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신창석의 문화사색] 엿장수와 공정의 원리



그 옛날 깊은 산골짝 마을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아침마다 황소와 일꾼들은 워이워이 들로 나서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저녁연기가 나란히 피어올랐다.   양지 바른 골목에는 이름 없는 어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눕히고 늘 그 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겹겹이 늘어선 산마루 위로 늘 까마득한 하늘이 그렇게 떠있었다. 어쩌다 비행기 소리라도 들리면 따라 잡을 듯이 달려가 보고, 남겨둔 비행기구름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동산에 넘어져 구름이 곰에서 토끼로, 막대사탕으로 변하다가 끝내 보고 싶은 얼굴 되어 흩어지면 그게 다 별 것 아니었다고 상상의 나래를 접었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늘 그랬다. 새벽부터 떼로 몰려다니는 참새들의 바쁜 소리, 가끔씩 개 짖는 소리, 매라도 뜨면 다급해진 장닭이 병아리들에게 보내는 신음 같은 깊은 소리, 아랑곳 하지 않고 적막한 마당의 존재감을 일깨우는 외양간의 쇠풍경 소리, 밥풀 묻은 감자 몇 개 삶아놓고 밥 먹으라고, 밥 먹으라고 아이들 부르는 엄마 소리. 그러다 동네 아이들을 모이게 하는 소리는 엿장수 가위 소리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들려오는 날카로운 쇳소리라 먹이에 길든 강아지 마냥 우리 입 안에는 침이 먼저 고였다. 

 

 콜라병, 소주병, 찌그러진 놋그릇, 비료포대, 말린 고추나 고추씨, 내년에 심을 강냉이 씨앗도 엿으로 바꾸어 먹었다. 그뿐이랴. 철지난 만화책이나 잡지들, 부서진 라디오, 찢어진 고무신, 부러진 호미자루, 양철통, 구멍 난 양재기, 어디 쓰이던 것인지도 모르는 쇠 동가리나 주워 모은 탄피는 엿을 많이 쳐주었지만, 당시 철물은 너무 귀했다. 그래서 개밥그릇도 단골 고물로 변신했었다. 엿을 바꾸어 먹어도 어느 샌가 또 그 자리에 놓여 있었으니까. 옛날 동전은 엿을 제일 많이 쳐주는 거의 귀중품이었다. 삐딱 숟가락, 이건 한 쪽이 심하게 닳아빠져 날카롭기 짝이 없는 놋숟가락인데, 감자나 무를 깎을 때 쓰는 소중한 주방도구인 줄 몰랐다.

 온 동네 오만가지 잡동사니도 엿장수 손에 가면 가지런히 정리되었다. 엿장수 맘대로 집어던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엿판 밑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자루가 있었다. 종이자루, 쇠붙이 자루, 병 자루, 고무 자루 그리고 한 쪽 구석으로는 귀중품 자루나 큰 물건을 거는 못이 빽빽이 박혀 있었다. 요즘은 엿가위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이 시대의 잉여물들은 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일까. 가끔 잘 정리된 분리수거 봉투를 보면 그나마 엿장수의 리어카가 떠오른다.

 

 그날도 엿가위 소리에 그 마루 밑에 뒹굴던 병 몇 개를 들고 엿 바꿔 먹으러 갔다. 동생도 잽싸게 따라 나왔다. 그날은 엿가락을 달라고 했다. 엿판도 있었지만, 엿장수 맘대로 툭 잘라주는 것이라 무언가 손해 보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가락엿은 제법 굴고 길쭉해서 우리 눈동자가 커질 대로 커졌다. 

 그 순간 어김없이 옆집 형이 나타났다. 나중에 커서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읽어보니, 꼭 싱클레어를 교묘하게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F.Kromer) 같은 형이었다.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도 그랬다. 내가 엿을 부러뜨려 한 쪽을 동생에게 주려는데 그 형이 말했다. “이쪽이 더 길지 않나? 내가 똑같이 나눠줄게.” 그러면서 엿 두 동강이를 빼앗아 길이를 재었다. 조금 더 긴 쪽을 약간 부러뜨려 자기 입에 집어넣었다. 다시 재어보니 다른 쪽이 더 길었다. 이번엔 그 쪽을 부러뜨려 또 자기 입에 낼름 집어넣었다. 몇 번 더 하니까, 드디어 동생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손때도 잔뜩 묻었지만, 양쪽 다 너무 짧아졌기 때문이다. 

 우린 둘 다 한 입도 먹지 못했고, 그리고 공평했다. 나는 괜히 엿가락을 달라고 한 것을 후회했다. 엿판에서 엿장수 맘대로 툭툭 잘라 주는 엿을 받았더라면, 크든 작든 맛이라도 봤을 텐데... 

 

 똑같이 나누고 싶은 심리 자체가 이미 탐욕의 출발이 아닐까? 분배의 심리에서 공정의 원리가 개발되고, 공정의 원리에서 착취의 수단이 발달하는 것은 아닐까? 칼 마르크스도, 스탈린도 김일성도 어쩌면 엿 바꾸어 먹으러 갔다가 크로머같은 동네 형한테서 공정의 원리를 배운 것은 아닐까? 이미 똑같이 일한다는 것은 이상이요, 똑같이 나누어주겠다는 것은 착취이다. 공정의 이데아(idea)는 피안에나 존재할 수 있을 뿐이고, 거기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인간이 땀 흘려 일하고 쉬고, 다투고 사랑하고, 함께 살며 나눌 수밖에 없는 이 엄연한 현실에는 고단한 엿장수가 가위를 찰깍이며 지나다닐 뿐이다. 엿장수는 골목의 잉여물을 그야말로 맘대로 거둬갈 뿐이다. 

 엿장수의 리어카 속에서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고물들이 맘대로 정리될 뿐이다. 엿장수는 공정하게 분배하는 자가 아니라, 복잡한 삶의 잉여물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재생의 기회를 줄 뿐이다. 인생의 잉여물이라도 잘 거둬들이고 재생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공정이 아닐까. 남을 것이 없는 빡빡한 현실에서 남아도는 인생의 오만, 허세, 고독, 권태, 우울을 거둬들여 엿으로 바꿔주는 엿장수가 있다면, 그야말로 정신없는 현대의 골목에서는 공정한 원리일 것이다. 버릴지언정 나눌 줄 모르는 오늘의 골목에서는 맘대로 하는 엿장수가 그립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약 력 ◆ 

*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청운동 성천댁 소유자

*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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