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문화는 송조(宋朝)에 이르러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 사대부는 자신의 원림(園林)을 배경으로 서(書), 금(琴), 기(棋), 차(茶), 단(丹), 경(經), 향(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적 발전을 꾀했고 이는 황가원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진한 시대에 유행하던 방대한 원림속의 일지삼산(一池三山)으로 대표되는 원림조영수법은 수당(隋唐)을 거치면서 물과 산의 결구를 기초로 한 건축물과 구성 요소의 유기적 관계로 양식화되기 시작했다. 송조 문화예술의 발전 속에 원림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집산(集散)을 통하여 변화하며 발전하는 유기체로 인식되었고 기존의 거대한 규모는 점차 소형화 되는 추세로 변화하게 된다.
송조에 이르러서는 우주와 시공 인식에 기초한 철학사상이 발달하여 기존 고대 원림의 조영 방식과 차별화된 양상을 띤다. 특히 당 중기부터 유행하였던 호중천지(壺中天地)의 원림 조영 방식은 송조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인공적으로 만들었으나 본디 자연인 듯 조성하는 방식으로 자연 그대로의 형식을 원내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북송의 수도인 개봉은 다양한 계층이 모여 살았으며 상가와 숙박시설 등이 즐비 하였고 황가원림과 사가원림 뿐 아니라 사찰, 찻집 및 주점 등에 원림이 조성되어 부속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북송 황가원림은 동경대내어원(東京大內園), 연복궁(延福宮), 간악원(艮嶽園)과 행궁의 어원인 동경사원(東京四園: 瓊林苑, 玉律園, 金明池, 宜春苑) 등이 존재하였고 ,그 중 간악원은 송조 휘종이 조영한 원림으로 북송을 대표하는 원림으로 꼽힌다.
<휘종자화상>
간악원의 조영자인 휘종(1082 ~1135)은 북송의 왕안석 변법을 실시한 신종의 11번째 아들로서 본래 정치에 뜻이 없었으나 형인 철종이 후사 없이 요절하여 결국 황위에 오르게 된다. 휘종(조길)은 중국 역사상 가장 학문적 예술적 기량이 뛰어난 황제로 평가되고 있으나 재위기간 동안 황실 물품국을 설치하는 등 사치와 향락에 심취하여 결국 북송을 국망으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수금체서법 (欲借風霜二詩帖)-조길>
휘종은 예술 즉 시사 회화 서법 등에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며 수금체서법(瘦金體書法)을 창시하였다. 공비화법(工筆劃法)이라 불리는 화법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궁정화원인 한림서화원을 건립하는 등 예술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황제이다. 또한 대규모의 황가원림을 조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예술적 기량이 뛰어난 그는 원림 조영에 있어서도 설계에 참여하는 등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였고 그 중 설계에 심혈을 기울인 최고의 작품이 바로 간악원이다. 1117년 경용문내 상청보록궁(上淸寶籙宮) 동편을 보수하고 흙을 쌓아 항주의 봉황산 형태의 주봉을 조영하여 ‘만세산(萬歲山)’이라 명명함을 시작으로 6년 동안 지당을 파고 누정대(樓亭臺)를 축조하고 기화이수를 조성하여 원림을 완성한 후 그 이름을 간악원(혹은 華陽宮)이라 부르게 된다.
<간악원>
간악원은 도교를 신봉하던 휘종에게 한 도인이 찾아와 도성 동북쪽이 열려있으므로 이를 비보(裨補)하기 위해 동북쪽에 구릉을 조성하여 황실의 안녕을 도모하라 하여 만들어졌다. 동북쪽에 만세산을 조영하고 팔괘에서 동북을 칭하는 간(艮)자와 원림의 주체를 이루는 산악을 빌어 ‘간악원’이라 이름 짓고 가산과 태호석을 이용하여 자연 산악을 원내 형상화 하였다. 이 원림은 산수화의 특색과 다양한 의경을 통하여 경점(景点)을 만들고 협로와 기화이석(奇花異石), 바람, 달 등 자연과 인공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이는 작은 요소들을 통해 크게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다. 또한 기암을 이용한 산수경관이 특징적이며 원내에는 다양하고 뛰어난 첩석(疊石) 기법이 사용되었다. 휘종의 기화이석에 대한 무한한 애착으로 인해 송조 각처의 기화이석이 수탈되어 수도인 개봉까지 배를 통해 운송되었으며 화석(花石)을 운송하는 배를 화석강(花石綱: 화석강의 강은 물자운반 조직 명칭)이라 부르며 관리하였다. 간악원 내 대부분의 기석(奇石)은 훗날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았고 금조(金朝)는 이를 수도인 연경으로 운송하여 사용하였으며 이후에는 현 북경에 위치한 북해공원 내 북해경화도 중수에까지 재사용 되었다. 이는 경도춘음(瓊島春陰)의 비(碑)에 새겨진 청조(淸朝) 건륭제(乾隆帝) 친필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 할수 있다(건륭제: 艮嶽移來石岌峨,千秋遺跡感懷多).
