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영관 칼럼] 궁정동 칠궁(七宮) 근처 ‘통의동마을마당’의 존폐 위기



한양도성 사대문과 사소문 중의 하나인 숙청문(彰義門)과 창의문(彰義門) 아래 마을 궁정동 1번지에는 조선대한제국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 즉 추존왕의 친모 세분과 즉위한 왕의 친모 네 분의 신위(神位)를 모신 칠궁(七宮)이 자리 잡고 있다. 

 

 영조대왕께서 자신의 모친인 숙빈 최씨가 정비가 아니라는 이유로 종묘에 그 신주(神主)를 모실 수 없게 되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머니를 향한 효심을 기리기 위해 1724년 서울 육상궁(서울 毓祥宮, 사적 제149호)을 건립한 이후 1908년(순종융희황제2년)에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 연호궁(延祜宮)과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 저경궁(儲慶宮),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 대빈궁(大嬪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 선희궁(宣禧宮), 그리고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 경우궁(景祐宮)이 이곳으로 옮겨왔고, 왜정 기인 1929년 대한제국 고종광무태황제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신궁인 덕안궁(德安宮)이 들어서면서 칠궁이 됐다. 


<칠궁 안 재실과 외삼문, 사진출처 대한황실문화원 이홍배 종친위원장 소장자료 제공>


<칠궁 내 삼락당>


 칠궁의 조성과정과 합사(合祀)는 종묘에 봉사된 법모와 더불어 사친(私親), 즉 생모에 대한 역대 왕들의 애틋한 효심을 반영하는 동시에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근본도리인 효 실천을 권면하면서 그 본질사상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살아있는 효 교육 현장이었다. 동시에 종묘와 더불어 조선대한제국기 묘궁묘사제도(廟宮廟祠制度) 연구에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간악하고 무자비한 왜구역적매국노들이 판을 치던 왜정 기에도 건실했던 칠궁은 그러나 해방이후 왜구들도 아닌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에 의해 궁의 위치와 원형이 크게 훼손되고 변형되면서 수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이승만 정권 때는 총독부 관저로 사용됐던 칠궁 내 주변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경복궁의 ‘경’자와 신무문의 ‘무’자를 따와 경무대를 설치해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다. 더구나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연속에 걸림돌이 되는 조선왕조와 대한황실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황실재산관리법’을 만들어 국유화라는 명분하에 황실재산들을 강압적으로 모두 몰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63년 박정희 정권 때는 ‘효자동-세검동 간 도로확장계획’으로 칠궁의 부분적인 철거가 추진되다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주요 요직에 있었던 황족들의 반대로 5년여 동안의 시비를 거듭했다. 5년여 동안의 시비는 도로설치라는 명분하에 황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칠궁의 일부분이 헐리거나 훼손되면 그나마 유지되던 황실의 존재이유가치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황족들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절대 절명의 항거였다. 

 

 이런 항거노력에도 불구하고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124부대) 31명의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위해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청와대와 서울시는 1968년 2월 14일 국가보안 확보라는 빌미로 칠궁의 관리와 경비권을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강제로 넘겨받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15일 궁에 거주하던 황족들에게 사전 통보도 없이 칠궁의 정문 옆 15m폭에서 뒷담까지 1백40m을 무자비하게 꿰뚫어 원형의 많은 부분들을 훼손하고 결국 흉물스런 2차선 아스발트도로를 설치하고야 말았다.   

 

 1968년 2월 16일 조선일보 기사 <칠궁을 헌다>를 보면 근대화(近代化)에 밀리는 5백년 조선왕조사직(社稷) 잔영(殘影)공간의 파괴가 얼마나 서글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칠궁철거 조선일보기사>


 칠궁은 15일 오후 3시 노란철모를 쓴 인부들의 톱질에 아름드리 잣나무가 한 그루씩 스러지면서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됐다.

 겨울철이라 옮겨 심을 수조차 없는 가운데 작업은 이날 밤 10시까지 강행됐으며 80여 그루가 베어져나갔다.

이날 아침에야 [김]수길(金壽吉)씨 등 안에 살고 있는 10여 가구에 철거작업을 통고해 사람들은 황망히 관계당국에 알아보러 나가고, 텅 빈 궁 안에서 시청으로부터 나온 20여 인부들은 오후 2시부터 작업을 시작, 정문 왼편 행랑채의 담벽을 헐어내고 그 안에 빽빽이 들어찬 잣나무를 톱질하고 있었고, 2, 3명의 측량사들이 줄자를 들이대고 측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 정권이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칠궁의 관리권과 경비권을 빼앗은 주된 이유는 간첩침투로 인한 국가안보의 확보라기보다는 칠궁에 모여 살던 의친왕계 황족들을 출궁 조치하여 청와대로부터 멀리 쫓아내 서울도성 안 황실의 재산권과 궁궐 거주권 그리고 관리권을 완전히 박탈하지 않으면 장기적이며 영구적인 군사독재정권 유지에 껄끄러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반증하듯 1968년 2월 15일자 한국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은 14일 청와대측의 요청에 따라 칠궁(七宮, 사적 149호)의 관리와 경비권을 청와대에 넘기기로 했다.

