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나면 시골 마을은 사람다운 일을 했다. 햅쌀로 시루떡을 지어 조상의 묘소에 올랐다. 낳아주신 것에 감사하는 시사(時祀)를 지내고 나면 비로소 농한기가 시작된다. 그러면 집안 아이들과 나는 담벼락을 돌며 깨진 기왓장을 찾아다녔다. 할머니는 기왓장 쪼가리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몇 개를 골라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암키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돌절구에 암키와를 넣고 곱게 곱게 빻았다. 그러면 기왓장은 거짓말처럼 매끄럽고 먹고 싶을 만큼 보드랍게 변했다. 거기다 볏짚 한 단이면 놋그릇 닦을 준비가 끝난 것이다.
어느덧 안마루에 집안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는 둥근 멍석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놋그릇을 쌓았다. 어디서 나오는지 밥그릇이며 숟가락, 젓가락, 술잔이며 그리고 잘 쓰지 않던 제기까지. 멍석 가운데 쌓아놓으면 산더미 같았다. 푸르죽죽 녹슬거나 거뭇거뭇 때 묻은 놋그릇들이다. 아주머니들이 기와가루를 묻힌 볏짚으로 그릇을 닦으며 연신 돌려댔다. 어느새 놋그릇은 은은하면서도 영롱한 자태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색깔 이름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다. 마루에 뒹굴면서도 점점 더 빛을 내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놋그릇을 내 눈앞에 대고 물었다. 얼굴 비치나? 눈이 부실 정도로 반들거리면서도, 볼록렌즈처럼 내 얼굴을 크고 길게 반사시켰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빙긋하면, 제대로 닦인 것이었다.
이야기꽃이 무르익을 때면 반짝이는 놋그릇도 쌓여갔다.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가끔 들리는 것은 그릇이야기였다. 그릇이 크다. 그릇이 너무 작아. 그 놈의 그릇 어디다 쓸꼬. 소갈머리가 간종종지만도 못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릇이 곧 사람이었다. 사람이 곧 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만큼이나 그릇도 다양하고, 그릇만큼이나 사람도 다양하다. 그릇마다 담는 것도 다르다. 국그릇, 밥그릇, 찬그릇, 물그릇... 그릇도 나름대로 운명을 가진 모양이다. 행복을 담는 그릇도 있고, 불행을 담는 그릇도 있을 테니까.
원래 놋그릇은 쓰임새에 따라 모양이나 종류가 아주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식기류·혼사용구·제사용구·불기류·난방용구·등잔류 뿐이랴. 술을 받는 잔류 하나만 해도 수많은 모양에 쓰임새도 제각기 다르다. 그뿐 아니다. 놋그릇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도 엄격하게 분류된다. 거푸집에 놋쇠 녹인 것을 부어 만드는 주조법도 있고, 놋쇠로 된 괴를 망치로 때려서 만드는 단조법도 있다. 주조법으로 만든 것이 주물이요, 단조법으로 만든 것이 방짜요, 이 두 가지 방법을 혼합해 만든 것이 반방짜다. 놋그릇은 이렇게 만드는 방법과 모양 그리고 갈고 닦는 정성에 따라 무엇을 담을지 얼마나 담을지 결정된다. 쓰임새가 곧 그릇의 운명이다.
사람도 그릇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 가고, 어떤 모습과 품격을 지키며, 얼마나 자신을 갈고 닦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물론 사람임에는 더 사람도 없고 덜 사람도 없다. 사람 위에도 사람 없고 사람 밑에도 사람 없다. 그러나 사람이 되는 방법과 그 쓰임새에 따라서는 제각각 다르다. 어찌 하나같이 저 모양일까 하는 주물형 인간도 있을 것이고, 두드리고 두드려 저만의 개성으로 다져진 방짜형 인간도 있을 것이다. 반은 주물을 뜨고 반은 두드려진 반방짜형 인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사람다운 사람도 있고, 덜 사람다운 사람도 있다. 귀한 대접을 받는 사람도 있고, 천한 대접을 받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 누구나 자신의 쓰임새를 알고 싶어 한다. 나는 어떻게 쓰일까? 쓰임새가 곧 운명이니까. 나라는 그릇은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을까? 내 운명의 주사위는 도대체 누가 던지는 것일까?
