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주태의 우리문화] 어머니의 리더십



1. 성주가 주는 강력한 메시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 가면 조견당(照見堂)이란 오래된 고택이 있다. 강원도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된 유형문화재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우선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안채가 오른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ㄱ’자 모양의 안채 가운데 넓은 대청이 눈에 들어온다. 대청 가까이 다가가 여기 저기 바라보자면 안방 문 왼쪽 기둥에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다소 낯선 물건이 눈에 띤다. 소나무와 한지를 무명실로 붙들어 맨 단촐한 모양인데, ‘성주’라고 부른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물건을 어디서 보기도 힘들거니와 이름 또한 알지 못한다.


<성주>


 이 집의 9대 종부 김휘선 여사는 19살에 시집와서 만 61년을 종부로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현재 기둥에 달려 있는 것이 2000년 가을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김휘선 여사의 마지막 작품(?)이다. 여기에 담긴 뜻 또한 예사롭지 않다. 우선, 한지는 생활용품의 으뜸으로 생활이 풍족해지길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무명실은 무병장수, 소나무 상순은 자식들이 남의 곁가지가 되지 말고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뜻으로, 당 해 년도에 자란 소나무 맨 꼭대기 상순을 분질러 여기에 매단 것이다. 

 

 어머니는 2남 6녀, 자식을 모두 8남매를 두셨는데 이 문을 드나들며 이 성주를 볼 때마다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이래두 너희가 세상을 비뚤게 살겠느냐?’ 하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와 동시에 어머니가 염원하는 교육적 상징성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이 성주를 통해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셨고, 자식들은 이 가르침을 어떤 교육보다도 무겁고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가르침이 주천고택 조견당이 한 자리에서 3백년이 넘도록 이어져 내려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1원짜리 또아리도 아끼는 마음

 ‘또아리’(‘똬리’라고도 부른다) 또는 ‘또바리’라고 부르는 이 물건을 지금은 누가 만들지도 않고 또 일상생활에 쓰이지도 않는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물동이를 이거나, 어딘가에 무거운 물건을 이고 갈 때 쓰는 물건이므로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물건이다. 메밀꽃 5일 장터인 주천 장터에 가면 아마 제일 싼 물건 중의 하나가 이 또아리일 것이다. 6,70년대 장터에 가면 10개를 한 다발로 묶어서 파는데 10개가 아마 10원이었을 것이다. 이후 값이 올라 100원을 했을 것이다. 하나에 1원, 하나에 10원 하는 물건이니 참으로 싼 물건에 속했다. 그런데 조견당 김휘선 여사는 이것을 쓰다가 부스러지면 획 버리고 새것을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피륙으로 똘똘 말아 다시 쓰시곤 했다. 이 사진이 바로 헌 광목천으로 또아리를 말아 쓰던 어머니의 마지막 또아리이다.


<또아리>


 집의 크기로 보나 농사의 규모가 다른 집에 비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세상에 가장 싸고 보잘 것 없는 물건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아끼고 아껴 쓰셨다. 쌀 열 가마가 들어가는 큰 뒤주에 쌀이 꽉 차 있어도 어머니는 쌀 한 톨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저녁밥을 지을 때면 당신 몫의 쌀을 퍼내 ‘절미저축 항아리’에 모았다가 자식들 월사금이나 기성회비를 내셨고, 공책, 연필, 책받침, 컴퍼스, 대나무 자를 사는데 보태주셨다. 세상의 무엇도 아끼고 소중히 다루는 마음, 많다고 아무데나 쓰는 걸 어머니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3. 어머니는 인간이 아니다?

