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숨바꼭질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숨바꼭질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나 보다. 이 세상에서 처음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은 숨어 있었다. 이제 눈을 부릅뜨고 찾아나서야 한다. 먹거리를 찾아서, 필요한 것을 찾아서, 사랑할 것을 찾아서, 고민의 시간을 찾아서, 쉴 곳을 찾아서. 숨바꼭질의 영역이 넓어지고 찾을 것이 많아질수록, 사는 일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놀이가 된다.
<『건초더미에서 숨바꼭질』, William Bliss Baker, 1881.>
숨바꼭질은 숨기와 찾기의 기술이다. 숨기의 초보적 단계는 그냥 내 눈을 가리는 것이다. 벽에 걸린 옷자락이나 이불자락, 장롱 모퉁이나 커튼에 나의 시야를 완벽하게 가리면 그것으로 꼭꼭 숨은 줄 알았다. 찾기에 나서는 어린 술래는 열을 세자마자 물어본다. “다 숨었나?” 순진한 아이는 “숨었다”하고 대답을 한다. 바로 잡힌 그 아이는 이제 대답하지 않는 침묵의 기술을 배우게 된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야 방안에서 놀지만, 숨바꼭질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아이들은 점점 자라는 것 같다. 고방이며 마루 밑으로, 장독대며 마당 구석이나 헛간으로, 푹신한 이불 속이나 으슥한 볏가리 속으로. 그렇게 집안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진기한 사물들을 발견하고 익히게 된다. 집안 구석구석에는 숨어 있는 귀신들도 많다. 성주 단지 뒤에 삼신할매, 뒷간에 숨어 있는 몽달귀신, 담 모퉁이 대추나무에 매달린 처녀귀신. 뒤꼍의 칠성신을 만나기도 한다. 칠성신은 회화나무에 붙어사는지, 할머니는 걸핏하면 고목 밑에 찬물 한 그릇을 떠놓고 손을 비비며 흥얼거리셨다. 숨바꼭질은 그래서 이유 없는 공포와의 대결이기도 했다. 숨기 좋은 곳에는 늘 공포의 대상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사랑채에는 귀신이 없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할아버지가 계신다. 겁이나 숨어들기도 어렵지만, 숨기만 하면 아무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사랑채 뒤에 붙은 고방에 숨어들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 했다. 용케도 고방으로 귀신처럼 스며드는 데에 성공했다. 별 세계였다. 옛날 책이며,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구들, 겹겹이 쌓인 낡은 상자들, 몇 곳을 열다보니 침을 고이게 하는 곶감과 유과도 있었다. 상자를 들어내는 순간, 집지킴이라는 구렁이와 맞닥뜨렸다. 이놈은 그냥 공포 분위기만 만드는 귀신이 아니라, 진짜 두려움 그 자체였다. 난생 처음으로 시간이 정지되었다.
구렁이가 슬그머니 고방 구석으로 난 구멍으로 빠져나가고, 할아버지가 대청으로 담뱃대를 털려 나가셨을 때, 비로소 나도 고방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곶감에는 입도 대보지 못했고,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술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너무 엉뚱한 곳이나 깊은 곳에 숨어버리면, 그냥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함께 놀 수 없었다.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사진제공=문화재청>
우리가 자라던 집에는 왜 그리 뜰도 많은 지. 뒤꼍, 안뜰, 마당, 닭장이 있는 감나무 밑 뒤뜰, 장독대가 놓인 배나무 밑 뜰. 뒤꼍에서 가파른 뒷산으로 오르면 숨을 곳이 무궁무진하다. 신발을 제대로 낄 줄 알고 뜀박질을 할 때면, 온 동네가 숨바꼭질 영역이 된다. 우리는 이제 담 넘어 옆 집 창고로, 남의 집 뒤꼍으로, 술도가의 누룩 창고 뒤로, 방앗간의 기묘한 기계들 사이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숨바꼭질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숨는 기술과 찾아내는 논리도 복잡하게 발달하였다.
