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나이에 심장 수술을 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심장의 박동에 탈이 났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수술이 성공했다고 해서 온전한 것은 아니리라. 그래선지 멀리 있던 동생이 산양의 뿔을 하나 가지고 왔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갈아 마시면 좋다고 한다. 동생이 유명한 한의사이고, 뼈의 성분은 주로 칼슘이니 먹어도 될 것이다. 얼마 동안 그야말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도, 이 뼈로 된 뿔이 근육으로 된 심장에 어떤 도움이 될까? 그냥 심심할 때는 올록볼록한 산양 뼈를 쓰다듬기만 하면서 생각해봤다. 마음에 뿔이 나면 적어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지 않는가.
짐승에는 뿔이 있는 짐승과 뿔이 없는 짐승이 있다. 뿔은 위협 앞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자존심의 발로이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뿔이 없지만, 가끔 뿔이 나기도 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때때로 뿔이 났다고 말하지 않는가. 뿔난 사람들은 비슷한 증상을 나타낸다. 그야말로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러면 피가 거꾸로 솟구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울긋불긋한 얼굴 가운데 눈동자가 흔들리고 이글거린다. 뿔이 솟아오를 머리에는 먼저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근육이 당겨져 얼굴이 부풀어 오르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대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위협적으로 내뱉는다. 결국 마구 손뼉을 두드리며 발을 쿵쾅 구른다. 이렇게 분노는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분노는 바이러스 없는 열병이기에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앓게 되면 한 민족이나 나라를 폐사시킬 수도 있는 대란이나 같다.
2016년, 영리하다는 원숭이의 해가 저물어갈 즈음에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뿔나는 일이 터졌다. 저마다 뿔난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주말마다 모여들고 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갑론을박하고 있다. 왜 뿔이 났는가? 괜스레 뿔났는가? 뿔내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누가 뿔나게 교사했는가? 뿔난 원인을 밝혀야 한다. 이거다 저거다. 누가 또는 무엇이 그 많은 뿔들을 모이게 했는가? 누가 뿔난 사람들을 몰고 있는가? 이 수많은 뿔을 어디로 들이대야 하는가? 그러니 뿔난 곳에는 어김없이 뿔을 몰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제 뿔이 난 대중들이니, 잘 몰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착각하는, 아직 뿔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분노는 감정이나 격정의 일종이다. 분노는 인간의 격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격정이다. 분노는 특이하게도 상쇄시킬 수 있는 대립되는 격정이 없기 때문에 더 더욱 위협적이다.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인간의 다섯 가지 종류의 격정에 대해 말한다.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두려움, 희망과 실망, 기쁨과 슬픔은 서로 대립하기에 서로 상쇄될 수 있다. 즉 미움은 사랑으로, 두려움은 그리움으로, 실망은 희망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치유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의 대립하는 격정이 없는 분노는 어떤 감정인가?
로마시대의 악명 높은 독재자 네로(Nero) 황제의 폭정 때문에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일찍이 분노를 이렇게 분석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분노는 서로의 파괴를 위해 태어난다. 인간은 화합을 원하지만, 분노는 분리를 원한다...” 세네카는 분노에 대해 말하던 말미에 이렇게 권고한다. “분노가 당신을 버리기 전에 당신이 먼저 분노를 버려라... 분노하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그는 물론 인생이 짧은 것은 낭비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분노를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이 공공의 분노라면, 우리는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가?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던 간에, 분노 그 자체는 결국 분열과 파괴를 낳기 쉽다. 분노의 대열 다음에는 분열의 대열이 따르기 쉽다. 이 분노의 대열을 누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의술은 정치와 비슷하다. 병든 인간을 개별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면, 국민을 공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정치가의 제일 의무이다. 정치는 앓는 국민을 치료하는 일이요, 정치가는 공공의 분노를 치료해야 하는 자이다. 세네카 역시 정치행위를 의사의 치료행위로 본다. 정치가란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치유하라는 명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치료법이 신체적 질환에 따라 다르듯이, 정치가의 치료법도 정치적 질병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환자는 약간의 절제를 통하여, 어느 환자는 일정 기간 타지에 머물게 함으로써, 어느 환자는 고통을 통해서, 또 다른 환자는 박탈을 통해 가난을 안겨줌으로써, 그리고 어느 환자는 검으로써 치유할 것이다.” 나아가 정치가는 분노하지 말고 절도 있게 법의 집행을 명해야 한다고 세네카는 덧붙인다.
나의 심장 박동을 치료하라고, 동생이 가져왔던 뿔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뿔을 그냥 갈아 먹으라고 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뿔이 나면 심장이 빨라지고, 심장이 빨라지면 인생을 낭비할 테니까.
뿔난 국민이라고 해서 몰이꾼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리 저리 분열로 이끄는 몰이꾼은 더 더욱 기대하지 않는다. 분노로 보내는 시간은 낭비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 낭비는 경제적 낭비요, 문화적 낭비이며, 무엇보다 자존감의 낭비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이상 낭비시키지 않는 말, 그 말이 참말일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버텨온 고귀하고 안타까운 우리네 인생을 더 이상 광장이나 재판소로 내몰지 않고, 공공의 분노를 제대로 알아보는 자! 그대가 진정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자일 것이다. 공공의 분노를 어떻게든 몰아보려 하는 자 말고, 공공의 분노를 치료하려는 자! 그대가 진정한 정치가일 것이다.

