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1일부터 4월 9일까지 경희궁 터에 자리 잡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독살되어 붕어(崩御)하신 고종광무태황제의 국상관련 사진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서울역사박물관 ‘고종황제의 마지막 길’ 사진전>
전시회 홍보문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07년 태황제로 퇴위 당하였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태왕으로 강등된 고종은 경운궁에 머물다가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고종 황제의 국장과 그 행렬을 사진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고종황제의 마지막 길을 추모해보고자 한다.”
위 문구들은 국가기관이 일부 역사학자들과 애국민간시민단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된 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민병석 그리고 한상학과 같은 친일역적매국노들이 일본의 사주로 고종황제의 독살을 계획적으로 주도한 것과 이런 억울한 황제의 죽음이 3.1독립만세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을 공인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친일역적매국노들이 일본의 사주로 고종황제를 독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의 중대한 외교적 자주독립투쟁들을 주도했던 고종황제를 독살하지 않으면 대한제국에서의 일본식민통치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1907년 6월 16일 고종황제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며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기 위해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그리고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를 헤이그특사로 파견했었기 때문이었다;
<왼쪽부터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이준(李儁), 이위종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둘째, 고종황제는 일본의 침략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고 이를 강력히 저항했다는 ‘對日歷史文化優越論’으로 한일 양국 민족이 함께 병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일본의 침략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인정한 국제조약을 위반했다는 ‘不法論’으로 국제회의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할 수 있는 국제법적인 근거를 천명하기 위해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단장으로 임명하여 1919년 1월 18일에 개최 될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었기 때문이었다 (Cf. 최덕규. "파리강화회의(1919)와 김규식의 한국독립외교: 고종황제의 자주독립외교의 계보를 중심으로." 《서양사학연구》 35집, 2015);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임시정부대표단과 한국공보관 직원들, 앞줄 맨 오른쪽이 김규식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셋째, 황실을 복원하려는 복벽파(復辟派)는 물론 민주공화파 독립운동가 모두에게 고종황제는 이념 사상적으로 분파되었던 해외독립투쟁가들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었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척사파 계열 독립운동의 핵심이었던 고종황제는 해외에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왜적들의 식민침탈에 잘 훈련되고 조직화된 군사력으로 저항하고 투쟁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이상설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한광복군의 설립을 전폭적으로 재정 지원했고 망명의지를 이상설과 이회영에게 분명히 확약하셨다. 이에 대한광복군은 1914년과 1918년 두 번에 걸쳐 우당 이회영을 통해 고종의 망명을 추진했었다 (Cf. 표학렬.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알에이치코리아: 2015, 303).
강제로 퇴위됐지만 항일독립투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고종이 해외에 공식적인 대한제국 망명정부를 세워 망명하게 되면 독립운동은 더한층 강력해져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통치의 부당성이 만 천하에 발각되게 되고 일본은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를 모면하고 해외항일독립투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이완용과 같은 역적매국노들을 교사해 고종을 독살하고 만 것이었다.
<독살되기 1년 전 경운궁에서 촬영된 고종황제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이렇게 굳건한 자주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고 항일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고종의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전시한 ‘고종황제의 마지막 길 1919년 3월 3일’ 국장사진전이 98주년을 맞는 2017년 3.1절 즈음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동안 일부소수역사학자들과 애국시민민간단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된 고종황제의 독살과 3.1독립만세운동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이 사실이 전시홍보문구에 구체적으로 기술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행정부와 관련부처들은 다음과 같은 업무들을 추진해야할 의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첫째, 교육행정당국은 고종황제의 무능하고 유약한 통치방식으로 주권이 상실됐다는 그 간의 친일역적매국사관적인 곡해들을 객관적이며 올바른 애국민족사관 방식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국정교과서에 공식적으로 기술하여야 한다;
둘째,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은 친일왜구역적매국노들의 간교하고 잔악한 민족반역행위들을 더욱 더 철저히 고증하고 발본 색출해야 한다. 그들이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어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들을 철저히 파악하여 이를 국고에 환수하고 민간독립투쟁유공자를 포함한 황실독립투쟁유공자 후손들의 복지증진과 국격 회복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해야 한다;
셋째, 천박하고 저질스런 친일왜구역적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이 염치도 없이 떵떵거리며 대낮에 고개를 쳐들고 다니며 무지 목매한 갑질들을 해대는 그런 파렴치하고 뻔뻔스런 추태들이 더 이상 우리 사회 곳곳에서 두 번 다시 목도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조항들을 보강하여 일벌백계해야 한다;
넷째, 행정부는 매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3.1절 기념식에 3.1절의 기원이 되는 고종황제의 독립투쟁정신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공문화하여 이를 국민들에게 공포하고 그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한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업적을 추서하여 대한황실직계손들에게 그 독립유공자보훈혜택이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매년 3.1절 기념식에 대한광복회회원들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초청되어 축사도 하고 만세삼창도 외치는데 정작 대한광복회의 설립자이며 항일독립투쟁의 중심에 계셨던 고종황제의 직계 황손들이 초청되지도 않고 순서에 직접 참여할 수도 없게 의도적으로 배재시키는 행태는 매우 무례하고 후안무치한 처사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고종광무태황제의 자주독립정신과 항일투쟁의지를 기념하고 이를 미래 세대들에게 지속적으로 교육하며 민족계몽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한황실의 5대 수장이며 고종황제의 증손인 이원 황사손 저하를 내년 3.1절 기념식부터라도 공식적인 연사로 초청하여 3.1절의 역사적 의의와 기원을 되새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정신 위에 설립된 대한민국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황실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이며 최소한의 도리가 되기 때문이다.
