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문인들이 원림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규보를 먼저 조명한 바 있다. 동시대를 주유했던 문인 중에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려 의종에서 고종 때를 살다간 이인로(李仁老, 1152∼1220)다. 그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원(慶源),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항간에 쌍명재(雙明齋)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여부가 명확하지 않다는 설도 있다.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이다. 저술로는 《은대집 銀臺集》, 《쌍명재집 雙明齋集》, 《파한집 破閑集》 등이 알려져 있으나 현재, 그의 아들 세황이 엮은 《파한집》만이 남아있으며, 이규보의 《동문선》과 최자의 《보한집》에 120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파한집 자료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인로는 문벌귀족의 자제였지만 부모를 일찍 여의고 명종의 숙부인 화엄승통 요일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이 때문에 한때 승려의 신분이기도 했다. 유년기 때 유교 전적류와 제자백가 등을 두루 공부할 수 있었고 일찍이 시에 재능을 보였으며 교양과 전문성을 지닌 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인로는 이규보와 함께 최충헌의 집에 여러 차례 초대되어 시를 지으면서 명성을 더하게 된다.
당시 최충헌은 그의 집권기 동안 예술을 후원하고 문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1205년(희종 1년)에 정자를 짓고 유학자들을 불러 작시 경연을 열게 된다. 당시 이인로를 중심으로 한 죽림고회 집단은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나 최충헌이 여는 문학행사에는 적극 참여하였고 최충헌은 세력을 가리지 않고 이인로와 같은 뛰어난 문인들의 후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인로의 조력자로서 최충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파한집 본문 자료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인로는 유가와 도가, 불교에 이르기까지 도통했는데 이러한 성향은 작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전유재(2013)는 이인로의 문학에 나타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인로의 작품은 유가의 영향으로 인간중심에서 자연을, 도가의 영향탓으로 자연중심에서 인간해석으로 발전하여 심리와 사물을 서로 융합시켜 물아일체의 상태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연사물의 속성을 닮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인로가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경향은 중국 진나라시대 죽림칠현을 본딴 죽림고회의 활동으로 주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신이 집권하여 문신들이 정계에서 소외되자 산야로 들어가 시와 술로써 불우한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한 죽림고회는 이인로를 위시하여 임춘, 오세재이다. 이인로는 중국 시인 백낙천(白樂天)의 4우(四友)를 모방해 미수사우(眉叟四友)를 맺었는데 임춘을 시우(詩友), 조통을 산림우(山林友), 이담지를 주우(酒友), 그리고 승려인 종령(宗聆)을 공문우(空門友)라 칭했다. 그의 영향력은 단순히 개인 간의 친목 도모를 넘어서 뜻이 맞는 문인들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여 집단적 형태로 교유하였고 이는 죽림고회 뿐 아니라 친인척, 승려, 용두회(龍頭會), 최당 형제가 주축이 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 등에도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이인로가 주축이 된 죽림고회의 활동은 후에 산천에 은거하면서 지내는 은거문화의 전형이 된다.
그가 가진 재주에 걸맞는 처우를 받지 못한 점이 《고려사》에 보면 이인로의 성격에 대해 비판하는 글로 여실히 나타난다. 사람의 성격이 좁고 참을성이 없어서 당시의 집권자들에게 거슬려 크게 쓰이지 못했다 적고 있다. 그가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무인집권시대 수난을 겪으면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의 처지를 떠나 자연으로 귀거래하는 모습은 그의 시에 상징적 표현으로 감추어져 있다.
당시 이규보와 이인로를 중심으로 한 한시산문의 신경향을 보면 경치를 표현하는 데 마치 그림을 그리듯 실감나게 묘사하고 이 경치에 자신의 처지를 잘 숨겨두는 상징적인 표현이 유행하게 된다. 특히 이인로의 작품은 자연시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수목 등 자연소재에 조회가 깊었고 실제로 자신이 자연 속에 은거하지 못하고 세상 속에 살면서 자연에 대한 탐닉을 통한 대리만족과 탈속의 경지를 주로 노래했다. 그의 시는 회화성이 뛰어났다.
