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원의 대가인 Geoffrey Jellicoe는 조경의 역사를 그리스, 서아시아 그리고 중국으로 구분하고 이 세 지역을 인류 정원의 태동과 발전의 중심축으로 규정하였다. 이 가운데 중국원림조영 예술의 우수성은 한국 일본 등 동북아 주변국을 벗어나 유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점으로 인정된다. 중국원림의 조영방식은 당조(唐朝)에 기초를 다지고 번영을 꾀했으며 지속적인 발전을 통하여 황가원림의 화려함과 문인과 일반계층의 소박하고 단아한 구성과 다양한 요소로 양립하며 각기 성장하였다. 특히 문인들에 의한 원림조영은 학문적 계승을 중심으로 각 학파의 사상과 독특한 풍취가 공간에 반영되었고,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관료 출신 문인들이 따랐던 은일적 생활방식은 그들의 사상과 정치적인 신념을 원림에 투영하는 형식을 띄게 된다. 특히 북송시기(宋朝:북송과 남송을 합하여 일컬음) 문인들의 시화를 반영한 원림조영방식이 황실에까지 유행하면서 기존 황실의 화려한 원림조영방식에 시화(詩畵)의 풍모가 더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는 혼란한 정세를 반영하듯 많은 문인들이 수도인 개봉(開封)을 떠나게 된다.

<소순흠>
북송시기에는 대표적으로 사마광(司馬光), 심괄(沈括), 소순흠(蘇舜欽) 등이 원림조영에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소순흠(蘇舜欽, 1008~1048)은 소주 4대명원(蘇州四大名園)으로 불리우는 창랑정(滄浪亭)을 조영한 인물이다. 그의 본적은 현 사천지역 중강(中江)으로 증조부 때 수도 개봉으로 이전하여 개봉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자미(子美)로 불리어 졌다. 조부와 부친의 오랜 관직 생활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찍이 관직에 올라 몽성(蒙城:현 안휘성) 장원(長垣:현 하북성)의 현령 및 집현전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소순흠은 개혁파로서 구양수(歐陽脩)와 더불어 북송의 정치적 개혁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한 후 관직을 박탈당했고 수도 개봉을 떠나 1045년에 소주에 정착하게 된다.
소주의 풍광은 소순흠에게는 뜻밖의 행복감을 주었고 그는 소주성 남쪽 문묘(文廟)의 동쪽에 위치한 창랑정 부지를 구입하게 된다. 본래 창랑정 부지는 오대(五代) 말기 광릉왕 정원료(广陵王钱元镣)의 오군 절도사 손승우(孙承佑)의 별서로서 이미 황폐해지고 초목이 무성했던 폐허를 소순흠이 당시 4萬元(송대의 4만원은 당시 고급 주점에서 2명이 식사를 하는 것 보다 낮은 가격이었다)에 사들여 수리하고 새로 건축물을 축조하여 새로운 형태의 원림을 조영한 것이다. 〈창랑정기(滄浪亭記)〉에 의하면 소순흠은 물가 가산 위에 정자를 짓고 초사(楚辭·漁父)에서 차명하여 정자명을 짓고 스스로를 창랑옹(滄浪翁)이라 불렀다(屈原曰:“滄浪之水清兮, 可以灌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催我足”之意, 名日“ 滄浪亭” , 自號“滄浪翁”: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으리라).

<창랑정 원림>
소순흠은 자신이 조영한 원림을 통해 당대 사대부들의 은둔의 목적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심정을 투영하려 했다. 소주 지방의 원림은 물을 주체로 삼아 공간을 구성하고 그에 맞게 각종 원림 요소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창랑정 원림은 남쪽 공간에는 명도당(明道堂)을 중심으로 건조물 위주의 원림을 조성하였고 서남쪽에는 가산을 조성하고 동굴과 누각을 조성하였다. 남쪽 가산의 누각에서 바라보는 북쪽 원림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며 마치 깊은 산속의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을 연출하였다.