<상용석도-휘종>
간악원은 기존의 황가원림의 전형적 구성방식을 벗어난 원림으로도 유명하며, 이에 대한 내용은 휘종의 간악기(艮嶽記), 화양궁기(華陽宮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艮嶽記: …設洞庭湖口絲溪仇池之深淵與泗濱林慮靈璧芙蓉之諸山最瑰奇特異瑤琨之石即姑蘇武林明越之壤荊楚江湘南粵之野移枇杷橙柚橘柑榔栝荔枝之木、金峨玉羞虎耳鳳尾素馨渠那茉莉含笑之草不以土地之殊風氣之異悉生成長養於雕闌曲檻。而穿石出罅岡連阜屬東西相望前後相續左山而右水沿溪而傍隴連綿而彌滿吞山懷谷….). 간악원은 산수를 주제로 하여 좌측에 가산을 배치하고 우측에 물을 두었다. 감입곡류(嵌入曲流) 지형의 형태를 구현하기 위하여 가산의 동남북으로 인위적으로 물을 흘려 보내 물길을 형성하였고 이를 따라 연속된 산봉우리들을 형상화하여 험준한 산세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태호석을 쌓아 기이한 경관을 연출하였다. 경용강으로부터 흘러온 원내의 물줄기는 두 갈래를 이루어 동굴과 폭포 등으로 유입되고 다시 흘러나간다. 각종 지당과 호수, 계곡은 다양한 형태와 경관미를 자아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자연의 형태를 기본으로 설계되어, 완벽한 수(水)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외에 건조물들은 원내를 유상(遊賞)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도관(道觀), 사당, 민가, 주점의 형태 등 다양하게 조성되어 송조의 건축분야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수목은 남방으로부터 교목, 관목, 초본, 화훼 등 다양한 수종이 운송되어 왔으며 토질 기후와 온도의 차이로 인하여 생장이 불가능한 수종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송조의 원예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서학도-휘종>
간악원은 시화(詩畵)의 정취나 분위기를 원림이라는 공간에 완벽하게 구현해 낸 대표적 북송 황가원림이다, 또한 기존 황가 원림과는 차별화된 소규모의 공간에 치밀한 조성 기술이 조합된 원림이다. 이는 호중천지(壺中天地) 이념을 통하여 공간과 경물의 관계를 인식하고 조성의 깊이를 더하여 원림경관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휘종은 비록 황제로서 정치적 역량은 부족하였으나 그의 예술적 재능과 호기심은 다양한 분야에서 빛을 발하였고 그 유산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간악원의 수많은 기석(奇石)들은 오늘날에도 강남의 여러 명원에 흩어져 남아있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고대 중국문화는 송조(宋朝)에 이르러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 사대부는 자신의 원림(園林)을 배경으로 서(書), 금(琴), 기(棋), 차(茶), 단(丹), 경(經), 향(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적 발전을 꾀했고 이는 황가원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진한 시대에 유행하던 방대한 원림속의 일지삼산(一池三山)으로 대표되는 원림조영수법은 수당(隋唐)을 거치면서 물과 산의 결구를 기초로 한 건축물과 구성 요소의 유기적 관계로 양식화되기 시작했다. 송조 문화예술의 발전 속에 원림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집산(集散)을 통하여 변화하며 발전하는 유기체로 인식되었고 기존의 거대한 규모는 점차 소형화 되는 추세로 변화하게 된다.
송조에 이르러서는 우주와 시공 인식에 기초한 철학사상이 발달하여 기존 고대 원림의 조영 방식과 차별화된 양상을 띤다. 특히 당 중기부터 유행하였던 호중천지(壺中天地)의 원림 조영 방식은 송조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인공적으로 만들었으나 본디 자연인 듯 조성하는 방식으로 자연 그대로의 형식을 원내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북송의 수도인 개봉은 다양한 계층이 모여 살았으며 상가와 숙박시설 등이 즐비 하였고 황가원림과 사가원림 뿐 아니라 사찰, 찻집 및 주점 등에 원림이 조성되어 부속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북송 황가원림은 동경대내어원(東京大內園), 연복궁(延福宮), 간악원(艮嶽園)과 행궁의 어원인 동경사원(東京四園: 瓊林苑, 玉律園, 金明池, 宜春苑) 등이 존재하였고 ,그 중 간악원은 송조 휘종이 조영한 원림으로 북송을 대표하는 원림으로 꼽힌다.
<휘종자화상>
간악원의 조영자인 휘종(1082 ~1135)은 북송의 왕안석 변법을 실시한 신종의 11번째 아들로서 본래 정치에 뜻이 없었으나 형인 철종이 후사 없이 요절하여 결국 황위에 오르게 된다. 휘종(조길)은 중국 역사상 가장 학문적 예술적 기량이 뛰어난 황제로 평가되고 있으나 재위기간 동안 황실 물품국을 설치하는 등 사치와 향락에 심취하여 결국 북송을 국망으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수금체서법 (欲借風霜二詩帖)-조길>
휘종은 예술 즉 시사 회화 서법 등에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며 수금체서법(瘦金體書法)을 창시하였다. 공비화법(工筆劃法)이라 불리는 화법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궁정화원인 한림서화원을 건립하는 등 예술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황제이다. 또한 대규모의 황가원림을 조영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예술적 기량이 뛰어난 그는 원림 조영에 있어서도 설계에 참여하는 등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였고 그 중 설계에 심혈을 기울인 최고의 작품이 바로 간악원이다. 1117년 경용문내 상청보록궁(上淸寶籙宮) 동편을 보수하고 흙을 쌓아 항주의 봉황산 형태의 주봉을 조영하여 ‘만세산(萬歲山)’이라 명명함을 시작으로 6년 동안 지당을 파고 누정대(樓亭臺)를 축조하고 기화이수를 조성하여 원림을 완성한 후 그 이름을 간악원(혹은 華陽宮)이라 부르게 된다.