그의 <산거> 라는 시를 보면
봄은 갔지만 꽃은 아직 남아있는데
하늘이 맑으니 골짜기는 절로 그늘졌네
대낮에 두견새 울름소리 들리니
비로소 사는 곳이 깊은 골짜기임을 알겠네

<이인로의 산거>
이 시는 마치 현재 그 곳에 있는 것처럼 자연현상을 잘 포착하고 있다. 중국 원림의 발전이 시·서·화의 경치를 원림조성을 통해 일치시킨 것과 같은 원리이다. 시가 세상의 경치가 되고 세상의 경치가 또 시가 되고 그 속에 인간이 조화되는 현상과도 같다.
《동문선》 권65에 보면 이인로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북쪽 행랑을 넓혀서 와도헌을 짓고 지은 기문인 와도헌기에 보면 자신의 처지를 아쉬워하며 어려서부터 한가롭고 고요함을 좋아하며 사람을 방문하는 데는 게으르지만 북으로 난 들창 앞에 높이 누워서 저절로 불어오는 바람을 좋아하였으니 이것은 곧 도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와도헌을 짓게 되니 도잠과 이태백의 경지에 자신이 들만하다 하였던 것이다. 대사공오빈정기 등 정자와 관련된 기문을 많이 지었고 경관을 보는 안목도 남달라 팔경시도 남겼다.
또 《동문선》 권2에 보면 개성의 홍도정에 부친 글로 백당 동쪽 산기슭에 맑은샘에서 돌에 걸터앉아 더위를 피하는데 바람이 솔솔 불면 자리를 펴고 나무 옹두리를 베개하고 꿈을 꾸면 백구와 희롱하는 듯 요지에서 서왕모 노래 곡조를 듣는 듯하였다 하니 이인로가 자연과 원림에서 한거하는 선비의 모습을 자주 시에 표현함으로서 후대들이 원림향유에 대한 로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당한 것이다.
원림관련 시를 보면 정자를 주제로 쌍명정, 보석정 등이 대표적이고 죽취일에 대를 옮겨 심으면서(竹醉日移竹), 매화(梅花) , 월계화(月季花), 백작약 등 원림의 소재를 다룬 것도 수가 많다.
최태위의 <쌍명정> 에서
소부와 허유는 같은 숨어사는 선비라 하려니 성안에 살고 있고
기룡 같은 현달한 재상이라 하려니 자연을 너무 사랑하네
천금으로 몇 이랑의 땅을 사서
푸른 기와 붉은 난간 갖춘 작은 집을 지었네
맑은 바람 시원하고 낮잠은 시원하고
두둥실 떠 있는 푸른 하늘의 구름, 그림자 뜰에 드리우네
한가함 찾아 한가함 얻으니 한가한 맛 알아
지난 날 놀던 섬돌 약초 뒷집을 꿈꾸지 않으리
이인로는 불우한 시대를 살았으나 좌절된 출세의지를 시를 통해 극복했고 그에게 있어 자연과 원림은 시를 짓는데 예술적 심미적 수단으로 작용했으며 죽림고회를 중심으로 자연에 귀의하여 원림에서 한거하는 그의 태도는 원림조성의 기본 기능으로 자리잡아 후대에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건곤,안대회,이종묵,정민(2005), 한국명승고적 기문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이회
박성규(2006). 이인로의 시세계 소고, 도가적 성향의 시를 중심으로, 한문교육연구 27
전유재(2012), 이인로 소상팔경에 갈무리된 화의 미학, 고전문학연구 42
에드워드 슐츠, 김범 옮김(2014), 무신과 문신, 글항아리
이선미(1991),이인로의 문학세계-파한집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고려 시대 문인들이 원림문화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규보를 먼저 조명한 바 있다. 동시대를 주유했던 문인 중에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려 의종에서 고종 때를 살다간 이인로(李仁老, 1152∼1220)다. 그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원(慶源),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항간에 쌍명재(雙明齋)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여부가 명확하지 않다는 설도 있다.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이다. 저술로는 《은대집 銀臺集》, 《쌍명재집 雙明齋集》, 《파한집 破閑集》 등이 알려져 있으나 현재, 그의 아들 세황이 엮은 《파한집》만이 남아있으며, 이규보의 《동문선》과 최자의 《보한집》에 120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파한집 자료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인로는 문벌귀족의 자제였지만 부모를 일찍 여의고 명종의 숙부인 화엄승통 요일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이 때문에 한때 승려의 신분이기도 했다. 유년기 때 유교 전적류와 제자백가 등을 두루 공부할 수 있었고 일찍이 시에 재능을 보였으며 교양과 전문성을 지닌 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인로는 이규보와 함께 최충헌의 집에 여러 차례 초대되어 시를 지으면서 명성을 더하게 된다.