2017년 올해는 3.1절 98주년과 함께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고종황제의 자주독립정신과 부국강병근대계몽정책의 씨앗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친일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훼파되고 훼손된 대한황실이 남북을 하나로 묶는 한민족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온전히 복원되는 원년이 되도록 애국민족사관의 확립을 굳건히 다져야 한다.
1919년 3월 1일 광화문 네거리 ‘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여 고종황제의 독살죽음에 분노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의 모습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더구나 탄핵정국으로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 그리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양분되어 남남갈등의 골이 깊어 질대로 깊어졌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태극기를 든 시위자나 촛불을 든 시위자 상관없이 자신의 주장들을 잠시 내려놓고 차벽이 사라진 광화문광장과 대한문광장에서 한 손엔 태극기를 다른 한손엔 촛불을 높이 치켜들어 98년 전 일본경찰의 잔악무도한 총칼에 몸이 찢기어 유혈이 낭자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순국선열들의 간절한 소망의 함성들을 되새기며 민족자결주의적인 자긍심을 고취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의와 차별로 절망과 좌절의 그늘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우리주변의 불우한 이웃들과 김씨 일가의 3대 세습공포정치로 고통 받고 있을 북한 동포들에게 통일희망의 밝은 횃불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3.1절이 되도록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다.
김영관 (PhD., McGill)
사단법인 한국효문화원 원장,
대한황실문화원 문화재환수위 연구위원/
해외왕실교류위 수석위원,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방문연구 교수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종교철학 교수
2017년 2월 21일부터 4월 9일까지 경희궁 터에 자리 잡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독살되어 붕어(崩御)하신 고종광무태황제의 국상관련 사진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서울역사박물관 ‘고종황제의 마지막 길’ 사진전>
전시회 홍보문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07년 태황제로 퇴위 당하였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태왕으로 강등된 고종은 경운궁에 머물다가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고종 황제의 국장과 그 행렬을 사진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고종황제의 마지막 길을 추모해보고자 한다.”
위 문구들은 국가기관이 일부 역사학자들과 애국민간시민단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된 이완용, 이기용, 윤덕영, 민병석 그리고 한상학과 같은 친일역적매국노들이 일본의 사주로 고종황제의 독살을 계획적으로 주도한 것과 이런 억울한 황제의 죽음이 3.1독립만세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을 공인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친일역적매국노들이 일본의 사주로 고종황제를 독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의 중대한 외교적 자주독립투쟁들을 주도했던 고종황제를 독살하지 않으면 대한제국에서의 일본식민통치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1907년 6월 16일 고종황제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며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기 위해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그리고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를 헤이그특사로 파견했었기 때문이었다;
<왼쪽부터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이준(李儁), 이위종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둘째, 고종황제는 일본의 침략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고 이를 강력히 저항했다는 ‘對日歷史文化優越論’으로 한일 양국 민족이 함께 병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일본의 침략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인정한 국제조약을 위반했다는 ‘不法論’으로 국제회의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할 수 있는 국제법적인 근거를 천명하기 위해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단장으로 임명하여 1919년 1월 18일에 개최 될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었기 때문이었다 (Cf. 최덕규. "파리강화회의(1919)와 김규식의 한국독립외교: 고종황제의 자주독립외교의 계보를 중심으로." 《서양사학연구》 35집, 2015);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임시정부대표단과 한국공보관 직원들, 앞줄 맨 오른쪽이 김규식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셋째, 황실을 복원하려는 복벽파(復辟派)는 물론 민주공화파 독립운동가 모두에게 고종황제는 이념 사상적으로 분파되었던 해외독립투쟁가들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었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척사파 계열 독립운동의 핵심이었던 고종황제는 해외에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세워 왜적들의 식민침탈에 잘 훈련되고 조직화된 군사력으로 저항하고 투쟁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이상설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한광복군의 설립을 전폭적으로 재정 지원했고 망명의지를 이상설과 이회영에게 분명히 확약하셨다. 이에 대한광복군은 1914년과 1918년 두 번에 걸쳐 우당 이회영을 통해 고종의 망명을 추진했었다 (Cf. 표학렬.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알에이치코리아: 2015, 303).
