올 때까지, 의구심과 생각은 멎을 줄 모른다.
우리도 자주 쓰는 오케이(OK)는 무슨 뜻이고 어디서 온 말일까? 오케이(OK)는 전 인류가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정작 그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OK는 일단 미국식 영어에서 나왔다는 것만 오케이다. 일설에 의하면 1839년 3월 23일 자 신문의 어느 문장 속에 “o.k. – all correct”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물론 "all correct"를 발음 그대로 “oll correct”로 보고 o.k로 줄이면서 오타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 OK가 그 해부터 미국 전역을 휩쓸며 사용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당연하다”는 말 대신에 “당근”을 쓰듯이 말이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미군들이 명령을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Order known”을 사용했고, 그 약자로 OK라고 했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됐다” “좋다” 또는 오케이(Okay, Okey)라는 말 대신에 “인 오르트눙”(in Ordnung)이란 말을 쓴다. 물론 영어 “order”나 독일어 “Ordnung”의 어원은 라틴어 오르도(ordo)에서 유래한다. 오르도는 원래 줄이나 열을 뜻한다. 특히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자리의 순서를 뜻하기도 하고, 그 자리가 곧 서열이 되어 계급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오르도는 질서와 정돈을 뜻하며, 정리된 위계질서, 규정과 관례를 의미하게 되었다. 결국 오르도(ordo)는 근본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제자리를 뜻하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오케이 대신에 사용하는 “인 오르트눙”은 “제자리에 있다”, “제자리가 맞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에둘러 보면 오케이는 곧 제자리를 뜻하는 셈이다.
사람이 자리를 만들겠지만, 그 자리가 또한 사람을 만든다. 자리가 줄줄이 서열을 엮어내지만, 그 서열이 다시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네 인생사는 이리저리 엮여 가고, 여기저기 엮이는 가운데 저마다의 자리를 다져간다. 서로 엮여 있는 모두가 큰 불만이 없이 OK 싸인을 내는 그 찰나의 안정과 평온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행복도 어쩌면 제자리에 두기다. 사람들은 늘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다니지만, 자신의 행복을 제자리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헤매는 것이 아닐까?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어찌 행복을 알겠는가? 행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꿈이라도 꾸겠는가? 언제 어디선가 맛보던 행복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서 다시 찾느라 허둥대는 것은 아닐까? 농 밑으로 굴려버리곤, 까마득히 잊어버린 구슬처럼... 너무 까맣게 잊어버려서 소중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영롱한 구슬처럼...
나이를 먹는 것도 어쩌면 한 살 한 살 나 자신을 제자리에 두는 중이다. 나이 먹기는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다. 잊어버렸다 해도 나이는 차곡차곡 어김없이 제자리에 쌓이는 법이다. 한 해 한 해 오차 없이 나이를 먹는 것도 질서를 지키는 일이다. 해마다 자신의 나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오르도(Ordo)를 따르는 일이다. 해마다 오케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제자리를 찾아가다가도, 죽는 데는 순서도 없고 서열도 없다. 죽고 난 다음에는 자리도, 순서도, 서열도, 계급도 더 이상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늘 제자리 두기를 못하던 나도 언젠가는 어김없이 나 자신을 온전히 제자리에 두게 될 것이다. 가장 못하던 제자리 두기를 가장 잘하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어쩌면 인생은 제자리 두기를 배우는 실습기간이다.
신창석 교수
국가민속문화재 제282호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나는 무엇을 잘할까? 그 중에서도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쉽게들 말한다. “가장 잘하고,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가장 잘하는 일을 찾는 것이 어렵다. 찾았다 하더라도 확신하기는 더 어렵고, 확신하더라도 변치 않기는 더 더욱 어렵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싫은 것과 반대된다. 가장 잘하는 것은 가장 못하는 것과 반대된다. 그럼 내가 가장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2018 동해안 일출>
소싯적 우리 집의 빨래하는 날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빨래하는 소동이 아니라 빨래 감을 찾아내는 소동이 일어났다. 여러 식구들 가운데서도 특히 나는 벗은 옷을 제자리에 둘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땐 거의 그랬듯이 대가족인데다 형제들도 많아서 아이들의 공간은 일정치 않았다. 상방에서 숙제를 하고, 저녁에 안방에서 할머니의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를 졸라대고, 할아버지께서 부르면 사랑방에서 잤다. 그러니 제자리 둘 줄 모르는 나의 빨래감은 집안 곳곳에 숨어 있었고, 빨래 찾기 소동은 그칠 날이 없었다.
