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한 달 동안 한반도는 광복70주년 관련 기념행사들로 정부에서부터 방송언론 민간단체에 이르기까지 야단법석을 떨었다. 엉덩이 뒤살이 훤히 노출되는 반바지와 일본문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허리를 출렁이며 온갖 기괴한 춤판을 편 십대 가무재능아이돌들의 무대공연들과 면티셔츠를 입고 국민대합창단원들 사이에 끼어 노래를 부른 정치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이번 정부주도 광복70주년 행사는 한 마디로 광복절의 역사적 주체와 의미 그리고 그 내용에 함축된 핵심 본질이 전적으로 결여된 미완적인 행사라 할 수 있겠다.
광복절(光復節)은 본래 대한제국 광무태황제(光武太皇帝)의 자주독립의지와 부국강병 그리고 문명개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1907년 왜구 이등박문과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친일역적매국노들의 농간으로 강제퇴위 되시기까지 광무태황제께서는 ‘1906년 1월 29일 국서’,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특별고문에게 보낸 친서’, ‘1906년 6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그리고 ‘1907년 4월 20일 헤이그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위임장’에 1905년 ‘제2차한일협약’(을사늑약)의 부당성과 무효성을 대내외에 천명하셨고 또한 자신의 자주독립투쟁의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특히 1914년 이상설(李相卨, 1871~1917)을 중심으로 설립된 ‘대한광복군정부’는 황제친위대들의 충성심에 기반을 둔 독립전투특공대로 주된 전략목적은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강제 퇴위 되신 대한제국 광무태황제의 정치-외교적인 권위의 온전한 복권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유로 광복군의 수장이 되시는 태황제께서는 자신의 연호와 자주독립정신을 계승한 ‘대한광복군정부’의 항일구국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셨고,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에 의해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에 독립투쟁의지를 담은 가사를 편집하시여 대한광복군정부에 ‘독립군가’와 '항일독립가요'로 사용토록 하사하셨다. 이는 광복군이 대한제국의 역사-문화적 정통성과 광무태황제의 대한제국건국선포정신을 공식적으로 계승한 황제친위정부군임을 확증하신 예라 할 수 있겠다.
‘대한제국 애국가’와 ‘독립군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셔
성수무강(聖壽無彊) 하샤
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갓치 싸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寰瀛)에 딸치샤
어천만세(於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 하소셔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셔
‘독립군가’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大韓)을 도으소서
독립부강하여 태극기를 빛나게 하옵시고
권(權)이 환연에 떨치여
어천만봉에 자유가 영구케 하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大韓)을 도으소서.

프란츠 에케르트와 대한제국 애국가의 표지(남궁요열 제공) 사진제공 네이버
광무태황제께서는 이런 간접적인 독립활동의 한계를 인식하시고 1914년 이상설과 1918년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계획 아래 중국에 망명하시여 적극적인 항일구국독립투쟁을 주도하려 하셨다. 이 망명계획을 첩보한 왜구역적매국노들은 태황제의 망명을 저지하고 광복군정부의 독립투쟁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암살을 계획했고, 결국 황제께서는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 독이 든 음료를 식음하시어 독살되시고 말았다. 태황제의 억울한 독살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백성들의 공분을 야기했고 이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왜구역적매국노들이 광무태황제의 중국망명에 두려움을 갖고 이런 잔악한 악행을 저지른 이유 중의 하나는 ‘대한광복군정부’의 구국독립투쟁의 중심에 태황제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결국 태황제 암살은 국내외의 독립투쟁활동에 구심점을 제거하고 대한국을 영구적으로 식민 통지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정규군과 1946년 대한민국국군의 모체가 된 대한광복군정부와 국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의 구국항일독립투쟁들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궁극적으로 광무태황제의 적극적인 자주독립정신과 항일투쟁활동에 그 근본적인 뿌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정부가 주도했던 이번 광복70주년 기념행사는 이 본질과는 거리가 먼 온갖 종류의 이벤트적인 가무문화공연행사형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내년 71주년 광복절부터라도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어 삭제된 대한제국 광무태황제의 자주독립정신과 항일구국독립투쟁활동들이 일반 국민들에게 객관적으로 소개되고 교육되어 광복절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와 그 사실들이 가시적이며 구체적으로 목격되어져야 한다.
더불어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왜곡되고 핍박받아 해체된 대한황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 권위회복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에 따른 제도적인 예우지원이 뒷받침되어져야 한다. 이로서 왜곡된 식민역사의 잔재들과 그로 인한 고통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청산되고 치유될 수 있게 되어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은 황실을 보유한 자부심 넘치는 품격 있는 세계시민들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김영관 (PhD., McGill)
사단법인 한국효문화원 원장,
대한황실문화원 문화재환수위 연구위원/
해외왕실교류위 수석위원,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방문연구 교수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종교철학 교수
지난 8월 한 달 동안 한반도는 광복70주년 관련 기념행사들로 정부에서부터 방송언론 민간단체에 이르기까지 야단법석을 떨었다. 엉덩이 뒤살이 훤히 노출되는 반바지와 일본문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허리를 출렁이며 온갖 기괴한 춤판을 편 십대 가무재능아이돌들의 무대공연들과 면티셔츠를 입고 국민대합창단원들 사이에 끼어 노래를 부른 정치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이번 정부주도 광복70주년 행사는 한 마디로 광복절의 역사적 주체와 의미 그리고 그 내용에 함축된 핵심 본질이 전적으로 결여된 미완적인 행사라 할 수 있겠다.