<창랑정>
창랑정 북쪽에 조성된 원림은 동서쪽 산악을 중심으로 원림을 구성하였고 외부로 부터 유입되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지당 등 수공간을 조성하였으며 수변을 따라 회랑과 정자 등 건조물이 축조되었다. 회랑을 기본으로 다양한 누창이 설치되었는데 그 문양이 108가지에 이른다. 각 건조물은 차경을 고려하여 조성된 것이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수변에 건조물들을 조성함으로서 수면에 투영된 또 다른 풍광을 감상하게 하거나 건조물 내에서 바라보는 원경과 화목 등의 감상을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물가에 배를 띄워 정원을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특히 창랑정은 가산위에 조성되어 삼면이 물과 접해있고 죽림에 둘러 싸여 있다. 이처럼 원림 내에는 산수와 수석(樹石), 죽림과 초목이 주를 이루어 근수원산(近水遠山)의 배치 형식을 통하여 시각적 측면의 차경만을 고려하지 않고 한 차원 높은 공감각적인 차경을 도입함으로서 원림 속에서 완전한 물아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창랑정 평면도>
이는 그 당시 원림 조영 방식과 기법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으며 소순흠 자신의 원림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순흠은 약 3년간의 은둔생활 동안 창랑정과 소주를 주제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나이 41세(1048년)에 복직되어 호주(湖州) 지역에 임관 된 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소순흠이 소주를 떠난 후 창랑정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게 되고 청조(淸朝) 강희황제(康熙皇帝) 때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으나 원림 내 기본 틀은 그가 조성한 대로 계속 유지되었고 원림의 명칭 또한 현재까지 창랑정이라 불리우게 된다.

<창랑정 수변>
창랑정은 현존하는 소주의 원림 중 가장 오래된 원림으로서 역대 수많은 문인 묵객들의 작품에 제재로 등장하였으며 그 모습이 현재까지 온전히 계승되어왔다.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그의 영향으로 승덕 지역 피서산장의 창랑서(滄浪嶼), 제남지역 대명호의 소창랑(小滄浪), 졸정원의 소창랑과 망사원의 탁영수각(濯纓水閣) 등과 일본 도산시대(桃山時代) 수도인 교토에 서본원사(西本愿寺)의 창랑지(滄浪池) 등 북송시대부터 ‘창랑(滄浪)’을 주제로 중국의 고전원림의 조영이 이루어졌으며 문학창작 분야에서도 이를 제재로한 수많은 시문이 창작 되었다.
소순흠은 창랑정을 조영하고 원림과 자신의 창작활동을 결합하여 창랑정기(滄浪亭記)라는 산문을 완성하였고 후대에 이 원림을 흠모하여 조성하려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창랑정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소순흠의 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영국 정원의 대가인 Geoffrey Jellicoe는 조경의 역사를 그리스, 서아시아 그리고 중국으로 구분하고 이 세 지역을 인류 정원의 태동과 발전의 중심축으로 규정하였다. 이 가운데 중국원림조영 예술의 우수성은 한국 일본 등 동북아 주변국을 벗어나 유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점으로 인정된다. 중국원림의 조영방식은 당조(唐朝)에 기초를 다지고 번영을 꾀했으며 지속적인 발전을 통하여 황가원림의 화려함과 문인과 일반계층의 소박하고 단아한 구성과 다양한 요소로 양립하며 각기 성장하였다. 특히 문인들에 의한 원림조영은 학문적 계승을 중심으로 각 학파의 사상과 독특한 풍취가 공간에 반영되었고,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관료 출신 문인들이 따랐던 은일적 생활방식은 그들의 사상과 정치적인 신념을 원림에 투영하는 형식을 띄게 된다. 특히 북송시기(宋朝:북송과 남송을 합하여 일컬음) 문인들의 시화를 반영한 원림조영방식이 황실에까지 유행하면서 기존 황실의 화려한 원림조영방식에 시화(詩畵)의 풍모가 더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는 혼란한 정세를 반영하듯 많은 문인들이 수도인 개봉(開封)을 떠나게 된다.
<소순흠>
북송시기에는 대표적으로 사마광(司馬光), 심괄(沈括), 소순흠(蘇舜欽) 등이 원림조영에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소순흠(蘇舜欽, 1008~1048)은 소주 4대명원(蘇州四大名園)으로 불리우는 창랑정(滄浪亭)을 조영한 인물이다. 그의 본적은 현 사천지역 중강(中江)으로 증조부 때 수도 개봉으로 이전하여 개봉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자미(子美)로 불리어 졌다. 조부와 부친의 오랜 관직 생활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찍이 관직에 올라 몽성(蒙城:현 안휘성) 장원(長垣:현 하북성)의 현령 및 집현전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소순흠은 개혁파로서 구양수(歐陽脩)와 더불어 북송의 정치적 개혁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한 후 관직을 박탈당했고 수도 개봉을 떠나 1045년에 소주에 정착하게 된다.
