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중수의 문화사색] 안동 하회, 분천, 묵계 지방의 정자문화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의 정자는 숫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가히 조선의 정자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영남지방의 정자를 좌 안동, 우 함양 이라 했던가? 또 안동의 정자 문화는 퇴계 선생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도 한다. 

 퇴계 선생 이전에는 그 분께 학문적, 정신적 영향을 미쳤다는 농암 이현보 선생의 긍구당이 수양하는 공간이었다. 성리학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겸손의 상징 김계행 선생의 보백당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퇴계 선생의 이후에는 그 분의 문맥과 학통에 상당한 기반을 둔 수많은 정자가 있다.

 

 안동문화는 하회마을이 연상된다.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2010년 0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자연문화유산분야로 등재되었다. 하회마을 주변에 있는 정자를 한 번 살펴보자. 

 하회는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 ~ 1607) 선생과 그 형인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 1539 ~ 1601) 선생의 정자로 분류된다. 두 분의 정자로는 하회마을 내부에 양진당과 충효당을 비롯하여 빈연정사와 원지정사가, 마을 강 건너편 부용대의 옥연정사와 겸암정사가 있다. 


<겸양정사>


서원 내부 정자를 살펴보자. 겸암 선생을 주 배향하는 화천서원의 지산루(地山樓)와 국내 유명 서원으로 알려진 서애 선생을 주 배향하는 병산 서원의 만대루(晩對樓)가 있다. 지산루와 만대루는 2층 구조로 모습이 매우 흡사하다. 지산루의 ‘땅’과 ‘산’은 주역에 근거해 ‘겸손’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는 겸암 선생의 호를 상징하는 겸손과 맥을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다. 만대루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의 오언율시의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다고 한다.

 

 특히 구국의 인물 임지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천거하고 지지한 서애 선생과 관련된 정자를 살펴보자. 김성일과 퇴계 선생께 동문수학한 서애 선생의 칭송을 살펴보자. 21세 때 퇴계는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과 칭찬을 하였다. 선조는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하회마을 낙동강 서쪽 물가 언덕을 의미하는 서애는  선생의 호이며, 이는 그 분이 고향 사랑을 짐작케 할 만하다. 낙동강 서쪽 물가 언덕에 터가 좁아 서당을 짓지 못하고 상봉대라 명하고, 옥 같이 맑은 자연을 상징하는 부용대에 옥연정사를 지었다. 옥연정사는 서애 선생이 말년 고향에 와서 주옥같은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을 편찬하였던 곳이다. 

<옥연정사>

서애 선생의 종택 충효당 근처 원지정사 내의 연좌루는 그가 35세 무렵 조성되었으며, 고향에 내려오면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과 국정 대책마련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앉아서 기쁘다라는 연좌루(燕坐樓)는 원지정사의 건물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두 건물 모두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용대를 마주 보고 서 있다. 이곳에서 보면 하회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강물과 부용대의 자연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고, 눈을 더 먼 곳으로 옮기면 원지산(遠志山)이 다가온다. '원지정사'라고 지은 이유 역시 원지산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지산과 관련성 외에도 서애 선생은 원지정사라는 이름에 크게 세 가지 뜻을 담았다고 한다.

 첫 째는 원지(遠志), 곧 '원대한 뜻'를 가르키는 유학자의 크고 곧은 기상과 올바른 품성을 갖는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집안에 들어와 있을 때 '원지(遠志)' 운운하다가도 세상 바깥으로 나가면 권력과 출세 앞에서 초라한 풀이 되고 마는 자신을 탓하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도연명의 시에서 세상의 온갖 욕망과 멀리하려는 자신의 뜻을 담았다.


<서애 종택 충효당과 연좌루>


당대 대학자요 정치 및 군사 전략가인 서애 선생은 임금과 부모에 대한 충효를 추구한 현실감 있는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만년에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평생에 세 가지 한이 있는데,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 것이 첫째 한이요, 벼슬이 외람된데도 일찍이 물러나지 못한 것이 둘째 한이며, 도를 배울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이 셋째 한이로다”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 ~ 1555) 종택과 긍구당(肯構堂) 및 애일당(愛日堂)을 살펴보자. 긍구당은 퇴계 선생의 정신적 축을 형성시킨 농암 선생의 정자로, 본래 영천이씨 분천동(汾川洞) 입향시조(入鄕始祖)인 이헌이 고려 말에 한양 출입 시 아름다운 청량산 기슭에 반해 창건하였다. 접객별당으로 사용하였던 이곳은 그 뒤에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 선생이 중수하였으며, 당호(堂號)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간다는’ 의미의 긍구당이라 전해진다.

 

 이 정자는 원래 도산면 분천리 널찍한 후원에 담장도 없이 여유있는 배치형식을 하고 있었다. 1976년 안동댐 수몰로 도산면 운곡리로 이건되었다가, 이후 ‘농암 종택 복원사업’이 도산면 가송리에서 추진됨에 따라 긍구당을 농암 종택 내부로 이전하였다.

 은둔해 세상 소식을 듣지 않는 사람의 거처의 적당한 곳인 분천리 계곡의 아름다운 축대바위를 농암이라 하고 호로 삼았다. 

 

 농암 선생이 일명 귀먹바위 주변과 관련된 효를 실천하고자 조성한 애일당 정자를 살펴보자. ‘효자는 늙은 부모를 모실수 있는 시간이 부족함으로 하루하루 날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며 효를 수행한다’는 뜻에서 취한 당호이다. 애일당은 농암 선생의 별당으로 그가 어버이에게 효행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산수와 전원을 벗 삼아 어부가, 효빈가, 농암가등을 남긴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시가를 읊조리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농암집(聾巖集)》의 <농암애일당(聾巖愛日堂)> 부분을 보면 효행의 기록이 잘 나타난다.

“애일당은 영천 고향에 있었으나 경계가 협소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할 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 1512년 귀먹바위 위에 집을 짓기로 했다. 농암은 양친을 포함한 어른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 드렸다 한다. 또 자손들 역시 이 마루에 올라 애일당 당호의 뜻을 생각하고 여가가 있으면 조용히 가슴을 열고 수양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였다.”

<긍구당, 애일당 및 농암 종택 전경>


 보백당(寶白堂)과 만휴정(晩休亭)으로 가 보자. 길안면 묵계리에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 1431 ~1517) 선생이 건립한 정자이다. 그는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부 재제학을 역임하였고 조선 초 청백리로 선정되었으며 "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맑고 깨끗함 뿐이다." 라는 유훈을 남겼다. 너럭바위 위의 계곡에 별서 정원인 만휴정이 있으며, 종택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보백당이라 이름 짓고 유생들에게 지식을 전파하였다. 보백당 선생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큰 화는 면하였다. 아울러 그에 관련된 성리학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겸손을 나타내는 도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이 연산군 원녀에 작성되어 보백당 내의 한글로 번역된 자료를 첨부하였다.


<보백당과 만휴정>


 < 인터넷상의 관련글도 참조 했음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


정중수 교수

국립안동대학교 공과대학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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