 이러한 조치는 지난달 21일의 북괴무장공비침입사건 이후 청와대 주변에 있는 공공기관의 경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 취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결정에 따라 칠궁 안에 있는 의친왕(義親王)의 아들 이수길(李壽吉)씨를 비롯한 10여 세대가 모두 이사하게 된다.

 

 강압적으로 황족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쫓아내는 자신들의 무자비한 만행의 그 부끄러운 민낯을 은닉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황실핍박으로 인한 국민들로부터의 지탄을 회피하기 위해 1968년 2월 15일자 한국일보에 보도 된 의친왕의 다섯째 왕자 이수길(황실명 이주[李鑄], 1917~1982) 황손의 성을 다음날 16일자 조선일보에서는 [김]씨로 바꾸어 보도케 했다는 점이다.

 

 다행히 황족들은 궁에서 쫓겨나지 않았지만 심신에 큰 상처를 받았고 도로설치 후 새로 쌓은 궁 담의 높이와 위치가 칠궁 서쪽 끝자락 저경궁 지붕 끝 처마와 부딪힐 것처럼 걸쳐 보이게 설치되어 칠궁 안의 저경궁과 대빈궁 그리고 경우궁과 덕안궁의 전체적인 배치구조가 뒤틀리고 불균형적인 형태로 변형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사당 안에 모셔진 황실영령들의 위엄과 고결함 역시 저절로 격하되게 보이는 결과를 낳게 됐고 칠궁 안 황실영령들은 1년 내내 궁 담 옆 서쪽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의 매연과 소음에 노출되어 고통 받게 됐다. 지금도 이곳을 지나는 운전자들에게 궁의 원형복원을 애타게 호소하며 피맺힌 절규를 보내는 것 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1968년 서쪽 궁 담 철거로 저경궁 지봉 처마 끝 아래에 새로 설치된 궁 담과 2차선 도로와 보도로 비대칭적이며 불균형적인 형태로 훼손 된 칠궁의 현재모습>

 한번이라도 칠궁주변을 방문했거나 신설된 궁 담 옆 도로 위를 운전했다면 칠궁의 위치가 국가안보에 위협적이거나 위해(危害)될 만한 배치구조가 아님을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처참하게 잘려나간 궁 담의 비대칭적인 부조화는 주변의 지리적인 환경과 미학적인 개념이 전혀 고려되거나 적용되지 않은 채 날림방식으로 억지로 건축된 것 같은 기형적인 궁의 모습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기형적인 형태로 변형된 칠궁의 배치도>


 도로개설 후 박정희 정권은 칠궁 옆 마당에 2층 양옥모양의 관립(官立)요정 안가를 설치하여 역대 왕들이 효심을 배양했던 신성한 궁 주변의 역사적 가치의 존립이유에 천박하고도 무지 목매한 모욕을 가했다. 일반 평민양반들 조차도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근처에서는 큰소리를 내거나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사당을 향해 큰절을 올려 예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역사전통문화유적의 가치보존과 그에 내재된 효의 교훈들을 앞장서서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할 국가 지도자가 요정을 만들어 밤낮으로 음주가무에 빠져 엽색(獵色)행각을 벌인 일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시해사건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독재정권은 청와대 경호를 위한 명분으로 칠궁의 한 귀퉁이에 모여 살던 의친왕 계열 30여명의 황족들에 대한 퇴거조치와 함께 궁 밖으로 모두 쫓아내고 말았다. 희빈 장씨 사당인 대빈궁(현 청와대영빈관)에 기거했던 의친왕 다섯째 왕자 이수길(이주) 황손은 억울함에 충격으로 화병을 얻어 3년 뒤인 1982년에 피를 토하고 처참하게 사망했다. 


의친왕의 자녀들, 상단좌측부터 5남 이수길 황손, 장녀 이해완 옹주, 4남 이창길 황손, 3남 이홍길 황손, 하단좌측부터 6남 이명길 황손, 차녀 이해원 옹주, 사진출처 이해원 옹주 소장자료


 칠궁에서 쫓겨난 의친왕 여섯째 왕자 이명길(황실명 이곤[李錕], 1919~1984) 황손은 청량2동 205번지 홍릉재실(현재 영휘원)에서 기거하다 문화재청에 의해 퇴거된 뒤 1984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나머지 황족들은 도미(渡美)해 숨어 살거나 몇몇은 종로의 노숙자나 청계천 걸인 어묵장수 또는 여관청소부로 전락되어 비참하고도 납득 될 수 없는 삶을 살게 됐다. 



