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중 정원가 예찬 16] 일본에 정원술을 전파한 백제 노자공(지기마려)



  한·중·일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오랜 기간 동안 서로 문화적 영향을 끼쳐왔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문화권에 속했던 삼국은 중국의 대륙문화가 반도를 통해 일본열도까지 전파되는 구조 속에서 각기 다른 문화를 형성했다. 한국은 중국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였으나 나름의 독자성을 키워왔다. 일본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고 일찍이 삼국 중 서양의 문물을 가장 먼저 수용하여 근대 국가를 형성하였다. 특히 삼국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상적 경향 속에 문화가 발달했는데 산수의 경치를 축경식으로 공간화하고 그 안에 동양의 심미적 상징성을 부여하는 독특한 공간조성 방식은 동아시아의 정원문화가 차별화되는데 일조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정원술은 일찍부터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정원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일본에 정원술을 전파한 나라가 우리 백제라는 사실 또한 아는 이가 적다. 이는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역사적으로 한국의 정원술이 알려질 기회가 많지 않았고 자연과 조화되고 단순미를 추구하는 정원술의 특성상 부각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한국정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연재에서는 두 번째 기고 때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백제 시대 일본에 전파된 정원술과 인물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밝혀두고자 한다.


<일본서기>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조경사 관련 책을 보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백제에서 온 노자공이 산악의 생김새를 본떠 석가산을 만들었으며 이러한 기술로 궁실 남쪽 정원에 수미산과 오교를 만들었다는 기록만을 언급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본에 정원술이 전해지던 당시의 정황과 구체적 영향관계 등을 다루는 책자는 거의 없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일제강점기와 독도 영토분쟁까지 얽히면서 이제는 먼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일본은 우리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처지였다. 

 백제의 정원술이 일본에 전해진 시기는 아스카시대이다. 원래 아스카(飛鳥)지역은 나라(奈良)분지의 동남쪽 외진 곳에 있었는데 서북쪽으로 트인 요해(要害)의 땅이었다. 5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걸쳐 이 아스카지역에는 조선반도를 경유해 여러 문화가 들어왔다. 수많은 도래인이 살게 되고 귀족의 저택이나 사원도 여기에 만들어졌다. 귀족들도 정원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 시기이다. 노자공, 일본 이름 시기마로는 이때에 백제에서 일본에 도래한 인물로 보여진다. 《일본서기》에도 노자공 이외의 반도출신 도래자와 그들이 전파한 문화가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이들의 역할과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추고 천황>


 스이코(推古) 천황 20년(612, 무왕 13)에 노자공이 도래 당시 백라병을 앓고 있어 사람들이 꺼려했으나 그가 가진 정원술을 인정하여 남정에 수미산과 오교를 축조하게 하였다. 스이코(推古) 천황은 스이코(推古) 12년(603)에 풍포궁(豊浦宮)에서 소간전궁(小墾田宮)으로 옮기고 여기에서 20년간을 지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남문을 들어가면 거기가 조정이고, 조정에는 대신들이 정무를 행하는 청(庁), 조당(朝堂)이 몇 개 있으며, 조정의 안쪽에는 대문이 있고 그곳을 들어가면 천황이 생활하는 대전이 있었다고 한다. 

 수미산(須弥山)은 불교의 성산(聖山)이기 때문에 불교의 세계를 상징한 축산(築山·정원에 돌이나 흙 등을 쌓아서 산처럼 만든 곳)을 중요시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吳)는 중국 강남지방으로, 그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아치식의 석교(石橋)였을지도 모르지만 구체적인 석교(石橋)는 아직 발견 되지 않았다. 소간전궁(小墾田宮) 추정지의 고궁유적에서는 굴립주(掘立柱) 외에 도랑이나 타원형상의 작은 연못이 출토 되었다(니시 카츠라,2004). 수미산석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모두 네 차례 등장하는데 그 최초의 기록이 백제출신 노자공의 축조기록이다. 수미산은 옥외에 설치된 정원의 경물 역할을 한 중요한 시설로 주연이나 향연을 위한 행사 시 매우 중요하게 활용된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존 카터 코벨은 노자공에 의해 수미산의 모형과 오교가 만들어진 사실은 일본 정원문화에 끼친 영향을 공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일 뿐 아니라 일본 정원술의 효시가 백제, 즉 한반도임을 알려준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안계복 교수는 수미산 석조와 부여 발굴 백제금동대향로의 외부 문양과의 관계성을 제기하여 백제 전파설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아스카(飛鳥)시대의 정원 디자인은 스이코(推古) 천황 이후,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신라와 국교를 회복한 텐치(天智) 천황 7년(668) 이후는 신라로부터의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이 일본 내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타국에서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나는 산악의 형태를 만들 수 있다”고 당당히 밝힐 정도로 노자공의 정원술은 뛰어났으며 당시 백제 시대 정원술 또한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노자공이 선보인 수미산과 오교의 공간은 본격적인 일본정원의 시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한국의 정원양식을 일본에 전파한 최초의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참고문헌>

《일본서기(日本書紀)》

이규완(2010), 백제 노자공이 조성한 수미산에 관한 연구-일본 석신 유적에서 발굴된 수미산석을 중심으로-,한국조경학회지,38(5)상

니시 가츠라(2004), 《일본의 정원문화》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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