“네 인격이 곧 네 운명이다.”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다. 네 운명이 그토록 궁금하다면, 점을 치러 가기 전에 네 인격을 들여다보라는 뜻이다. 남들이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지 궁금하다면, 네 인격을 돌이켜보라. 거울에 얼굴이 비치듯이 인격에 운명이 비친다는 것이다. 영롱하게 빛나는 운명을 원한다면, 네 인격을 갈고 닦으라. 트이고 열린 인격이 곧 운수대통이라는 뜻이다.
인격은 운명의 길잡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것은 결코 실패작이 아니다. 내 인격의 결과일 뿐이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과 우연 사이에서 만들어낸 가장 잘 빠진 명품이다. 성공은 늘 지금 여기 서있는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여기 명품이, 지금의 성공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가? 자신의 운명을 편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인격뿐이다. 인격이야말로 인연과 현실을 교정하여 운명을 편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명이 바뀌어 인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변할 수 있기에 운명도 바뀌는 것이다.
사격이 곧 사운이다. 회사의 품격이 곧 그 회사의 운명이다. 기업이나 회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물론 개인은 개인들과 경쟁하지만, 기업은 기업들과 경쟁한다. 현대사회는 경쟁도 중요한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기업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한가? 기업의 미래를 점치고 싶은가? 기업의 품격을 되돌아보면, 기업의 운명이 보일 것이다. 기업을 제대로 살리고 싶다면, 먼저 기업의 품격을 살려야 할 것이다. 기업을 자손 대대로 이어가고 싶은가? 그러면 대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기업의 품격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국격이 곧 국운이다. 한 나라의 품격이 곧 그 나라의 운명이다. 국가도 시대적 변화에 예외가 아니다. 국가도 흥망성쇠의 길을 걷는다. 지금 이 나라의 운명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국격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각양각색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갖가지 국익을 챙기려는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가 개인의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듯이, 국격은 그 국민의 인격으로 구성된다. 국민들의 인격을 보면 국격이 보이고, 국격을 보면 국운이 보인다. 국민의 인격이 국격을 채우고, 국격이 국운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약 력 ◆
*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청운동 성천댁 소유자
*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가을걷이가 끝나면 시골 마을은 사람다운 일을 했다. 햅쌀로 시루떡을 지어 조상의 묘소에 올랐다. 낳아주신 것에 감사하는 시사(時祀)를 지내고 나면 비로소 농한기가 시작된다. 그러면 집안 아이들과 나는 담벼락을 돌며 깨진 기왓장을 찾아다녔다. 할머니는 기왓장 쪼가리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몇 개를 골라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암키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돌절구에 암키와를 넣고 곱게 곱게 빻았다. 그러면 기왓장은 거짓말처럼 매끄럽고 먹고 싶을 만큼 보드랍게 변했다. 거기다 볏짚 한 단이면 놋그릇 닦을 준비가 끝난 것이다.
어느덧 안마루에 집안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는 둥근 멍석을 마루에 깔고 그 위에 놋그릇을 쌓았다. 어디서 나오는지 밥그릇이며 숟가락, 젓가락, 술잔이며 그리고 잘 쓰지 않던 제기까지. 멍석 가운데 쌓아놓으면 산더미 같았다. 푸르죽죽 녹슬거나 거뭇거뭇 때 묻은 놋그릇들이다. 아주머니들이 기와가루를 묻힌 볏짚으로 그릇을 닦으며 연신 돌려댔다. 어느새 놋그릇은 은은하면서도 영롱한 자태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색깔 이름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다. 마루에 뒹굴면서도 점점 더 빛을 내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놋그릇을 내 눈앞에 대고 물었다. 얼굴 비치나? 눈이 부실 정도로 반들거리면서도, 볼록렌즈처럼 내 얼굴을 크고 길게 반사시켰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빙긋하면, 제대로 닦인 것이었다.
이야기꽃이 무르익을 때면 반짝이는 놋그릇도 쌓여갔다.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가끔 들리는 것은 그릇이야기였다. 그릇이 크다. 그릇이 너무 작아. 그 놈의 그릇 어디다 쓸꼬. 소갈머리가 간종종지만도 못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릇이 곧 사람이었다. 사람이 곧 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만큼이나 그릇도 다양하고, 그릇만큼이나 사람도 다양하다. 그릇마다 담는 것도 다르다. 국그릇, 밥그릇, 찬그릇, 물그릇... 그릇도 나름대로 운명을 가진 모양이다. 행복을 담는 그릇도 있고, 불행을 담는 그릇도 있을 테니까.