나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제일 어린 동생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또래 동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형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큰 누님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나를 너로 바꾸어 보면 찾기도 쉬워진다. 땅 속으로 꺼져버렸나 싶을 정도로 꼭꼭 숨어버린 마지막 선수를 딱 찾아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절망의 숨바꼭질도 있었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어렸을 때였던 것 같다. 형들이 한두 번 술래를 거친 다음 내가 술래가 되었다. 겨우 열을 세고, 외쳤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이번에는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찾아다녀도 정말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모퉁이 저 골목을 한참 헤매다가 결국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못찾겠다 꾀꼬리! 못찾겠다 꾀꼬리! 그러나 꾀꼬리 소리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술래가 열을 세는 사이에 멀리 저희들만의 놀이를 찾아서 사라진 것이었다. 낄 수 없는 숨바꼭질 대신 내 또래를 찾아 갈 수밖에.
산다는 게 숨바꼭질이다. 꼭꼭 숨어 있는 돈을 찾아서, 명예를 찾아서, 이름을 찾아서, 권력을 찾아서 헤매는 숨바꼭질이다. 인생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바뀌지 않는 술래다. 꼭꼭 숨어 있는 건강을 찾아서, 즐거움을 찾아서, 마음의 평온을 찾아 헤매는 술래다. 인생은 끊임없이 기회를 찾는 술래다. 분연히 일어날 때를 찾아서, 나아갈 길을 찾아서, 앉을 자리를 찾아서 그리고 누울 자리를 찾아서 헤매는 영원한 술래다.
사는 게 끝없는 숨바꼭질이다. 아무도 아닌 채로 태어났으니, 결국에는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손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니, 이제 손들고 찾아야 할 것이다. 나다운 나를. 아무도 아닌 원래의 나를. 원래의 내 안에 숨어있는 그 무엇을. 너무 깊이 너무 엉뚱하게 숨어 있어 결코 찾지 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찾아보자. 그 길이 비록 되돌아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이제 숨바꼭질 하던 아이들은 간 데 없어도, 나 홀로 숨바꼭질에 나선다. 살아온 그 길에 감쪽같이 숨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알다가도 모를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서, 어린 날의 술래 안에 숨어버린 나를 찾아서 나선다. 동네 이 모퉁이 저 모퉁이,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이제는 낼 수 없는 그 높은 음 자리표 웃음소리 들려온다. 들켜버린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직도 들려온다.
신창석 교수
국가민속문화재 제282호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산다는 게 숨바꼭질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숨바꼭질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나 보다. 이 세상에서 처음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은 숨어 있었다. 이제 눈을 부릅뜨고 찾아나서야 한다. 먹거리를 찾아서, 필요한 것을 찾아서, 사랑할 것을 찾아서, 고민의 시간을 찾아서, 쉴 곳을 찾아서. 숨바꼭질의 영역이 넓어지고 찾을 것이 많아질수록, 사는 일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놀이가 된다.
<『건초더미에서 숨바꼭질』, William Bliss Baker, 1881.>
숨바꼭질은 숨기와 찾기의 기술이다. 숨기의 초보적 단계는 그냥 내 눈을 가리는 것이다. 벽에 걸린 옷자락이나 이불자락, 장롱 모퉁이나 커튼에 나의 시야를 완벽하게 가리면 그것으로 꼭꼭 숨은 줄 알았다. 찾기에 나서는 어린 술래는 열을 세자마자 물어본다. “다 숨었나?” 순진한 아이는 “숨었다”하고 대답을 한다. 바로 잡힌 그 아이는 이제 대답하지 않는 침묵의 기술을 배우게 된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야 방안에서 놀지만, 숨바꼭질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아이들은 점점 자라는 것 같다. 고방이며 마루 밑으로, 장독대며 마당 구석이나 헛간으로, 푹신한 이불 속이나 으슥한 볏가리 속으로. 그렇게 집안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진기한 사물들을 발견하고 익히게 된다. 집안 구석구석에는 숨어 있는 귀신들도 많다. 성주 단지 뒤에 삼신할매, 뒷간에 숨어 있는 몽달귀신, 담 모퉁이 대추나무에 매달린 처녀귀신. 뒤꼍의 칠성신을 만나기도 한다. 칠성신은 회화나무에 붙어사는지, 할머니는 걸핏하면 고목 밑에 찬물 한 그릇을 떠놓고 손을 비비며 흥얼거리셨다. 숨바꼭질은 그래서 이유 없는 공포와의 대결이기도 했다. 숨기 좋은 곳에는 늘 공포의 대상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사랑채에는 귀신이 없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할아버지가 계신다. 겁이나 숨어들기도 어렵지만, 숨기만 하면 아무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사랑채 뒤에 붙은 고방에 숨어들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 했다. 용케도 고방으로 귀신처럼 스며드는 데에 성공했다. 별 세계였다. 옛날 책이며,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구들, 겹겹이 쌓인 낡은 상자들, 몇 곳을 열다보니 침을 고이게 하는 곶감과 유과도 있었다. 상자를 들어내는 순간, 집지킴이라는 구렁이와 맞닥뜨렸다. 이놈은 그냥 공포 분위기만 만드는 귀신이 아니라, 진짜 두려움 그 자체였다. 난생 처음으로 시간이 정지되었다.