 조견당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신에 가까운 분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상식선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어머니는 그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일을 해내곤 했다. 우선 19살에 시집와 스무 살에 자식을 낳기 시작했다. 3년 터울로 8명의 자식을 두셨으니 만 24년 동안 늘 자식이 어머니 가슴팍에 붙어 있었다. 자식만 키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선 새벽에 부엌에 나가 밥을 해야 한다. 무쇠솥이 부뚜막에 걸려있는 부엌에서 최소한 10명 분의 밥과 반찬을 해내야 한다. 일꾼을 얻어 무슨 일을 하는 날에는 열 명 정도의 밥을 더 지어야 하는데, 우리 식구 10여 명과 일꾼 10여명, 도합 스무 명 정도의 밥을 짓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다. 모내기 하는 날, 벼베기 하는 날, 타작 하는 날, 옥수수 베는 날, 옥수수를 산에서  져 내리는 날, 이런 날에는 수 십 명분의 밥을 지어야 했다. 이런 날에는 부엌일 하는 동네 아줌마들, 거기에 딸린 식구들까지 합하면 수 십 명의 사람들이, 흡사 장날 장꾼들이 몰려다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이 연출된다.

 

 그렇게 삼시 세끼를 해야 한다. 또 그 사이 새참이라는 것이 있다. 새참을 크게 차리는 건 아니지만 아침 밥상 설거지가 끝날 쯤이면 새참 준비를 해야 한다. 막걸리 한 사발에 두부 한조각 정도이지만 차리는 입장에서는 그것도 신경이 쓰인다. 점심은 대게 일꾼들이 일하는 농토 근처로 나른다. 아줌마 대여섯 명이 광주리에 밥과 반찬 등을 이고 가 밥상을 차린다. 밭고랑 근처에서 먹는 이 밥맛은 무슨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꿀맛이다. 이것 모두가 다 어머니의 손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해가 긴 여름철에는 저년 먹고 설거지를 끝내면 10시가 넘는다. 어머니의 일은 아직도 끝날 줄을 모른다. 자식들과 조카들까지 10여 명의 애들이 짓쌂아 온 옷가지들을 빨아 널고 꿰매고, 특히 겨울철에는 등잔불을 밝히시고 30촉짜리 전구를 넣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시던 어머니의 모습, 잠결에 몇 번이고 깨어났다 잠들다 반복해도 어머니는 날이 새도록 일손을 놓지 못했다. 

 

 종가집은 명절이 바쁘다. 명절음식 장만도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설빔이나 추석에 입는 한복을 손질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두루마기를 다리는 일, 동정을 붙이는 일, 댓님을 곱게 마름질하는 일, 다 어머니의 몫이다. 어머니 말고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봄에는 장도 담그고 가을에는 김장도 해야 한다. 재비가 돌아온다는 삼월삼짓날에는 고추장, 막장도 담아야 한다. 메주도 소금물에 담가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간장을 달이고 메주는 된장이 되는 것이다. 솜씨가 없으면 큰일이 난다. 솜씨가 있어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장을 관리하기 어렵다. 맛있는 장맛은 종부의 솜씨와 마르지 않는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뛰어난 솜씨와 마르지 않는 부지런함이 뼛속까지 배어있는 그런 분이었다.

 

 우리 할머니, 8대 종부는 우리 어머니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만 시키고 일찍이 세상을 뜨셨다. 그래서 9대 종부인 우리 어머니는 작은댁 작은할머니에게서 음식, 바느질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 어머니의 선생은 시어머니가 아니라 정작 작은어머니였다. 그 작은 할머니는 동네 아낙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큰댁 어멈은 똥도 버리기 아까운 여자다”라고.  
 

 < 조견당(照見堂): ‘무엇을 보든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뜻을 담고 있는 '조견당' 당호는  《반야심경》 첫 구절에 나오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을 본떠서 지었다. >
 

김주태
◆ 약 력 ◆  

MBC 미디어사업본부 재직   

영월 주천 고택 조견당(강원도문화재자료 제71호) 소유자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이사



 News & Company

법인명 : 주식회사 리몽 | LEEMONG corp.

등록번호 : 강원 아00093 |  발행일자 : 2011. 9. 5

발행인 :  이원석 | 편집인 : 이진경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미 기사배열 책임자 : 이원석

[25464]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강릉선교장

63, Unjeong-gil, Gangneung-si, Gangwon-do,[25464] Republic of Korea

Email : kchnews@naver.com T : 02-733-5270 F : 02-6499-9911

 ⓒ문화유산신문 당사의 기사를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링크, 게재하거나 배포하실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19 KCHN All rights reserved. Hosting &  Powered by Leemong co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