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융성했던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당조(唐朝)는 유교, 도교, 불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과 문화적 개방성 및 포용력이 공존하던 시기인 동시에 대외적 교류가 활발하여 타 문화의 유입 및 전파가 이루어 졌다. 특히 불교와 도교는 집권층의 비호속에 민간에까지 널리 유행하며 문학, 예술, 원림 등 사회전반에 걸쳐 그 영향을 미치며 발전하였다.
진한(秦漢)시대의 맥을 이어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황가원림이 조성되었으며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였다. 조원은 기존의 구성에서 탈피하여 가산, 지당 등 원림 내 건축물의 수량을 현저하게 줄여 수묵화적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민간에 이르기까지 조원 활동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백거이 초상>
시인 왕유를 비롯한 문인들은 시의 창작 활동뿐 아니라 활발한 조원활동, 즉 “詩中有畵, 花中有詩”를 통하여 원림예술과 문학예술을 융합하였다. 문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심미관에 따라 원림공간을 조성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남부지역 일대에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조원 활동에 있어 천재적 심미관을 지닌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백거이(白居易, 772~846)이다.
백거이는 당대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이며 흔히 그를 시마(詩魔) 혹은 시왕(詩王)이라 불렀다. 그는 활발한 조원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원림을 시(詩)로서 형상화 하였고 자신의 이상향을 현실의 정원에 투영하는 등 시의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 또한 다양했다.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불리었으며 신정현(河南新鄭縣)에서 출생하였다. 백거이는 곤궁한 집안 형편으로 12세에 집을 떠나 교육을 받았으며, 28세(800년) 때 진사에 올라 미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郎: 국가 전문 장서관리 직책)을 역임한 후, 807년에 한림학사에 오르는 등 이후 여러 직책에 임관된다.
많은 문인들이 그러했듯이 당조(唐朝) 중기부터 군웅할거(群雄割據)와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하여 백거이 또한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펼치지 못한 채 점차 현실도피적 생활방식을 택하게 된다. 젊은 시절,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 부패한 정치권과 혼란한 사회상황에 환멸을 느끼며 “穷则独善其身,达则兼济天下”《孟子·尽心上》의 생활태도를 보이며 전원적 생활, 조원과 관련한 창작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백거이는 《長恨歌:장한가》, 《賣炭翁:메탄옹》, 《琵琶行:비파행》등을 통해 당시 민중의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였으며, 《白氏長慶集: 백씨장경집》혹은 《白氏文集》을 통하여 조원(造園) 구성 원리 및 다양한 내용을 집필하였고, 이 문집은 남송(南宋) 소흥(紹興,1130-1161)시기의 각본으로서 약36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백씨문집에는 40여종이 넘는 화목을 언급하며 원림 내 화목배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백거이는 중국문학사에 위대한 공헌을 했으며 조원분야에서도 기나 긴 중국의 조원역사에 영향을 미친 원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자연의 미를 언어로 형상화 한 후 이를 그의 생활과 결합하여 실천적으로 형성하고, 체득하여 예술의 경계를 뛰어 넘었다. 또한 고대 문인들의 4대 예술(서법, 회화, 건축, 조원) 중 하나인 원림 조성을 통하여 유교, 도교 및 불교의 선종을 융합하여 당시 문인들이 꿈꾸던 이상세계를 자신의 원림에 실현하였으며, 시를 통하여 원림에 미학적 사상을 표현하였다. 백거이의 초당기(草堂記), 지상편(池上篇), 냉천정기(冷泉亭記), 태호석기(太湖石記) 등의 산문 및 시를 살펴보면 그의 원림관, 품석이론(品石理論: 돌을 품평함)등 원림 구성 요소에 관한 조성원리 및 심미관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自題小園》에서 원림의 가치는 크기와 화려함에 있지 않으며 우아한 정취를 자아내며 돌과 작은 지당이 있고 작은 원림에는 동물과 수목이 있어 벗과 더불어 야회를 하며 자족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 있는 원림이라고 주장하며 (不斗門館華,不鬥林園大。…..,主人安在哉,富貴去不回。池乃為魚鑿,林乃為禽栽。何如小園主,拄杖閒即來。親賓有時會,琴酒連夜開。以此聊自足,不羨大池台) 실제 원림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조영하여 세상에 보였다.
