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중 정원가 예찬 18] 중국원림의 풍격을 높인 원림문학의 창시자, 소동파편



‘당시송사(唐詩宋詞)’라는 말이 대변해 주듯이 송대(宋代)는 중국 역사상 시사화(詩詞畵)의 전성기였으며 원림문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 중 하나이다. 당대(唐代)를 통해 기술적인 면에서 완숙해진 송대의 원림은 황실과 사가원림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공공공간의 수목녹화 등이 유행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대부들은 산수시(山水詩) 산수화(山水畵)의 창작활동을 선비의 기본 덕목으로 여기고 유원(游園), 아집(雅集)등 원림 내 활동을 통해 이를 실천하였다. 따라서 시문의 주제는 유교사상, 자연만물  그리고 정대누당기(亭臺樓堂記)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이시기에 유행했던 기유시(紀游詩), 연집시(宴集詩) 또는 기유남승(紀游覽勝)에 관한 시는 중국 고전원림(古典園林)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동안 책자의 지면을 통해 펼치던 평면적 시문활동은 점차 외부공간에서 공간감을 갖기 시작하여 시화(詩畵)의 내용을 원림이라는 공간에 도입하여 완성하게 된다 (“以畫設景,以景入畫,寓情於景,寓意於形,以情立意,以形傳神”). 시문활동에 능통한 사대부의 원림설계와 원림조성 및 경영방식은 기존의 원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별 구성과 특색을 반영하기에 이른다.
 특히 송대 사마광과 더불어 원림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소동파로 더 잘 알려진 소식(蘇軾)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고 화려함이 극에 달아 천박함을 경계하였으며 실생활 가운데 느끼는 소소한 감정에 충실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는 과장되고 기교로 변형된 원림이 아닌 원림 본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동파는 원림의 조영뿐 아니라 원림문학(園林文學) 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하여 원림과 경관의 미를 예술로서 표출하고자 하였다.


<소식>


  소식(蘇軾, 1101~1037)의 자는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며 별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로써 흔히 소동파(蘇東坡) 혹은 소선(蘇旋) 이라 불리었다. 한족으로 북송시기 인물로서 眉州眉山(현 사천성 미산시) 출신이다. 북송의 저명한 문학가 서법가(書法家)이자 화가이다. 당나라 초기 대신인 정치가 소미도(蘇味道)의 후손으로서 부친인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로 불리우며 당송 8대 문인으로 일컬어진다. 1057년(嘉祐二年) 진사에 합격하여 조정에 입문한 후 신종(神宗) 집권시절 은사 구양수 사마광과 더불어 조세수탈의 일환인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밀주 여주 호주 등을 두루 돌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철종 때 이르러서는 한림학사를 역임한 후 강남의 항주와 의주를 거쳐 예부의 상서에까지 올랐고, 다양한 주제와 독특한 풍격의 시문을 창작하였으며 약 2,700여수의 시문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붕당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식은 1079년(元豊二年) 오대시안(烏臺詩案: 붕당에 깊이 관여한 소식의 상소문으로부터 기인한 사건, 烏臺는 소식을 심문한 어사대 내 식재된 측백 상부에 위치한 까마귀 둥지에서 유래된 어사대의 속칭) 사건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혀 사형에 처하게 되나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사대부 불살정책(不殺政策)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설당>


 이후 소식은 조정을 떠나 1081년 황주성 동편 비탈진(東坡) 곳의 0.67ha의 황무지를 구입 개간 한 후 원림을 조영하고 거주하게 된다. 그의 별호인 동파거사는 바로 이곳의 위치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작품 ‘설당기(雪堂記)’에는 이곳 원림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蘇子得廢圃於東坡之脅,築而垣之,作堂焉,號其正曰'雪堂'。堂以大雪中為之,因繪雪於四壁之間,…… :설당대 에는 다리가 놓여 있으며 설당의 동편에는 키가 큰 버드나무 한주가 식재되었고 그 너머에는 맑고 깨끗한 냉천이 있어 그 물길이 동쪽을 향해 낮은 농경지와 과원에 이른다, 초당의 뒷편에는 원경정(遠景亭)을 두어 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조영 하였다). 

 설당은 기존의 사가 원림의 경관연출기법과는 다르게 최소한으로 경물을 배치하여 소박한 형태로서 가난한 선비의 안빈낙도의 삶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동파는 이곳에서 다양한 문인들과 교류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특히 설당 동편 담장에는 이곳 생활에 대한 그의 심경과 사상을 표현한 시문이 전하고 있다. 1085년 송(宋) 철종 즉위 후 사마광이 다시 재상에 오르게 되고 소식 또한 조정에 복귀하게 된다. 1089년(元祐四年) 소식은 龍圖閣學士를 역임하고 항주를 관할하게 된다. 관아는 항주의 중심에 위치하며 한벽헌(寒碧軒)과 우기당(雨奇堂) 등이 관아 주변에 조영되어 있다.
 우기당의 당호는 동파의 서호시(西湖詩)에서 차용한 것으로 주변은 길게 잘 자란 대나무가 두르고 있으며 정자 너머의 맑고 깨끗한 계곡을 바라볼 수 있도록 조영되었다. 항주는 가뭄과 장마가 빈번하여 아름답기로 소문난 서호(西湖)는 이로 인해 진흙이 쌓이거나 수로가 막히곤 하였다. 동파는 항주 재임 기간 항주 부임 전 공적을 인정받아 황제로 부터 하사받은 황금으로 20만명의 수리공들을 직접 모집하여 전면적으로 서호를 준설하고 서호에 퇴적된 진흙과 식물의 줄기 및 뿌리 등을 파내는 등 서호 수역을 정비하고 호수의 남쪽에서 북쪽을 가로 지르는 긴 제방을 축조하는 한편 상부에 양쪽 호안을 잇는 6개의 연결 다리인 공교(拱橋)를 설치하였다(“我在錢塘拓湖綠,大堤士女爭昌豐。六橋橫絕天漢上,北山始與南山通。忽驚二十五萬丈,老薪席捲蒼煙空”). 이 공사로 인하여 서호는 지금과 같은 형태를 유지할 수 있기 된것이다. 이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공공조경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이 제방을 두고 중국인들은 소제(蘇堤)라 부른다.

<서원아집도>


영벽장씨원정기

<영벽장씨원정기>


소식은 다양한 원림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 중 ‘원림문학(園林文學)’이라는 새로운 창작형태를 통하여 중국 고전원림의 매력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인예술가들과의 다양한 형태의 모임을 원림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행하였으며 이를 詩詞畵로 표현하였다. 원림 내 각종 수목을 시로서 표현하였으며, 정대누각(亭臺樓閣)과 대나무와 원림에 대하여 대량의 詩와 詞를 남겼다. 원림에 관한 소식의 작품은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영벽장씨원정기:靈璧張氏園亭記》, 《희우정기:喜雨亭記》, 《방학정기:放鶴亭記》, 《기유송풍정:記遊松風亭》, 《연정가임정:宴鄭家林亭》 등이 있으며, 그 중《靈璧張氏園亭記》는 구양수의《취옹정기:醉翁亭記》 왕안석의 《유포선산기:遊褒禪山記》와 더불어 원림문학을 대표한다. 흔히 중국인들은 이격비의 낙양명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식의 《靈璧張氏園亭記》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소식과 왕안석 사마광 등 북송시대의 수많은 문인들의 원림 조영과 발전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면 현재의 중국의 미학은 단지 지면 속에 갇힌 채 그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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