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중 정원가 예찬 32] 백성들을 위한 농서편찬에 재능을 바친 큰 정원가 금양잡록의 강희맹 편



18~19세기 문인들의 원림문화 중흥과 원예취미에 영향을 미친 인물에 관해서는 지난 호에 강희안을 조명한 바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 중에 또 한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강희안의 동생인 강희맹이다. 역사 속에서 한 시대만 놓고 보더라도 내놓을 만한 인물이 한 둘이 아닐 텐데 한 집안 사람을 연거푸 소개할 정도로 조선 시대 인물 층이 빈약할까? 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희맹은 이러한 예찬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예부터 형만 한 동생이 없다했지만 동생인 강희맹의 업적과 시대적 영향력은 가히 형을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희맹 (출처httpbonlivre.tistory.com841) 


 강희맹에 관한 예찬은 차고 넘칠 정도이지만 이번에는 그의 글쓰기에 나타난 자연관과 행적을 통해 정원가라는 관점에서 집중 조명해 본다.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본관은 경남 진주이며,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무위자(無爲子),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지돈녕부사 석덕(碩德)의 아들로, 1447년(세종 29) 18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463년 강희맹이 진헌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북경에 갔을 때 그의 글솜씨를 직접 보기위해 중국선비들이 모여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1468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에 봉해졌고 1473년에 병조판서, 1482년에는 좌찬성에 이르렀다. 

 강희맹은 형과 같이 그림에도 능해 송죽과 산수화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 일본에 그의 작품 중 유일한 <독조도>가 남아있다고 하며 이를 일본에서 반환하기 위한 운동이 일기도 했다. 실록편찬으로는 신숙주 등과 함께 작업한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이 있다. 세조 때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 직접 참여했다. 저서로는 농업에 관한 《금양잡록》, 서민의 해학을 모은 《촌담해이》 등이 전하고 있다(다음백과사전). 


<독조도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그는 어려서부터 경전에 심취해 아예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집안의 걸죽한 대가들의 영향관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강희맹의 해박한 지식과 농업에 대한 관심은 문절공 이행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직접 사사받은 적은 없지만 문절공은 농서인 양잠방을 편찬한 사람으로 부친의 스승이기도 했다(박관우,2017). 또 형인 강희안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 이후에 집안 어른들과 형 강희안의 시를 모아 진산세고(晋山世稿)를 정리하면서 받은 영향 또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평생을 통해 보여준 학문적 예술적 재능은 다방면에서 눈부셨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다보면 모두 다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기는 어려운 법인데 그는 문인의 경지를 넘어서고 농학자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 높은 이념적 경지를 보였다.

이는 한마디로 융합적인 차원의 자연과의 교감능력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의 폭넓은 접촉 결과는 오로지 백성인 농민들을 향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금양잡록》은 개인적으로 저술한 최초의 백과사전식 농서로 그가 직접 농사를 체험하며 편찬한 것이다. 

 80품종에 달하는 작물의 특성과 재배법을 다루고, 재배법, 풍해, 토양선택 문제 등을 본인의 실험결과를 반영하여 표준을 제안했다. 곡물이름을 이두와 한글로 표기하여 농민들이 익히기 쉽게 했으며 《농사직설》과 차별성은 토성에 맞추어 적합한 품종과 특성, 내풍성, 농법의 차이 등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다음백과사전).


<금양잡록>


 또 《촌담해이》는 서민 깊숙이 다가선 음담패설 수준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으로 백성의 진솔한 소리를 들으려 했던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가히 파격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에는 농경생활에서 느끼는 감흥을 담은 시를 담아 선비다운 풍모를 마음껏 보였다.

 

 그가 평생을 걸쳐 추구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그의 형인 강희안과 비교해 비슷한 재주를 가졌지만 다른 점은 무엇일까? 동양문화에 나타나는 산수에 대한 동경은 바로 자연 자체의 적용방식을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반영한 결과라 볼 수 있다(고부응, 2005). 그래서 문인들은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애호를 보여왔고 특히 자연생물의 특성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은 인물들이 존재했다. 그 학문적 경지가 높을수록 갖춰야하는 기본소양 같은 것이었다. 이 대표적 인물이 강희안과 강희맹 형제라 할 수 있다. 강희안과 달리 그의 저술에서는 정원가나 원예가로서 활동한 직접적인 사실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찰을 위한 출발은 자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공통점은 여러 곳에서 굵직하게 발견된다.

강희맹의 글을 보면 자연의 이치에서 인간의 이치에 빗대어 설명하는 교훈적 글이 많다. 이는 자연을 대하는 그의 유학자적 풍모를 보여준다. 자연의 원리를 깨달아 인생의 도리와 접목시킨 것을 보면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점이다.

 그가 12살 때 지은 고목이라는 시를 보면 자연현상에 빗대어 설명한 세상의 이치가 놀랍다.

  

   고목(古木)

“한 그루 고목나무 봄바람을 허리에 두르고, 

빈 산, 아득한 안개 속에 홀로 서 있네. 

생각하니 해마다 꽃비가 내린 뒤에 

몇 가지에 꽃잎 지고, 몇 가지에나 꽃이 피었나.”

 

 그밖에도 등산설에 보면 삼형제가 주는 인생의 교훈을 전하면서도 산 위에 올랐을 때 정상에서 보는 감흥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고 꿩사냥 글에서는 생물의 특성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희맹은 농업에 관심이 지대했고 백성을 위하는 애민정신이 투철했다. 당시 양반만의 취미에 가까운 원예나 정원조성보다는 실용적인 농업서 편찬에 매진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강희맹의 실용적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연을 심은 연못이 아직도 경기도 시흥에 남아있다.

 경기읍지 안산편에 보면 초산면에 전당연(錢塘蓮)이 있는 못이 있는데 강희맹(姜希孟)이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가서 가져온 연을 심은 곳으로 이로써 고을 이름을 연성(蓮城), 못을 전당이라고 하고 연직(蓮直) 6명을 둔 사실을 적었다.

 그가 편찬에 참여한 《동국여지승람》은 한반도의 팔도 각 지역의 변천과정, 성씨, 풍속, 산하, 국방과 교통, 통신시설 등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된 지리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아도 그가 겸비했을 경관을 대하는 식견을 가늠할 수 있다.

 강희맹은 형 강희안과 함께 자연을 인간의 심성을 함양하는 도구로 삼았지만 그 수련의 결과로 얻어진 해박한 자연에 관한 지식을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애민정신이 컸던 큰 의미의 정원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경수 외 8인(2005), 동서양 문학에 나타난 자연관, 보고사.

다음백과사전

박관우(2017), 조선전기 문신 사숙재 강희맹 농학사상 연구(2), 브레이크 뉴스 칼럼

서울대학교 규장각 지리지 종합정보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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