그가 조영한 원림은 위상별서(渭上別墅: 섬서위남), 여산초당(廬山草堂:여산동림사), 동파풍경림(東坡風景林:충주 충현), 신창방택원(新昌坊宅園:장안), 이도방택원(履道坊宅園:낙양), 항주서호백공제(杭州西湖白公堤:항주)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들에도 각 원림의 구성원리, 품격, 구성요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중 백거이의 작품에 가장 많이 묘사되고 그 자신이 애착을 가진 정원은 여산의 초당과 이도리(履道里)의 원림이라 할 수 있다.
817년 조성된 ‘여산초당’은 여산의 동림사 옆 협곡에 소박한 별서원림을 조성하고 협곡의 맑은 물을 도입하여 작은 지당을 조성하였다. 또한 송죽(松竹)을 주변에 둘러 식재 한 후, 차경기법을 도입하여 사찰과 산 전체를 자신의 원림의 일부로 끌어들여 동양원림의 근간을 이루는 ‘天人合一’기법을 완성하였다.

<이도방택원>
이도방택원은 백거이가 낙양으로 돌아와 은거할 때 낙양 이도리(履道里)의 오래된 주택을 구입하여 조성한 것으로 송대 이격비가 자신의 작품《洛陽名園記》에 수록할 정도로 그 완성도와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컸다. 이도방택원은 중심에 작은 지당을 파고 그 흙을 이용하여 작은 섬을 만들고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연결하였다. 섬에는 대를 건축하고 지당에는 .백색 연꽃과 마름풀을 재배하여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池上篇》.
일본의 계리궁(桂離宮)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낙천의 조원기법은 838년 일본 평안시대에 전해져 실정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조원학자들의 원림 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본은 백거이의 자연에 순응하는 조원 방식을 따라 작은 규모와 소박한 형태의 고요하고 심원한 경지의 원림을 추구하였고, 또한 오랜 세월 일본 고유의 문화와의 융합을 통하여 지금의 독특한 일본만의 문화와 원림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백낙천은 《도덕경(道德經)》의 小隱, 中隱, 大隱을 통해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대부의 생활태도를 언급하였고, 혼란한 시대에 정치적으로 좌절된 자신의 이상을 小隱(세속을 피하고 정치적 권력을 피하여 산야에 묻혀 사는 삶)을 통해 이루었으며 이는 이후 문인의 은일사상에 정신적 기반을 이루었다.

신현실
북경대학교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
고대 중국의 융성했던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당조(唐朝)는 유교, 도교, 불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과 문화적 개방성 및 포용력이 공존하던 시기인 동시에 대외적 교류가 활발하여 타 문화의 유입 및 전파가 이루어 졌다. 특히 불교와 도교는 집권층의 비호속에 민간에까지 널리 유행하며 문학, 예술, 원림 등 사회전반에 걸쳐 그 영향을 미치며 발전하였다.
진한(秦漢)시대의 맥을 이어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황가원림이 조성되었으며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였다. 조원은 기존의 구성에서 탈피하여 가산, 지당 등 원림 내 건축물의 수량을 현저하게 줄여 수묵화적 분위기를 자아냈으며 민간에 이르기까지 조원 활동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백거이 초상>
시인 왕유를 비롯한 문인들은 시의 창작 활동뿐 아니라 활발한 조원활동, 즉 “詩中有畵, 花中有詩”를 통하여 원림예술과 문학예술을 융합하였다. 문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심미관에 따라 원림공간을 조성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남부지역 일대에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조원 활동에 있어 천재적 심미관을 지닌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백거이(白居易, 772~846)이다.
백거이는 당대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이며 흔히 그를 시마(詩魔) 혹은 시왕(詩王)이라 불렀다. 그는 활발한 조원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원림을 시(詩)로서 형상화 하였고 자신의 이상향을 현실의 정원에 투영하는 등 시의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 또한 다양했다.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불리었으며 신정현(河南新鄭縣)에서 출생하였다. 백거이는 곤궁한 집안 형편으로 12세에 집을 떠나 교육을 받았으며, 28세(800년) 때 진사에 올라 미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郎: 국가 전문 장서관리 직책)을 역임한 후, 807년에 한림학사에 오르는 등 이후 여러 직책에 임관된다.