<간악원>
간악원은 도교를 신봉하던 휘종에게 한 도인이 찾아와 도성 동북쪽이 열려있으므로 이를 비보(裨補)하기 위해 동북쪽에 구릉을 조성하여 황실의 안녕을 도모하라 하여 만들어졌다. 동북쪽에 만세산을 조영하고 팔괘에서 동북을 칭하는 간(艮)자와 원림의 주체를 이루는 산악을 빌어 ‘간악원’이라 이름 짓고 가산과 태호석을 이용하여 자연 산악을 원내 형상화 하였다. 이 원림은 산수화의 특색과 다양한 의경을 통하여 경점(景点)을 만들고 협로와 기화이석(奇花異石), 바람, 달 등 자연과 인공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이는 작은 요소들을 통해 크게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다. 또한 기암을 이용한 산수경관이 특징적이며 원내에는 다양하고 뛰어난 첩석(疊石) 기법이 사용되었다. 휘종의 기화이석에 대한 무한한 애착으로 인해 송조 각처의 기화이석이 수탈되어 수도인 개봉까지 배를 통해 운송되었으며 화석(花石)을 운송하는 배를 화석강(花石綱: 화석강의 강은 물자운반 조직 명칭)이라 부르며 관리하였다. 간악원 내 대부분의 기석(奇石)은 훗날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았고 금조(金朝)는 이를 수도인 연경으로 운송하여 사용하였으며 이후에는 현 북경에 위치한 북해공원 내 북해경화도 중수에까지 재사용 되었다. 이는 경도춘음(瓊島春陰)의 비(碑)에 새겨진 청조(淸朝) 건륭제(乾隆帝) 친필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 할수 있다(건륭제: 艮嶽移來石岌峨,千秋遺跡感懷多).
<상용석도-휘종>
간악원은 기존의 황가원림의 전형적 구성방식을 벗어난 원림으로도 유명하며, 이에 대한 내용은 휘종의 간악기(艮嶽記), 화양궁기(華陽宮記)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艮嶽記: …設洞庭湖口絲溪仇池之深淵與泗濱林慮靈璧芙蓉之諸山最瑰奇特異瑤琨之石即姑蘇武林明越之壤荊楚江湘南粵之野移枇杷橙柚橘柑榔栝荔枝之木、金峨玉羞虎耳鳳尾素馨渠那茉莉含笑之草不以土地之殊風氣之異悉生成長養於雕闌曲檻。而穿石出罅岡連阜屬東西相望前後相續左山而右水沿溪而傍隴連綿而彌滿吞山懷谷….). 간악원은 산수를 주제로 하여 좌측에 가산을 배치하고 우측에 물을 두었다. 감입곡류(嵌入曲流) 지형의 형태를 구현하기 위하여 가산의 동남북으로 인위적으로 물을 흘려 보내 물길을 형성하였고 이를 따라 연속된 산봉우리들을 형상화하여 험준한 산세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태호석을 쌓아 기이한 경관을 연출하였다. 경용강으로부터 흘러온 원내의 물줄기는 두 갈래를 이루어 동굴과 폭포 등으로 유입되고 다시 흘러나간다. 각종 지당과 호수, 계곡은 다양한 형태와 경관미를 자아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자연의 형태를 기본으로 설계되어, 완벽한 수(水)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외에 건조물들은 원내를 유상(遊賞)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도관(道觀), 사당, 민가, 주점의 형태 등 다양하게 조성되어 송조의 건축분야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수목은 남방으로부터 교목, 관목, 초본, 화훼 등 다양한 수종이 운송되어 왔으며 토질 기후와 온도의 차이로 인하여 생장이 불가능한 수종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송조의 원예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서학도-휘종>
간악원은 시화(詩畵)의 정취나 분위기를 원림이라는 공간에 완벽하게 구현해 낸 대표적 북송 황가원림이다, 또한 기존 황가 원림과는 차별화된 소규모의 공간에 치밀한 조성 기술이 조합된 원림이다. 이는 호중천지(壺中天地) 이념을 통하여 공간과 경물의 관계를 인식하고 조성의 깊이를 더하여 원림경관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휘종은 비록 황제로서 정치적 역량은 부족하였으나 그의 예술적 재능과 호기심은 다양한 분야에서 빛을 발하였고 그 유산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간악원의 수많은 기석(奇石)들은 오늘날에도 강남의 여러 명원에 흩어져 남아있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