원래 놋그릇은 쓰임새에 따라 모양이나 종류가 아주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식기류·혼사용구·제사용구·불기류·난방용구·등잔류 뿐이랴. 술을 받는 잔류 하나만 해도 수많은 모양에 쓰임새도 제각기 다르다. 그뿐 아니다. 놋그릇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서도 엄격하게 분류된다. 거푸집에 놋쇠 녹인 것을 부어 만드는 주조법도 있고, 놋쇠로 된 괴를 망치로 때려서 만드는 단조법도 있다. 주조법으로 만든 것이 주물이요, 단조법으로 만든 것이 방짜요, 이 두 가지 방법을 혼합해 만든 것이 반방짜다. 놋그릇은 이렇게 만드는 방법과 모양 그리고 갈고 닦는 정성에 따라 무엇을 담을지 얼마나 담을지 결정된다. 쓰임새가 곧 그릇의 운명이다.
사람도 그릇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 가고, 어떤 모습과 품격을 지키며, 얼마나 자신을 갈고 닦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다. 물론 사람임에는 더 사람도 없고 덜 사람도 없다. 사람 위에도 사람 없고 사람 밑에도 사람 없다. 그러나 사람이 되는 방법과 그 쓰임새에 따라서는 제각각 다르다. 어찌 하나같이 저 모양일까 하는 주물형 인간도 있을 것이고, 두드리고 두드려 저만의 개성으로 다져진 방짜형 인간도 있을 것이다. 반은 주물을 뜨고 반은 두드려진 반방짜형 인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사람다운 사람도 있고, 덜 사람다운 사람도 있다. 귀한 대접을 받는 사람도 있고, 천한 대접을 받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 누구나 자신의 쓰임새를 알고 싶어 한다. 나는 어떻게 쓰일까? 쓰임새가 곧 운명이니까. 나라는 그릇은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을까? 내 운명의 주사위는 도대체 누가 던지는 것일까?
“네 인격이 곧 네 운명이다.”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다. 네 운명이 그토록 궁금하다면, 점을 치러 가기 전에 네 인격을 들여다보라는 뜻이다. 남들이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지 궁금하다면, 네 인격을 돌이켜보라. 거울에 얼굴이 비치듯이 인격에 운명이 비친다는 것이다. 영롱하게 빛나는 운명을 원한다면, 네 인격을 갈고 닦으라. 트이고 열린 인격이 곧 운수대통이라는 뜻이다.
인격은 운명의 길잡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것은 결코 실패작이 아니다. 내 인격의 결과일 뿐이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과 우연 사이에서 만들어낸 가장 잘 빠진 명품이다. 성공은 늘 지금 여기 서있는 자기 자신이다. 그런데 여기 명품이, 지금의 성공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가? 자신의 운명을 편집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인격뿐이다. 인격이야말로 인연과 현실을 교정하여 운명을 편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명이 바뀌어 인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변할 수 있기에 운명도 바뀌는 것이다.
사격이 곧 사운이다. 회사의 품격이 곧 그 회사의 운명이다. 기업이나 회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물론 개인은 개인들과 경쟁하지만, 기업은 기업들과 경쟁한다. 현대사회는 경쟁도 중요한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기업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한가? 기업의 미래를 점치고 싶은가? 기업의 품격을 되돌아보면, 기업의 운명이 보일 것이다. 기업을 제대로 살리고 싶다면, 먼저 기업의 품격을 살려야 할 것이다. 기업을 자손 대대로 이어가고 싶은가? 그러면 대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기업의 품격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국격이 곧 국운이다. 한 나라의 품격이 곧 그 나라의 운명이다. 국가도 시대적 변화에 예외가 아니다. 국가도 흥망성쇠의 길을 걷는다. 지금 이 나라의 운명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국격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각양각색의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갖가지 국익을 챙기려는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가 개인의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듯이, 국격은 그 국민의 인격으로 구성된다. 국민들의 인격을 보면 국격이 보이고, 국격을 보면 국운이 보인다. 국민의 인격이 국격을 채우고, 국격이 국운을 안내하기 때문이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약 력 ◆
*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청운동 성천댁 소유자
*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