제자리 두지 않은 것은 빨래감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쓰는 물건들도 제자리에 놓을 줄 몰랐다. 책보자기는 상방에, 공책은 안방에, 연필이나 종이 자르는 손칼은 대청마루 여기저기에, 양말이나 셔츠는 들마루에, 종이딱지, 구슬, 새총과 같은 이런 저런 장난감은 부뚜막이나 마루밑 어딘가에, 다시는 찾지 않을 것처럼 던져놓곤 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나서지 않은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간혹 대청소를 할라치면 귀하디 귀하던 크레용 토막이며, 몽당연필, 구슬 등이 농 밑에서 나오곤 했다. 그렇게 찾다가 까맣게 잊어버린 동전이 나오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인 양 눈깔사탕을 사러 점방으로 달려갔다. 그래도 아무데나 던져버리고 늘 다시 찾아나서는 나의 어리석은 숨바꼭질은 거의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한 평생 나에게는 제자리 두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세월이 갈수록 제자리에 둘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 제자리를 알아차리는 것 자체부터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어디 사용하던 물건뿐이랴. 사람에게도 늘 제자리가 있다. 저마다 제자리에 자신을 둘 때 가장 자신다울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자리가, 남에게는 남의 자리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자리가 어디 늘 그 자리에만 박혀있겠는가. 자리마다 바뀌지 않는 자리가 하나도 없다 보니, 자리마다 간사하지 않은 자리도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앉을 때마다 의심에 빠지곤 한다. 나를 여기에 두어도 좋은가? 우리는 자리가 바뀔 때마다 생각에 빠진다. 제자리를 찾은 것인가? 나와 남들에게서 OK 싸인이 나올 때까지, 의구심과 생각은 멎을 줄 모른다.
우리도 자주 쓰는 오케이(OK)는 무슨 뜻이고 어디서 온 말일까? 오케이(OK)는 전 인류가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정작 그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OK는 일단 미국식 영어에서 나왔다는 것만 오케이다. 일설에 의하면 1839년 3월 23일 자 신문의 어느 문장 속에 “o.k. – all correct”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물론 "all correct"를 발음 그대로 “oll correct”로 보고 o.k로 줄이면서 오타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 OK가 그 해부터 미국 전역을 휩쓸며 사용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당연하다”는 말 대신에 “당근”을 쓰듯이 말이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미군들이 명령을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Order known”을 사용했고, 그 약자로 OK라고 했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됐다” “좋다” 또는 오케이(Okay, Okey)라는 말 대신에 “인 오르트눙”(in Ordnung)이란 말을 쓴다. 물론 영어 “order”나 독일어 “Ordnung”의 어원은 라틴어 오르도(ordo)에서 유래한다. 오르도는 원래 줄이나 열을 뜻한다. 특히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자리의 순서를 뜻하기도 하고, 그 자리가 곧 서열이 되어 계급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오르도는 질서와 정돈을 뜻하며, 정리된 위계질서, 규정과 관례를 의미하게 되었다. 결국 오르도(ordo)는 근본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제자리를 뜻하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오케이 대신에 사용하는 “인 오르트눙”은 “제자리에 있다”, “제자리가 맞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모두가 수긍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에둘러 보면 오케이는 곧 제자리를 뜻하는 셈이다.
사람이 자리를 만들겠지만, 그 자리가 또한 사람을 만든다. 자리가 줄줄이 서열을 엮어내지만, 그 서열이 다시 자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네 인생사는 이리저리 엮여 가고, 여기저기 엮이는 가운데 저마다의 자리를 다져간다. 서로 엮여 있는 모두가 큰 불만이 없이 OK 싸인을 내는 그 찰나의 안정과 평온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행복도 어쩌면 제자리에 두기다. 사람들은 늘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다니지만, 자신의 행복을 제자리에 두지 못했기 때문에 헤매는 것이 아닐까?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는 사람이 어찌 행복을 알겠는가? 행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꿈이라도 꾸겠는가? 언제 어디선가 맛보던 행복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서 다시 찾느라 허둥대는 것은 아닐까? 농 밑으로 굴려버리곤, 까마득히 잊어버린 구슬처럼... 너무 까맣게 잊어버려서 소중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영롱한 구슬처럼...
나이를 먹는 것도 어쩌면 한 살 한 살 나 자신을 제자리에 두는 중이다. 나이 먹기는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다. 잊어버렸다 해도 나이는 차곡차곡 어김없이 제자리에 쌓이는 법이다. 한 해 한 해 오차 없이 나이를 먹는 것도 질서를 지키는 일이다. 해마다 자신의 나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오르도(Ordo)를 따르는 일이다. 해마다 오케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제자리를 찾아가다가도, 죽는 데는 순서도 없고 서열도 없다. 죽고 난 다음에는 자리도, 순서도, 서열도, 계급도 더 이상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늘 제자리 두기를 못하던 나도 언젠가는 어김없이 나 자신을 온전히 제자리에 두게 될 것이다. 가장 못하던 제자리 두기를 가장 잘하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어쩌면 인생은 제자리 두기를 배우는 실습기간이다.
신창석 교수
국가민속문화재 제282호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