<상단좌측부터 4녀 이해숙 옹주, 차녀 이해원 옹주, 3녀 이길연 옹주, 4남 이창길 황손 부인, 차남 이우 공 부인 박찬주 여사, 3남 이홍길 황손 부인, 장녀 이해완 옹주, 5녀 이해경 옹주, 박찬주 여사 여동생, 하단 좌측부터 5남 이수길 황손, 8남 이경길 황손, 차녀 이해원옹주 부군, 3녀 이길연 옹주 부군, 4남 이창길 황손, 차남 이우공, 3남 이홍길 황손, 장녀 이해완 옹주 부군, 박찬주 여사 2째동생, 6남 이명길 황손, 박찬주 여사 셋째동생, 출처 이해원 옹주 소장자료, 촬영장소 인사동 사동궁>

 이렇게 칠궁은 민주공화정으로 바뀐 근현대기까지 대한제국의 황족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고, 조선대한황실의 뿌리 깊은 역사적인 명맥의 한축을 끝까지 이어주고 지켜주려 노력했던 고뇌와 연민의 공간이었다.

 

 역사문화공간학적으로 소중한 공간인  칠궁은 2016년 12월 또 다시 위기를 맞게 됐다. 청와대가 특별경호지역민가를 사려고 칠궁 근처의 ‘통의동마을마당’을 민간인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이 마을마당 매입자는 공원을 없애고 상가를 신축하여 카페와 갤러리를 설치하여 임대수익도 노려 보려한다는 것이다. 

 

 ‘통의동마을마당’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바로 건너편 칠궁의 길목에 위치해 있고 영조대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 잠저(潛邸)였던 창의궁지에 인접한 곳이다. 70~80년대 대통령 안전가옥이 있던 곳이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이 취임 후 ‘독재군사정부가 사용했던 불필요한 시설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취지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1996년 공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마을마당 주변 주민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운동도하고 담배도 피고 음료 캔도 사서 따 먹고 수다도 떨었던 동네사랑방 같은 쉼터가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됐다며 종로구와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했고 청와대에 항의하고 있는 중이다(2016년 12월 14일 동아일보 기사 “경호건물 사려고, 20년된 서촌 마을공원 팔아버린 청와대” 참조).


<자료제공=동아일보>


 분명한 사실은 이 동네 사람 대부분이 마을쉼터가 없어지기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20여년 된 마을쉼터의 소멸로 인한 부수적인 여파로 유형역사문화학적으로 더 소중한 칠궁의 존치가 가까운 미래에 불가하게 되고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게 된다는 잠재성에 대해 고민하거나 염려하지도 않았고 이와 관련된 단 한 줄의 기사도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가 최고의 권력기관인 청와대가 통의동 작은 동네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칠궁 근처 마을쉼터를 임의로 매각하여 그곳에 임대수익을 노린 국적불명의 기괴하고 못생긴 비현실적인 철근콘크리트유리 빌딩이 들어서게 된다면 이전 정권보다도 더 무지 목매할 뿐만 아니라 전통역사문화보존의지가 전무할 수도 있을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면 주변의 현대식 빌딩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더구나 대통령경호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면 문화재청 소유의 칠궁 터를 강제로 청와대에 귀속시켜 민간인이나 재벌기업에 매각하게 되면 그나마 남아 있는 칠궁의 아름다운 모습이 영원히 멸실될 수도 있게 되는 최악의 불길한 예감과 절망적인 시나리오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는 작금의 현실 자체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따라서 129평 규모의 마을쉼터마당이 비록 작은 면적의 공원이지만 칠궁과의 역사문화공간학적인 상관성과 함께 반듯이 존치(存置)되어져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통의동마을마당’ 주변 땅 대부분이 청와대의 소유 및 관리 하에 있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아무리 역사문화공간학적으로 소중한 곳이라도 안보확보라는 이유로 언제든지 이곳의 토지들을 민간에 매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국적으로 청와대 바로 옆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칠궁도 언젠가 민간에 매각되고 철거되어 완전히 멸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난  2011년 1월 이명박 정권은 ‘통의동마을마당’을 없애 경비대원이 머물 건물과 버스 주차장을 지으려다 주민들의 반대로 이 계획이 무산되자 2월 11일 안가를 짓기 위해 삼청동 소재 홍석현의 땅 468평과 ‘통의동마을마당’ 바로 옆 창의궁 터인 통의동 35-32번지 186평을 맞교환한 일이 있었다. 