강제로 퇴위됐지만 항일독립투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고종이 해외에 공식적인 대한제국 망명정부를 세워 망명하게 되면 독립운동은 더한층 강력해져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통치의 부당성이 만 천하에 발각되게 되고 일본은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를 모면하고 해외항일독립투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이완용과 같은 역적매국노들을 교사해 고종을 독살하고 만 것이었다.
<독살되기 1년 전 경운궁에서 촬영된 고종황제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이렇게 굳건한 자주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고 항일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고종의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전시한 ‘고종황제의 마지막 길 1919년 3월 3일’ 국장사진전이 98주년을 맞는 2017년 3.1절 즈음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동안 일부소수역사학자들과 애국시민민간단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된 고종황제의 독살과 3.1독립만세운동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이 사실이 전시홍보문구에 구체적으로 기술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행정부와 관련부처들은 다음과 같은 업무들을 추진해야할 의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첫째, 교육행정당국은 고종황제의 무능하고 유약한 통치방식으로 주권이 상실됐다는 그 간의 친일역적매국사관적인 곡해들을 객관적이며 올바른 애국민족사관 방식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국정교과서에 공식적으로 기술하여야 한다;
둘째,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은 친일왜구역적매국노들의 간교하고 잔악한 민족반역행위들을 더욱 더 철저히 고증하고 발본 색출해야 한다. 그들이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어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들을 철저히 파악하여 이를 국고에 환수하고 민간독립투쟁유공자를 포함한 황실독립투쟁유공자 후손들의 복지증진과 국격 회복을 위한 기금으로 활용해야 한다;
셋째, 천박하고 저질스런 친일왜구역적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이 염치도 없이 떵떵거리며 대낮에 고개를 쳐들고 다니며 무지 목매한 갑질들을 해대는 그런 파렴치하고 뻔뻔스런 추태들이 더 이상 우리 사회 곳곳에서 두 번 다시 목도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조항들을 보강하여 일벌백계해야 한다;
넷째, 행정부는 매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3.1절 기념식에 3.1절의 기원이 되는 고종황제의 독립투쟁정신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공문화하여 이를 국민들에게 공포하고 그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한 의친왕의 항일독립투쟁업적을 추서하여 대한황실직계손들에게 그 독립유공자보훈혜택이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매년 3.1절 기념식에 대한광복회회원들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초청되어 축사도 하고 만세삼창도 외치는데 정작 대한광복회의 설립자이며 항일독립투쟁의 중심에 계셨던 고종황제의 직계 황손들이 초청되지도 않고 순서에 직접 참여할 수도 없게 의도적으로 배재시키는 행태는 매우 무례하고 후안무치한 처사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고종광무태황제의 자주독립정신과 항일투쟁의지를 기념하고 이를 미래 세대들에게 지속적으로 교육하며 민족계몽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대한황실의 5대 수장이며 고종황제의 증손인 이원 황사손 저하를 내년 3.1절 기념식부터라도 공식적인 연사로 초청하여 3.1절의 역사적 의의와 기원을 되새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정신 위에 설립된 대한민국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황실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이며 최소한의 도리가 되기 때문이다.
2017년 올해는 3.1절 98주년과 함께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고종황제의 자주독립정신과 부국강병근대계몽정책의 씨앗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친일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훼파되고 훼손된 대한황실이 남북을 하나로 묶는 한민족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온전히 복원되는 원년이 되도록 애국민족사관의 확립을 굳건히 다져야 한다.
1919년 3월 1일 광화문 네거리 ‘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 앞에 모여 고종황제의 독살죽음에 분노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의 모습 사진출처=네이버백과사전
더구나 탄핵정국으로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 그리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양분되어 남남갈등의 골이 깊어 질대로 깊어졌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태극기를 든 시위자나 촛불을 든 시위자 상관없이 자신의 주장들을 잠시 내려놓고 차벽이 사라진 광화문광장과 대한문광장에서 한 손엔 태극기를 다른 한손엔 촛불을 높이 치켜들어 98년 전 일본경찰의 잔악무도한 총칼에 몸이 찢기어 유혈이 낭자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순국선열들의 간절한 소망의 함성들을 되새기며 민족자결주의적인 자긍심을 고취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의와 차별로 절망과 좌절의 그늘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우리주변의 불우한 이웃들과 김씨 일가의 3대 세습공포정치로 고통 받고 있을 북한 동포들에게 통일희망의 밝은 횃불을 환하게 비추어 주는 3.1절이 되도록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다.
김영관 (PhD., McGill)
사단법인 한국효문화원 원장,
대한황실문화원 문화재환수위 연구위원/
해외왕실교류위 수석위원,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방문연구 교수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종교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