당시 최충헌은 그의 집권기 동안 예술을 후원하고 문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1205년(희종 1년)에 정자를 짓고 유학자들을 불러 작시 경연을 열게 된다. 당시 이인로를 중심으로 한 죽림고회 집단은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나 최충헌이 여는 문학행사에는 적극 참여하였고 최충헌은 세력을 가리지 않고 이인로와 같은 뛰어난 문인들의 후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인로의 조력자로서 최충헌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파한집 본문 자료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이인로는 유가와 도가, 불교에 이르기까지 도통했는데 이러한 성향은 작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전유재(2013)는 이인로의 문학에 나타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인로의 작품은 유가의 영향으로 인간중심에서 자연을, 도가의 영향탓으로 자연중심에서 인간해석으로 발전하여 심리와 사물을 서로 융합시켜 물아일체의 상태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연사물의 속성을 닮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인로가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경향은 중국 진나라시대 죽림칠현을 본딴 죽림고회의 활동으로 주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신이 집권하여 문신들이 정계에서 소외되자 산야로 들어가 시와 술로써 불우한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한 죽림고회는 이인로를 위시하여 임춘, 오세재이다. 이인로는 중국 시인 백낙천(白樂天)의 4우(四友)를 모방해 미수사우(眉叟四友)를 맺었는데 임춘을 시우(詩友), 조통을 산림우(山林友), 이담지를 주우(酒友), 그리고 승려인 종령(宗聆)을 공문우(空門友)라 칭했다. 그의 영향력은 단순히 개인 간의 친목 도모를 넘어서 뜻이 맞는 문인들과 함께 모임을 결성하여 집단적 형태로 교유하였고 이는 죽림고회 뿐 아니라 친인척, 승려, 용두회(龍頭會), 최당 형제가 주축이 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 등에도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이인로가 주축이 된 죽림고회의 활동은 후에 산천에 은거하면서 지내는 은거문화의 전형이 된다.
그가 가진 재주에 걸맞는 처우를 받지 못한 점이 《고려사》에 보면 이인로의 성격에 대해 비판하는 글로 여실히 나타난다. 사람의 성격이 좁고 참을성이 없어서 당시의 집권자들에게 거슬려 크게 쓰이지 못했다 적고 있다. 그가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무인집권시대 수난을 겪으면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의 처지를 떠나 자연으로 귀거래하는 모습은 그의 시에 상징적 표현으로 감추어져 있다.
당시 이규보와 이인로를 중심으로 한 한시산문의 신경향을 보면 경치를 표현하는 데 마치 그림을 그리듯 실감나게 묘사하고 이 경치에 자신의 처지를 잘 숨겨두는 상징적인 표현이 유행하게 된다. 특히 이인로의 작품은 자연시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수목 등 자연소재에 조회가 깊었고 실제로 자신이 자연 속에 은거하지 못하고 세상 속에 살면서 자연에 대한 탐닉을 통한 대리만족과 탈속의 경지를 주로 노래했다. 그의 시는 회화성이 뛰어났다.