많은 문인들이 그러했듯이 당조(唐朝) 중기부터 군웅할거(群雄割據)와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하여 백거이 또한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펼치지 못한 채 점차 현실도피적 생활방식을 택하게 된다. 젊은 시절,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에 부패한 정치권과 혼란한 사회상황에 환멸을 느끼며 “穷则独善其身,达则兼济天下”《孟子·尽心上》의 생활태도를 보이며 전원적 생활, 조원과 관련한 창작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백거이는 《長恨歌:장한가》, 《賣炭翁:메탄옹》, 《琵琶行:비파행》등을 통해 당시 민중의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였으며, 《白氏長慶集: 백씨장경집》혹은 《白氏文集》을 통하여 조원(造園) 구성 원리 및 다양한 내용을 집필하였고, 이 문집은 남송(南宋) 소흥(紹興,1130-1161)시기의 각본으로서 약36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백씨문집에는 40여종이 넘는 화목을 언급하며 원림 내 화목배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백거이는 중국문학사에 위대한 공헌을 했으며 조원분야에서도 기나 긴 중국의 조원역사에 영향을 미친 원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자연의 미를 언어로 형상화 한 후 이를 그의 생활과 결합하여 실천적으로 형성하고, 체득하여 예술의 경계를 뛰어 넘었다. 또한 고대 문인들의 4대 예술(서법, 회화, 건축, 조원) 중 하나인 원림 조성을 통하여 유교, 도교 및 불교의 선종을 융합하여 당시 문인들이 꿈꾸던 이상세계를 자신의 원림에 실현하였으며, 시를 통하여 원림에 미학적 사상을 표현하였다. 백거이의 초당기(草堂記), 지상편(池上篇), 냉천정기(冷泉亭記), 태호석기(太湖石記) 등의 산문 및 시를 살펴보면 그의 원림관, 품석이론(品石理論: 돌을 품평함)등 원림 구성 요소에 관한 조성원리 및 심미관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自題小園》에서 원림의 가치는 크기와 화려함에 있지 않으며 우아한 정취를 자아내며 돌과 작은 지당이 있고 작은 원림에는 동물과 수목이 있어 벗과 더불어 야회를 하며 자족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 있는 원림이라고 주장하며 (不斗門館華,不鬥林園大。…..,主人安在哉,富貴去不回。池乃為魚鑿,林乃為禽栽。何如小園主,拄杖閒即來。親賓有時會,琴酒連夜開。以此聊自足,不羨大池台) 실제 원림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조영하여 세상에 보였다.
그가 조영한 원림은 위상별서(渭上別墅: 섬서위남), 여산초당(廬山草堂:여산동림사), 동파풍경림(東坡風景林:충주 충현), 신창방택원(新昌坊宅園:장안), 이도방택원(履道坊宅園:낙양), 항주서호백공제(杭州西湖白公堤:항주)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들에도 각 원림의 구성원리, 품격, 구성요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중 백거이의 작품에 가장 많이 묘사되고 그 자신이 애착을 가진 정원은 여산의 초당과 이도리(履道里)의 원림이라 할 수 있다.
817년 조성된 ‘여산초당’은 여산의 동림사 옆 협곡에 소박한 별서원림을 조성하고 협곡의 맑은 물을 도입하여 작은 지당을 조성하였다. 또한 송죽(松竹)을 주변에 둘러 식재 한 후, 차경기법을 도입하여 사찰과 산 전체를 자신의 원림의 일부로 끌어들여 동양원림의 근간을 이루는 ‘天人合一’기법을 완성하였다.
<이도방택원>
이도방택원은 백거이가 낙양으로 돌아와 은거할 때 낙양 이도리(履道里)의 오래된 주택을 구입하여 조성한 것으로 송대 이격비가 자신의 작품《洛陽名園記》에 수록할 정도로 그 완성도와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컸다. 이도방택원은 중심에 작은 지당을 파고 그 흙을 이용하여 작은 섬을 만들고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연결하였다. 섬에는 대를 건축하고 지당에는 .백색 연꽃과 마름풀을 재배하여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池上篇》.
일본의 계리궁(桂離宮)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낙천의 조원기법은 838년 일본 평안시대에 전해져 실정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조원학자들의 원림 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본은 백거이의 자연에 순응하는 조원 방식을 따라 작은 규모와 소박한 형태의 고요하고 심원한 경지의 원림을 추구하였고, 또한 오랜 세월 일본 고유의 문화와의 융합을 통하여 지금의 독특한 일본만의 문화와 원림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백낙천은 《도덕경(道德經)》의 小隱, 中隱, 大隱을 통해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대부의 생활태도를 언급하였고, 혼란한 시대에 정치적으로 좌절된 자신의 이상을 小隱(세속을 피하고 정치적 권력을 피하여 산야에 묻혀 사는 삶)을 통해 이루었으며 이는 이후 문인의 은일사상에 정신적 기반을 이루었다.
신현실
북경대학교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