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주태의 우리문화] 고택이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이유는



고택은 ‘오래된 집’이라는 뜻이다. 고택이 묵은 집, 오래된 집으로 남아있으려면 고택이 그 자리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디고, 버티고, 지탱해온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구조적으로 완벽해야 오래 간다. 모든 건축물의 기본이자 기초인 수직과 수평을 맞추지 못했다면 그 집은 오래가지 못한다. 기울어진 집, 한쪽으로 실린 집, 높낮이가 다른 집이 오래 못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집짓는 사람이 과도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주인의 눈을 피해 겉은 멀쩡하나 구조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자가 자주 발생해 집이 쉬 망가지는 사례도 있을 것이고, 또 집이 앉아있는 자리가 풍수해에 자주 노출되는, 이른바 ‘양택’의 자리로 바람직하지 않은 곳이라면 그 또한 집이 오래 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집 뒤에서 산사태가 난다거나, 장마로 물길이 새로 생기면서 집을 휩쓸고 지나가거나, 바닥에서 물이 나 집안에 습기가 많아서 목재가 썩고 곰팡이가 온 집안을 덮어 사람들이 질병으로 시달리다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집이 폐가가 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웬만하면 피할 수 있는 일이고, ‘풍수’에 ‘비보(秘補)’가 있듯이 어떤 방책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집이 오래 가려면 건축적인, 기능적인 문제 보다는 집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이, 그들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또 그들과의 관계나 연관성 못지않게 국가의 전란이나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 시대의 소용돌이, 어떤 정치권력자들의 캠페인성 구호와 그에 따른 일방적, 일시적, 싹쓸이식 구조개혁 등이 더욱 더 영향을 미친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궁궐의 전각이 불에 탔고, 수 백 년 내려온 사찰이 무자비하게 소실됐으며, 주택들은 또 얼마나 많이 훼손되고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졌는지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동학란 때도 그랬고, 좌익이 횡행하던 해방 후에 지리산 자락의 고택들도 무참하게 불탔으며, 6.25전쟁 때의 참화는 이루 다 필설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개량사업을 한답시고 멀쩡한 지붕을 다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갈아 덮던 때가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정치권력에 의한, 무능하고 무식한 공직자들에 들에 의한 행정적인 폐해조차 거론하자면 갑자기 현기증이 일 정도이다.


<구례 운조루>


 지리산 자락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고택 중에서 ‘운조루’라는 집이 있다. 문화류씨 집안으로 영조 때 ‘박호 장군’의 칭호를 받은 류이주 선생이 지은 아름다운 집이다. 해방 후 사상적으로 복잡하던 시대에, 남쪽의 좌익들이 공권력을 능가하던 그 때 지리산으로 숨어든 공비들에게는 고택과 고택의 주인들은 복수의 대상이자 없애버려야 할 공적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구례, 남원, 산청 등 지리산 자락의 하고 많은 고택들이 공비들의 무자비한 방화와 약탈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갈 때 운조루는 그 와중에서 살아남았다.


<구례 운조루 쌀통 '타인능해'>

 운조루에는 쌀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둥치를 잘라 그 속을 깎아 내 독처럼 만든 거대한 쌀통인데 이 쌀통이 운조루를 살린 것이다. 운조루 주인은 인근에 흉년이 들면 이 쌀통에 곡식을 그득 채우고 사방 30리 안에 배곯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가끔 그 통에 곡식이 남아있으면 ‘남들이 우리를 멀리하는 게 아니냐’며 며느리를 야단쳤다고 한다. 그 통에는 한문으로 ‘누구도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써 붙여 놓았는데, 없는 사람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주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 그 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지리산 공비들이 운조루 주인을 죽이고 운조루에 불을 지르러 내려왔지만 운조루의 곡식으로 연명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공비 지도자가 고민 끝에 다시 발길을 돌림으로써  운조루는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안동 임청각 군자정 사진제공=안동시청>


 안동시 낙동강 가에 ‘임청각’이라는 집이 있다. 낙동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한 이 집은 우리 근세사의 영욕이 그대로 투영돼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1910년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자 이 집의 주인이자 고성이씨 종손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번민의 나날을 보낸 끝에 안동지역 유생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뜻을 밝힌다. “이제 일본인의 세상이 되었다. 당장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독립의 씨앗이라도 뿌려야하지 않겠는가” 숙연해진 좌중을 향해 석주 선생은, “나는 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려하네. 자네들 가운데 내 뜻을 따를 사람이 있다면 함께 가서 독립운동을 하세” 이렇게 말하고는 임청각을 정리하고 아들과 손자까지 대동하고 간도를 향해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이 때 안동지역 유생 50여 가구가 석주 선생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하고 남부여대, 고난과 역경의 시련으로 자신들을 던지게 된다. 석주 선생은 이후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군자금이 모자라면 다시 안동으로 잠입해 인근 집안들이 ‘종갓집을 남에게 넘겨서야 되겠느냐’며 돈을 모아 다시 매입한 종가집인 임청각을 팔아가곤 하는 일을 도합 세 번이나 했다고 한다.  석주 선생은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간도지방을 무대로 하는 독립운동이 여의치 않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상하이로 옮기고 초대 국무령이 되어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풍찬노숙, 해방이 되었고 국가가 수립됐지만 임청각의 후손들은 여전히 국가나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채 아직도 임청각의 주인으로 자릴 잡지 못하고 있다. 다만, 최근 70여명 가까운 임청각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문중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임청각을 ‘종중소유’로 하기로 법원의 결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고택에 서려있는 역사의 일단을 운조루, 임청각 두 집안의 사례로 일별해 보았다. 운조루는 평소 주위에 배품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임청각 주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당대 지식인으로서, 지도자로서, 양식 있는 선각자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죽음도 마다않고 사지로 향하는 처연한 민족지도자의 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도 낙동강과 임청각 사이, 임청각 행랑이 있던 자리에는 일제에 의해 놓인 중앙선 철길이 그대로 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눈의 가시였던 석주 선생의 집은 그들의 바람대로 여전히 철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 임청각 지붕은 그래서 철가루가 날려 와 언제나 벌겋게 산화한 채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김주태 

◆ 약 력 ◆ 

MBC 미디어사업본부 재직   

영월 주천 고택 조견당(강원도문화재자료 제71호) 소유자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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