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신창석의 문화사색] 학교와 놀이터



누구나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순간들이 있다. 한 점의 풍경소리가 하릴없는 망상을 느닷없이 때릴 때,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하던 일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덧없이 느껴질 때, 까마득한 기억 속의 어느 얼굴이 눈앞의 얼굴들보다 더 또렷하게 나타날 때. 어린 날 놀기 바빠 수없이 오가던 골목길을 반백의 머리로 다시 걸을 때... 나도 그 아이들도 오간데 없고, 길만 남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길 끄트머리에 아스라이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뿌리들이 바위를 부둥켜 잡고 있는 언덕길을 오르면, 뒷산보다 더 오래된 듯한 정자가 쏘옥 지붕부터 내민다. 정자 앞 절벽에는 느티나무, 회나무, 이름 모를 고목들이 길쭉한 바위를 움켜잡고 있고, 매미들이 이 가지 저 가지 달라붙어 합창을 해댄다. 매미소리는 장단도 가락도 각양각색이지만, 여기저기서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진다. 간간히 이름 모를 벌레소리까지 끼어들다 보면, 이 보다 더 끊임없는 오케스트라도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리라. 

 그렇지만 매미소리도 늘 들리는 것은 아니다. 매미들의 오케스트라는 원래 들렸다 말았다 한다. 동무들과 무슨 놀이에 열중일 때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어쩌다 고개를 들면 한 번씩 세차게, 정겹게 때로는 짜증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때도 가끔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원래 그 정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들의 놀이터였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풍월(風月)을 읊으시던 곳이었다. 푸른 바람과 밝은 달의 시를 지으며 노시던 곳이었다. 글을 읽으며 공부하시던 곳이었다. 그 분들 중에 입신하신 분도 없고, 양명하신 분도 없으며, 출세하신 분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풍류를 아시던 분들이셨다.

  바람결을 타고 가끔 시 읊는 소리가 들려 올 뿐, 정자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이다. 대나무 숲 사이로 도포자락인지 하늘 조각인지 펄럭일 뿐, 기둥뿌리마저 썩어 거름이 되었다. 지금 정자터는 조그만 밭 한 떼기로 돌아가 있다.

 

 그러다 새로운 놀이터가 생겼다. 동네 한 가운데 지엄한 어르신들이 노시던 서당이 있었는데, 일 년인가 학교로 사용하게 되었다. 마을에 국민학교 분교를 다 짓기도 전이라, 우리 학년만 우선 동네 서당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서당의 방 두 칸은 교무실, 대청마루는 교실로 쓰게 되었다. 놀 시간이 무진장 많아졌다. 가느다란 다리로 십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니다 동네에 교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서당은 학교가 되었고, 학교는 이제 놀이터가 되었다. 정자도 물론 놀기 좋았지만, 정자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동네의 소와 돼지는 우리에서 놀고, 염소는 주로 개울가에서 놀고, 개와 닭은 마당에서 놀았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래도 품위 있게 대청마루에서 놀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책을 거두기 바쁘게 딱지를 꺼내 들었다. 아니면 소나무껍질로 자동차며 배를 만들며 놀았다. 대청마루는 시원하기도 하지만, 빨던 사탕을 떨어뜨려도 다시 날름 주워 먹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은행잎이나 꽃잎을 따다가 그림도 그려 넣고, 도화지에 붙이기도 하고, 책갈피에 끼우기도 했다. 빨갱이란 말이 금기시 된 동네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신명이 받치면 나무로 칼과 총을 만들어 뒷산으로 냅다 오르기도 했다. 놀이라 할 수 없을지는 모르나, 전쟁놀이도 무척 많이 한 것 같다. 신문지로 대감모자나 미군모자 접는 것도 그때 배웠다. 대감모자의 가운데를 접어 넣으면 뾰쪽한 미군모자가 되었다. 빳빳한 종이로 바람에 굴러가는 탱크를 만들기도 했다. 기학적으로 잘 짜인 마루장의 무늬를 따라 탱크를 입으로 불어대며 몰아가는 것도 그때 배웠다. 지난 달력을 뜯어 종이비행기 접는 것도 그때 배웠다. 대청 난간에 서서 비행기를 날리며, 하늘을 찢을 듯한 전투기 소리를 흉내 냈다. 형들은 잘 벌어진 회양목 가지를 화로에 구워 새총을 만들기도 했다. 실력 있는 애는 심지어 새총으로 참새를 잡기도 했다. 마당에 놀던 닭을 맞추다 혼나기도 했다. 신기에 가까웠다.  

  밤에도 학교에서 놀 때가 많았다. 담 너머로 “놀러가자” 소리가 들리면, 말할 것도 없이 학교로 모였다. 대청의 문짝들은 천장에 달려 있어서 늘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할 때는 공놀이도 많이 했다. 요즘 수많은 공놀이와는 좀 달랐다. 작은 고무공을 까마득한 대청 지붕에 던져 올려서 굴러 내려올 때 잡는 놀이다. 공이 어느 기와골을 타고 내려올지 모르니 눈이 빠르고 몸싸움을 잘해야 했다. 낮에는 민망하겠지만, 저녁이라 멀리 오줌싸기 놀이도 했다. 머슴애들이 서당 높은 축대에 늘어서서 오줌발을 마당 멀리 보내는 놀이였으니, 서로 기세가 대단했다. 용쓰는 법은 공부할 때보다 이때 배운 것 같다. 

 

 지금도 가끔 그 학교에서 놀던 때를 떠올리면, 온전히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 많은 길을 되돌아와 대청에 걸터앉으면, 문득 오늘의 내가 누구인지 실마리가 풀린다. 나는 그래도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는 확신이 서기 때문이다. 어린 날이지만 잠시나마 나는 '학교를 다녔다'. 나의 자식이나 이 땅의 차세대에게는 학교 다닐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알고 보니 ‘학교’란 원래가 노는 곳이었다. 서당은 그냥 ‘책을 두는 집’이란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니던 서당건물은 엄연히 학교였다. ‘학교’는 영어로 스쿨(school)이요, 독일어로는 슐레(Schule)요, 불어로는 에콜(ecole)이다. 이들 명칭은 모두 라틴어 스콜라(schola)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스콜라철학은 한마디로 학교철학 내지는 강단철학이라고도 부른다. 그럼 ‘스콜라(schola)’는 무슨 뜻일까? 스콜라는 희랍어 동사 스콜레(schole)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스콜레(schole)’는 한 마디로 ‘놀다’를 의미한다. 그러니 학교는 그리스문화부터 ‘노는 곳’이요, ‘놀이터’였다.

  그러나 ‘학교’는 개나 돼지처럼 막노는 곳도 아니요, 닭처럼 꽉 짜인 틀 안에서 노는 곳도 아니다. 학교는 노는 곳이지만, 품격을 가지고 질서 속에서 노는 곳이다. 학교라는 놀이터의 질서는 똑같은 것을 찍어내는 틀하고는 다르다.

  

 나는 놀이터의 기억으로 나 자신이 된다. 짧은 기간이나마 학교를 다녔다는 자존감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들의 아이들은 언제 자신이 되어 놀 수 있을까? 그들이 지금 학교에 다닌다고 말하기엔 죄스러울 뿐이다. 우리들의 아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품격을 가지고 질서 속에서 맘껏 놀 수 있는 어린 날이 되기를 꿈꾸어 본다. 

신창석 교수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청운동 성천댁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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