신창석 교수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청운동 성천댁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한창 나이에 심장 수술을 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심장의 박동에 탈이 났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수술이 성공했다고 해서 온전한 것은 아니리라. 그래선지 멀리 있던 동생이 산양의 뿔을 하나 가지고 왔다.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갈아 마시면 좋다고 한다. 동생이 유명한 한의사이고, 뼈의 성분은 주로 칼슘이니 먹어도 될 것이다. 얼마 동안 그야말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갈아 마시면서도, 이 뼈로 된 뿔이 근육으로 된 심장에 어떤 도움이 될까? 그냥 심심할 때는 올록볼록한 산양 뼈를 쓰다듬기만 하면서 생각해봤다. 마음에 뿔이 나면 적어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지 않는가.
짐승에는 뿔이 있는 짐승과 뿔이 없는 짐승이 있다. 뿔은 위협 앞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자존심의 발로이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뿔이 없지만, 가끔 뿔이 나기도 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때때로 뿔이 났다고 말하지 않는가. 뿔난 사람들은 비슷한 증상을 나타낸다. 그야말로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러면 피가 거꾸로 솟구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울긋불긋한 얼굴 가운데 눈동자가 흔들리고 이글거린다. 뿔이 솟아오를 머리에는 먼저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근육이 당겨져 얼굴이 부풀어 오르면 일그러지기 마련이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대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위협적으로 내뱉는다. 결국 마구 손뼉을 두드리며 발을 쿵쾅 구른다. 이렇게 분노는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분노는 바이러스 없는 열병이기에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앓게 되면 한 민족이나 나라를 폐사시킬 수도 있는 대란이나 같다.
2016년, 영리하다는 원숭이의 해가 저물어갈 즈음에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뿔나는 일이 터졌다. 저마다 뿔난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주말마다 모여들고 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갑론을박하고 있다. 왜 뿔이 났는가? 괜스레 뿔났는가? 뿔내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누가 뿔나게 교사했는가? 뿔난 원인을 밝혀야 한다. 이거다 저거다. 누가 또는 무엇이 그 많은 뿔들을 모이게 했는가? 누가 뿔난 사람들을 몰고 있는가? 이 수많은 뿔을 어디로 들이대야 하는가? 그러니 뿔난 곳에는 어김없이 뿔을 몰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제 뿔이 난 대중들이니, 잘 몰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착각하는, 아직 뿔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분노는 감정이나 격정의 일종이다. 분노는 인간의 격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격정이다. 분노는 특이하게도 상쇄시킬 수 있는 대립되는 격정이 없기 때문에 더 더욱 위협적이다.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인간의 다섯 가지 종류의 격정에 대해 말한다. 사랑과 미움, 그리움과 두려움, 희망과 실망, 기쁨과 슬픔은 서로 대립하기에 서로 상쇄될 수 있다. 즉 미움은 사랑으로, 두려움은 그리움으로, 실망은 희망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치유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의 대립하는 격정이 없는 분노는 어떤 감정인가?
로마시대의 악명 높은 독재자 네로(Nero) 황제의 폭정 때문에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일찍이 분노를 이렇게 분석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분노는 서로의 파괴를 위해 태어난다. 인간은 화합을 원하지만, 분노는 분리를 원한다...” 세네카는 분노에 대해 말하던 말미에 이렇게 권고한다. “분노가 당신을 버리기 전에 당신이 먼저 분노를 버려라... 분노하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그는 물론 인생이 짧은 것은 낭비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분노를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이 공공의 분노라면, 우리는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가?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던 간에, 분노 그 자체는 결국 분열과 파괴를 낳기 쉽다. 분노의 대열 다음에는 분열의 대열이 따르기 쉽다. 이 분노의 대열을 누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의술은 정치와 비슷하다. 병든 인간을 개별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면, 국민을 공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정치가의 제일 의무이다. 정치는 앓는 국민을 치료하는 일이요, 정치가는 공공의 분노를 치료해야 하는 자이다. 세네카 역시 정치행위를 의사의 치료행위로 본다. 정치가란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치유하라는 명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치료법이 신체적 질환에 따라 다르듯이, 정치가의 치료법도 정치적 질병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환자는 약간의 절제를 통하여, 어느 환자는 일정 기간 타지에 머물게 함으로써, 어느 환자는 고통을 통해서, 또 다른 환자는 박탈을 통해 가난을 안겨줌으로써, 그리고 어느 환자는 검으로써 치유할 것이다.” 나아가 정치가는 분노하지 말고 절도 있게 법의 집행을 명해야 한다고 세네카는 덧붙인다.
나의 심장 박동을 치료하라고, 동생이 가져왔던 뿔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뿔을 그냥 갈아 먹으라고 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뿔이 나면 심장이 빨라지고, 심장이 빨라지면 인생을 낭비할 테니까.
뿔난 국민이라고 해서 몰이꾼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리 저리 분열로 이끄는 몰이꾼은 더 더욱 기대하지 않는다. 분노로 보내는 시간은 낭비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 낭비는 경제적 낭비요, 문화적 낭비이며, 무엇보다 자존감의 낭비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이상 낭비시키지 않는 말, 그 말이 참말일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버텨온 고귀하고 안타까운 우리네 인생을 더 이상 광장이나 재판소로 내몰지 않고, 공공의 분노를 제대로 알아보는 자! 그대가 진정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자일 것이다. 공공의 분노를 어떻게든 몰아보려 하는 자 말고, 공공의 분노를 치료하려는 자! 그대가 진정한 정치가일 것이다.
신창석 교수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청운동 성천댁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