 

 이 지역이 신축건물의 지하층 공사가 불허된 곳이라서 서울문화유산연구원에서 8월22일~12월15일 75일 동안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창의궁의 담장 기단과 온돌,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수라간)’에서 각종 백자와 도기들이 출토됐었다. 이 일로 10~12월 세 차례 문화재위원회 전문가 검토회의가 열렸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지하공사가 허가됐고 맞교환된 창의궁 터에는 600년 한양도성역사의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하 3층이 딸린 괴기하고 흉물스런 철근콘크리트유리빌딩이 들어서게 되어 창의궁터는 결국 영원히 멸실되고 말았다(2012년 5월 7일 한겨레신문기사 “청와대가 홍석현에 넘긴 ‘궁궐터’ 파보니,” 2012년 5월 4일 시사저널 “대통령 당선인 ‘안가’ 만드는 청와대” 참고).


<창의궁터 발굴작업 과정에서 확인된 창의궁 관련 다수의 유적들 사진제공=한겨레신문>


 악랄했던 왜정시대에서 조차도 철거되지 않고 존치됐던 칠궁이외의 크고 작은 궁들(경덕궁/계동궁/계운궁/누동궁/덕흥궁/도정궁/사동궁/순화궁/안동별궁/어의궁/인경궁/자수궁/전계궁/죽도궁/창의궁/풍경궁/함흥본궁/흥선궁)이 근대화로 인한 무분별한 도시개발과 국가안보라는 이런 저런 이유들로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파괴되거나 멸실됐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멸실됐거나 철거된 궁들의 재건과 복원은 그 위에 무차별적으로 건축된 괴상하고 못생긴 철근콘크리트빌딩들이 수명을 다해 철거될 때 거국적인 애국심과 역사전통문화보존의식사명이 투철한 후손들에 의해 실행되어져야 할 미래적인 과업으로 남게 됐다. 

 

 혼돈스런 역사의 질곡 속에서 친일역적매국노들과 군부독재정권들의 강압적이며 무자비한 ‘철거협박’ 계략(計略)으로 칠궁에서 쫓겨난 대한황실구성원들은 대동단결하여 그 원래의 소유관리거주권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에 침묵하는 것은 저절로 국가사회의 악에 가담케 되는 것이며 종국적으로 국가사회의 악이 양산케 되는 것을 방조하는 무책임한 행위로 과부와 고아들 같이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고통과 억울함에 침묵하는 마는 소극적이며 이기적인 삶의 태도가 되기 때문이다”(Cf. Immanuel Kant,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실천이성비판], 1788).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정부는 과거 정권들의 비도덕적인 강탈범죄행위들을 인정하고 황실에게 속해 있었던 그 원래의 소유관리거주권들을 대한황실구성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반환해주어야 한다. 이는 추악하고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왜구역적매국노들의 묵은 잔재들을 청산하는 과정들 중의 하나가 되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정신근간 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역사관을 올바르고 온전하게 재확립할 수 있게 되는 계기와 근거가 구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정직과 법치의 교육적인 모범들을 제시하여 줄 수 있게 되는 선한 일도 되기 때문이다. 

 

 반환된 소유권과 함께 원소유주인 대한황실은 칠궁의 원형복원보존노력과 함께 칠궁에 내재되고 함축되어 있는 효행의 역사문화학적인 의미와 가치를 연구하고 발굴하여 그 안에서 체계화된 콘텐츠들을 미래후손들을 위한 효행교육매뉴얼로 개발하고 이를 효 교육을 위한 교재들로 실용화하여 칠궁이 단순한 관광지로서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충효 교육체험공간으로 재생 될 수 있도록 정진(精進)해야 한다.
 

칠궁제는 2005년 10월 세째주 월요일에 원형복원되어 청와대와의 협의로 매년 제향되고 있다, 사진출처 대한황실문화원 이홍배 종친위원장 개인소장자료


대한황실 5대 수장 이원 황사손(의친왕의 아홉번째 왕자 이갑 황손의 장자). 현재 종묘대제, 사직대제 등에서 초헌관으로 봉무하고 있다.,사진출처 위키백과

 이로써 배신과 불신이 팽배하고 패륜의 한계가 그 도를 넘어선 작금의 대한민국사회공동체가 황실의 세계 중심적인 효행교육실천 모범 확립과 그 위엄에 따른 국민들 상호간의 존경과 신망의 감응(感應)으로 사회 안정과 더불어 과거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메카(Mecca)명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김영관 (PhD., McGill)

사단법인 한국효문화원 원장, 

대한황실문화원 문화재환수위 연구위원/

해외왕실교류위 수석위원,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방문연구 교수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종교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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