소주의 풍광은 소순흠에게는 뜻밖의 행복감을 주었고 그는 소주성 남쪽 문묘(文廟)의 동쪽에 위치한 창랑정 부지를 구입하게 된다. 본래 창랑정 부지는 오대(五代) 말기 광릉왕 정원료(广陵王钱元镣)의 오군 절도사 손승우(孙承佑)의 별서로서 이미 황폐해지고 초목이 무성했던 폐허를 소순흠이 당시 4萬元(송대의 4만원은 당시 고급 주점에서 2명이 식사를 하는 것 보다 낮은 가격이었다)에 사들여 수리하고 새로 건축물을 축조하여 새로운 형태의 원림을 조영한 것이다. 〈창랑정기(滄浪亭記)〉에 의하면 소순흠은 물가 가산 위에 정자를 짓고 초사(楚辭·漁父)에서 차명하여 정자명을 짓고 스스로를 창랑옹(滄浪翁)이라 불렀다(屈原曰:“滄浪之水清兮, 可以灌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催我足”之意, 名日“ 滄浪亭” , 自號“滄浪翁”: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으리라).
<창랑정 원림>
소순흠은 자신이 조영한 원림을 통해 당대 사대부들의 은둔의 목적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심정을 투영하려 했다. 소주 지방의 원림은 물을 주체로 삼아 공간을 구성하고 그에 맞게 각종 원림 요소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창랑정 원림은 남쪽 공간에는 명도당(明道堂)을 중심으로 건조물 위주의 원림을 조성하였고 서남쪽에는 가산을 조성하고 동굴과 누각을 조성하였다. 남쪽 가산의 누각에서 바라보는 북쪽 원림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며 마치 깊은 산속의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을 연출하였다.
<창랑정>
창랑정 북쪽에 조성된 원림은 동서쪽 산악을 중심으로 원림을 구성하였고 외부로 부터 유입되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지당 등 수공간을 조성하였으며 수변을 따라 회랑과 정자 등 건조물이 축조되었다. 회랑을 기본으로 다양한 누창이 설치되었는데 그 문양이 108가지에 이른다. 각 건조물은 차경을 고려하여 조성된 것이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수변에 건조물들을 조성함으로서 수면에 투영된 또 다른 풍광을 감상하게 하거나 건조물 내에서 바라보는 원경과 화목 등의 감상을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물가에 배를 띄워 정원을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특히 창랑정은 가산위에 조성되어 삼면이 물과 접해있고 죽림에 둘러 싸여 있다. 이처럼 원림 내에는 산수와 수석(樹石), 죽림과 초목이 주를 이루어 근수원산(近水遠山)의 배치 형식을 통하여 시각적 측면의 차경만을 고려하지 않고 한 차원 높은 공감각적인 차경을 도입함으로서 원림 속에서 완전한 물아일체를 이루고자 하였다.
<창랑정 평면도>
이는 그 당시 원림 조영 방식과 기법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으며 소순흠 자신의 원림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순흠은 약 3년간의 은둔생활 동안 창랑정과 소주를 주제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나이 41세(1048년)에 복직되어 호주(湖州) 지역에 임관 된 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소순흠이 소주를 떠난 후 창랑정은 수차례 주인이 바뀌게 되고 청조(淸朝) 강희황제(康熙皇帝) 때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으나 원림 내 기본 틀은 그가 조성한 대로 계속 유지되었고 원림의 명칭 또한 현재까지 창랑정이라 불리우게 된다.
<창랑정 수변>
창랑정은 현존하는 소주의 원림 중 가장 오래된 원림으로서 역대 수많은 문인 묵객들의 작품에 제재로 등장하였으며 그 모습이 현재까지 온전히 계승되어왔다.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그의 영향으로 승덕 지역 피서산장의 창랑서(滄浪嶼), 제남지역 대명호의 소창랑(小滄浪), 졸정원의 소창랑과 망사원의 탁영수각(濯纓水閣) 등과 일본 도산시대(桃山時代) 수도인 교토에 서본원사(西本愿寺)의 창랑지(滄浪池) 등 북송시대부터 ‘창랑(滄浪)’을 주제로 중국의 고전원림의 조영이 이루어졌으며 문학창작 분야에서도 이를 제재로한 수많은 시문이 창작 되었다.
소순흠은 창랑정을 조영하고 원림과 자신의 창작활동을 결합하여 창랑정기(滄浪亭記)라는 산문을 완성하였고 후대에 이 원림을 흠모하여 조성하려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창랑정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소순흠의 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