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주태의 우리문화] 사도세자가 우리 집안에도?



 조견당 안채 넓은 마루에는 커다란 뒤주가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이 뒤주는 조견당이 완공된 순조 27년, 1827년과 시간의 역사가 거의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뒤주는 쌀 열 가마가 들어갈 정도로 웬만한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다. 나도 어릴 적에 어머니의 명을 받고 그 안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장정 한 사람이 앉아 있어도 그리 옹색하지 않을 정도로 꽤 넓다. 내가 뒤주 안에 들어간 이유는 햅쌀을 담기 전에 남아있는 묵은 쌀을 퍼내야 했기 때문이다.


<조견당 대청에 있는 뒤주>


 그런데 이 뒤주를 가끔 이용(?)한 분이 우리 집안에 있었다고 한다. 숙종 연간에 한양에서 내려와 주천에 자리 잡은 이래, 입향조인 10대 할아버지가 큰 부자였고, 가장 가까이에는 증조할아버지가 상당한 부를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 증조부의 아들, 즉 우리 할아버지가 뒤주를 종종 이용하신 분인데, 하룻밤에 노름으로 전답을 몇 마지기를 잃고 돌아오면 진노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밥을 굶기곤 했다는 얘기다. 할아버지가 좁은 뒤주에서 견디지 못해 울부짖으며 용서를 빌면 그때서야 증조부께서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뒤주 밖으로 꺼내주시곤 했다는 것이다.

 

 주로 농사를 지었던 우리 집에는 옥수숫대나 수숫대궁으로 소여물을 썰어 주던 작두가 아직도 여러 개 있다. 손으로 가볍게 써는 작은 것에서부터, 발로 높이 들어 올렸다가 힘껏 발로 내려 밟는 큰 작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양의 작두가 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예의 노름버릇을 못 버리고 노름으로 큰 빚을 지고 오자 증조부께서 하인들에게 마당에 작두를 내오라고 호통을 치셨다. 작두가 마당 가운데 놓여지자 할아버지를 마당 가운데로 나오게 하고는 시퍼런 작두날 아래 손을 집어넣으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다시는 노름을 할 수 없도록 팔을 아예 잘라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뭣하나 잘한 게 없는 할아버지로서는 순순히 작두날 아래 팔을 밀어 넣었다고 한다. 아무리 자식이 미워도 과연 아버지가 작두로 자식을 팔을 자를 수 있을까? 작두에 팔을 밀어 넣은 자식이 이겼고, 결국 작두날을 밟지 못한 아버지가 지고 만 것이다. 

<조견당의 아픈 역사를 증거하는 작두>


 바쁜 농사철이 지나고 농한기가 되면 충주나 제천 등 인근 지역에서 촌부자들을 노리는 소위 ‘야마시꾼’이 몰려들었다. 순진한 부잣집 아들 우리 할아버지는 그들의 꼬임새에 빠져 아까운 전답을 수 천 평, 수 만 평 잃는 일을 반복하다가 일찍이 4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그 사이 뒤주에 갇혔다가 다시 나오는 일을 반복하였음은 물론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한 많은 삶을 마감한 것처럼 우리 할아버지도 세상에 태어나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도 못하고 그렇게 집안에 걱정만 끼치다 돌아가셨다.  

김주태
◆ 약 력 ◆ 

MBC 미디어사업본부 재직   

영월 주천 고택 조견당(강원도문화재자료 제71호) 소유자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이사



 News & Company

법인명 : 주식회사 리몽 | LEEMONG corp.

등록번호 : 강원 아00093 |  발행일자 : 2011. 9. 5

발행인 :  이원석 | 편집인 : 이진경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미 기사배열 책임자 : 이원석

[25464]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강릉선교장

63, Unjeong-gil, Gangneung-si, Gangwon-do,[25464] Republic of Korea

Email : kchnews@naver.com T : 02-733-5270 F : 02-6499-9911

 ⓒ문화유산신문 당사의 기사를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링크, 게재하거나 배포하실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19 KCHN All rights reserved. Hosting &  Powered by Leemong co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