구렁이가 슬그머니 고방 구석으로 난 구멍으로 빠져나가고, 할아버지가 대청으로 담뱃대를 털려 나가셨을 때, 비로소 나도 고방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곶감에는 입도 대보지 못했고,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술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너무 엉뚱한 곳이나 깊은 곳에 숨어버리면, 그냥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함께 놀 수 없었다.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사진제공=문화재청>
우리가 자라던 집에는 왜 그리 뜰도 많은 지. 뒤꼍, 안뜰, 마당, 닭장이 있는 감나무 밑 뒤뜰, 장독대가 놓인 배나무 밑 뜰. 뒤꼍에서 가파른 뒷산으로 오르면 숨을 곳이 무궁무진하다. 신발을 제대로 낄 줄 알고 뜀박질을 할 때면, 온 동네가 숨바꼭질 영역이 된다. 우리는 이제 담 넘어 옆 집 창고로, 남의 집 뒤꼍으로, 술도가의 누룩 창고 뒤로, 방앗간의 기묘한 기계들 사이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숨바꼭질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숨는 기술과 찾아내는 논리도 복잡하게 발달하였다.
나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제일 어린 동생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또래 동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형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내가 큰 누님이라면 어디에 숨었을까? 나를 너로 바꾸어 보면 찾기도 쉬워진다. 땅 속으로 꺼져버렸나 싶을 정도로 꼭꼭 숨어버린 마지막 선수를 딱 찾아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절망의 숨바꼭질도 있었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어렸을 때였던 것 같다. 형들이 한두 번 술래를 거친 다음 내가 술래가 되었다. 겨우 열을 세고, 외쳤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이번에는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찾아다녀도 정말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모퉁이 저 골목을 한참 헤매다가 결국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못찾겠다 꾀꼬리! 못찾겠다 꾀꼬리! 그러나 꾀꼬리 소리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술래가 열을 세는 사이에 멀리 저희들만의 놀이를 찾아서 사라진 것이었다. 낄 수 없는 숨바꼭질 대신 내 또래를 찾아 갈 수밖에.
산다는 게 숨바꼭질이다. 꼭꼭 숨어 있는 돈을 찾아서, 명예를 찾아서, 이름을 찾아서, 권력을 찾아서 헤매는 숨바꼭질이다. 인생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바뀌지 않는 술래다. 꼭꼭 숨어 있는 건강을 찾아서, 즐거움을 찾아서, 마음의 평온을 찾아 헤매는 술래다. 인생은 끊임없이 기회를 찾는 술래다. 분연히 일어날 때를 찾아서, 나아갈 길을 찾아서, 앉을 자리를 찾아서 그리고 누울 자리를 찾아서 헤매는 영원한 술래다.
사는 게 끝없는 숨바꼭질이다. 아무도 아닌 채로 태어났으니, 결국에는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손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니, 이제 손들고 찾아야 할 것이다. 나다운 나를. 아무도 아닌 원래의 나를. 원래의 내 안에 숨어있는 그 무엇을. 너무 깊이 너무 엉뚱하게 숨어 있어 결코 찾지 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찾아보자. 그 길이 비록 되돌아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이제 숨바꼭질 하던 아이들은 간 데 없어도, 나 홀로 숨바꼭질에 나선다. 살아온 그 길에 감쪽같이 숨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알다가도 모를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서, 어린 날의 술래 안에 숨어버린 나를 찾아서 나선다. 동네 이 모퉁이 저 모퉁이,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이제는 낼 수 없는 그 높은 음 자리표 웃음소리 들려온다. 들켜버린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직도 들려온다.
신창석 교수
국가민속문화재 제282호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