광복절(光復節)은 본래 대한제국 광무태황제(光武太皇帝)의 자주독립의지와 부국강병 그리고 문명개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1907년 왜구 이등박문과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친일역적매국노들의 농간으로 강제퇴위 되시기까지 광무태황제께서는 ‘1906년 1월 29일 국서’,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특별고문에게 보낸 친서’, ‘1906년 6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그리고 ‘1907년 4월 20일 헤이그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위임장’에 1905년 ‘제2차한일협약’(을사늑약)의 부당성과 무효성을 대내외에 천명하셨고 또한 자신의 자주독립투쟁의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특히 1914년 이상설(李相卨, 1871~1917)을 중심으로 설립된 ‘대한광복군정부’는 황제친위대들의 충성심에 기반을 둔 독립전투특공대로 주된 전략목적은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강제 퇴위 되신 대한제국 광무태황제의 정치-외교적인 권위의 온전한 복권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이유로 광복군의 수장이 되시는 태황제께서는 자신의 연호와 자주독립정신을 계승한 ‘대한광복군정부’의 항일구국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셨고,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에 의해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에 독립투쟁의지를 담은 가사를 편집하시여 대한광복군정부에 ‘독립군가’와 '항일독립가요'로 사용토록 하사하셨다. 이는 광복군이 대한제국의 역사-문화적 정통성과 광무태황제의 대한제국건국선포정신을 공식적으로 계승한 황제친위정부군임을 확증하신 예라 할 수 있겠다.
‘대한제국 애국가’와 ‘독립군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셔
성수무강(聖壽無彊) 하샤
해옥주(海屋籌)를 산(山)갓치 싸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寰瀛)에 딸치샤
어천만세(於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 하소셔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皇帝)를 도으소셔
‘독립군가’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大韓)을 도으소서
독립부강하여 태극기를 빛나게 하옵시고
권(權)이 환연에 떨치여
어천만봉에 자유가 영구케 하소서
상제(上帝)는 우리 대한(大韓)을 도으소서.
프란츠 에케르트와 대한제국 애국가의 표지(남궁요열 제공) 사진제공 네이버
광무태황제께서는 이런 간접적인 독립활동의 한계를 인식하시고 1914년 이상설과 1918년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계획 아래 중국에 망명하시여 적극적인 항일구국독립투쟁을 주도하려 하셨다. 이 망명계획을 첩보한 왜구역적매국노들은 태황제의 망명을 저지하고 광복군정부의 독립투쟁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암살을 계획했고, 결국 황제께서는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 독이 든 음료를 식음하시어 독살되시고 말았다. 태황제의 억울한 독살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백성들의 공분을 야기했고 이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왜구역적매국노들이 광무태황제의 중국망명에 두려움을 갖고 이런 잔악한 악행을 저지른 이유 중의 하나는 ‘대한광복군정부’의 구국독립투쟁의 중심에 태황제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결국 태황제 암살은 국내외의 독립투쟁활동에 구심점을 제거하고 대한국을 영구적으로 식민 통지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정규군과 1946년 대한민국국군의 모체가 된 대한광복군정부와 국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의 구국항일독립투쟁들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궁극적으로 광무태황제의 적극적인 자주독립정신과 항일투쟁활동에 그 근본적인 뿌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정부가 주도했던 이번 광복70주년 기념행사는 이 본질과는 거리가 먼 온갖 종류의 이벤트적인 가무문화공연행사형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내년 71주년 광복절부터라도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어 삭제된 대한제국 광무태황제의 자주독립정신과 항일구국독립투쟁활동들이 일반 국민들에게 객관적으로 소개되고 교육되어 광복절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와 그 사실들이 가시적이며 구체적으로 목격되어져야 한다.
더불어 왜구역적매국노들에 의해 왜곡되고 핍박받아 해체된 대한황실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 권위회복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에 따른 제도적인 예우지원이 뒷받침되어져야 한다. 이로서 왜곡된 식민역사의 잔재들과 그로 인한 고통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청산되고 치유될 수 있게 되어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은 황실을 보유한 자부심 넘치는 품격 있는 세계시민들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김영관 (PhD., McGill)
사단법인 한국효문화원 원장,
대한황실문화원 문화재환수위 연구위원/
해외왕실교류위 수석위원,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방문연구 교수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종교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