그의 <산거> 라는 시를 보면
봄은 갔지만 꽃은 아직 남아있는데
하늘이 맑으니 골짜기는 절로 그늘졌네
대낮에 두견새 울름소리 들리니
비로소 사는 곳이 깊은 골짜기임을 알겠네
<이인로의 산거>
이 시는 마치 현재 그 곳에 있는 것처럼 자연현상을 잘 포착하고 있다. 중국 원림의 발전이 시·서·화의 경치를 원림조성을 통해 일치시킨 것과 같은 원리이다. 시가 세상의 경치가 되고 세상의 경치가 또 시가 되고 그 속에 인간이 조화되는 현상과도 같다.
《동문선》 권65에 보면 이인로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북쪽 행랑을 넓혀서 와도헌을 짓고 지은 기문인 와도헌기에 보면 자신의 처지를 아쉬워하며 어려서부터 한가롭고 고요함을 좋아하며 사람을 방문하는 데는 게으르지만 북으로 난 들창 앞에 높이 누워서 저절로 불어오는 바람을 좋아하였으니 이것은 곧 도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와도헌을 짓게 되니 도잠과 이태백의 경지에 자신이 들만하다 하였던 것이다. 대사공오빈정기 등 정자와 관련된 기문을 많이 지었고 경관을 보는 안목도 남달라 팔경시도 남겼다.
또 《동문선》 권2에 보면 개성의 홍도정에 부친 글로 백당 동쪽 산기슭에 맑은샘에서 돌에 걸터앉아 더위를 피하는데 바람이 솔솔 불면 자리를 펴고 나무 옹두리를 베개하고 꿈을 꾸면 백구와 희롱하는 듯 요지에서 서왕모 노래 곡조를 듣는 듯하였다 하니 이인로가 자연과 원림에서 한거하는 선비의 모습을 자주 시에 표현함으로서 후대들이 원림향유에 대한 로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당한 것이다.
원림관련 시를 보면 정자를 주제로 쌍명정, 보석정 등이 대표적이고 죽취일에 대를 옮겨 심으면서(竹醉日移竹), 매화(梅花) , 월계화(月季花), 백작약 등 원림의 소재를 다룬 것도 수가 많다.
최태위의 <쌍명정> 에서
소부와 허유는 같은 숨어사는 선비라 하려니 성안에 살고 있고
기룡 같은 현달한 재상이라 하려니 자연을 너무 사랑하네
천금으로 몇 이랑의 땅을 사서
푸른 기와 붉은 난간 갖춘 작은 집을 지었네
맑은 바람 시원하고 낮잠은 시원하고
두둥실 떠 있는 푸른 하늘의 구름, 그림자 뜰에 드리우네
한가함 찾아 한가함 얻으니 한가한 맛 알아
지난 날 놀던 섬돌 약초 뒷집을 꿈꾸지 않으리
이인로는 불우한 시대를 살았으나 좌절된 출세의지를 시를 통해 극복했고 그에게 있어 자연과 원림은 시를 짓는데 예술적 심미적 수단으로 작용했으며 죽림고회를 중심으로 자연에 귀의하여 원림에서 한거하는 그의 태도는 원림조성의 기본 기능으로 자리잡아 후대에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건곤,안대회,이종묵,정민(2005), 한국명승고적 기문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이회
박성규(2006). 이인로의 시세계 소고, 도가적 성향의 시를 중심으로, 한문교육연구 27
전유재(2012), 이인로 소상팔경에 갈무리된 화의 미학, 고전문학연구 42
에드워드 슐츠, 김범 옮김(2014), 무신과 문신, 글항아리
이선미(1991),이인로의 문학세계-파한집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