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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40호 소쇄원도에 깃든 의미와 효의 정신, 담양 소쇄원 (潭陽 瀟灑園)

입력 : 2017년05월29일 21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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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자연명승이 주를 이루고 그 중 정원유적의 비중은 30%를 상회한다. 정원은 인공을 가미한 제3의 자연이라는 말처럼 우리나라 정원은 인공적인 수법을 사용하되 자연에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유독 조선의 유교사상과 관련이 깊다. 유교에서 樂山樂水(요산요수), 山水之樂(산수지락)하며 인간의 성정을 함양하는 수단이 된 자연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그 가치를 얻게 되고 여기에 씨족사회와 충효사상이 곁들여져 조선 시대 정원을 탄생시켰다.
 

광풍각 광풍각

 선조들의 정원생활은 글과 그림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소중한 유산을 통해 조선 시대의 공간인식과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그 중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은 조물주와 인간의 신묘한 조화가 돋보이는 우리나라 정원의 대표격이라 칭송할 만하다.

 소쇄원은 1983년 7월 20일 사적 304호로 지정되었다가 정원이라는 외부환경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2008년 5월 2일 명승으로 재분류되었다. 그동안 소쇄원에 관심을 갖고 학문의 주제로 삼은 분들이 많이 늘었고 관련 글들도 제법 헤아릴 만 하게 되었다. 특히 건축과 조경분야에서는 정동오, 천득염, 故정재훈, 박경자, 정기호, 신상섭, 강영조교수님, 문학분야에서는 박준규, 김덕진, 권수용 같은 분들과 윤재득 계장님이 소쇄원을 지극히 사랑하는 분들로 손꼽힌다. 또 소쇄원은 후손들의 계승정신도 남다르다.

 

창암촌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촬영 창암촌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촬영

 일반적으로 별서정원은 주로 본가에서 멀지 않은 지근거리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별서정원인 소쇄원의 본가는 지금의 소쇄원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창암촌이다. 이 마을은 지금은 퇴락하여 본연의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다. 옛 창암촌의 모습은 소쇄공의 5대손 양응지의 ‘창암촌도’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쇄원에 손님이 도착하면 가장 먼저 창암촌의 집안 어른께 들려 안부를 여쭙고 난 후 별서로 향하게 된다. 이를 전제로 하면 소쇄원으로 향하는 동선은 창암촌에서 대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투죽위교에 다다르는 동선으로 추측된다. 정원의 초입에서는 소쇄원을 멀리서 조망할 수 없고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좁은 길을 헤쳐가면 점점 긴장감이 고조된다. 대숲을 빠져나온 여정의 끝에서 탁 트인 공간을 맞이하면 드디어 정원의 중심공간을 체험할 수 있게 애초부터 계획되어진 것이다. 초창기 소쇄원의 전신인 ‘소쇄정’의 모습도 대나무숲과 정자에서 출발된다는 점과도 관련된다.
 

소쇄원 전경 소쇄원 전경

 소쇄원 경내는 경사진 자연 계류가에 축대를 쌓아 일정의 공간을 확보한 후 정자를 중심으로 주인과 손님의 공간이 구별된다. 계류를 중심으로 양분된 공간은 좁은 다리 2개를 통해 연결된다. 이 좁고 위험한 다리는 방문자에게 주변계류의 깊이를 더 극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라는 조영자의 의도도 포착된다.

 

소쇄원 목판본 소쇄원 목판본

 소쇄원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가장  비중있는 사료는 1755년 간행된 소쇄원도 목판본(36cm×25cm)이다. 이 목판본은 소쇄공의 5대손 양채지의 아들인 양학겸 대에 완성된 것으로 1548년경에 쓰여진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쇄원사실 발문에 보면 이 소쇄원도의 목적과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 선조의 실적이 거의 없어질 뻔하다가 다행이 이 기록이 간행되었고 원림의 천석이 변천될 뻔하다가 이 원도가 그려져서 전해지게 되었으니, 비단 자손들만 기쁜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이후 여기를 보는 사람들은 이 원도를 근거삼아 우리 선조의 숨어지내며 쌓은 덕을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소쇄원사실 발문 427; 김덕진, 2011).

 

 소쇄원도에는 제월당과 광풍각, 부훤당, 고암정사를 비롯한 정원건축물, 계류와 상·하지 및 석가산 등의 경관요소, 16종의 정원식물, 축대와 오곡문 및 애양단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은 중앙 계류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사물들을 눕혀놓은 입면전개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마치 항공사진처럼 각 공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정원을 향유하는 사람들과 행태를 한눈에 보는데 안성맞춤이다. 오래 전, 故양재영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소쇄원 목판본의 가치를 안 학자들이 여기저기서 실물촬영과 목판화의 제작을 이유로 여러 차례 빌려갔었다고 한다. 그러던 사이 목판본은 행방이 묘연해졌고 지금은 당시 찍어낸 목판화에 의해 재현된 복각판만 남아있고 양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소쇄원의 가치가 특별한 것도 정원의 구성요소와 행태를 설명하는 설계도가 남아있다는 점일 것이다. 

 

광풍각과 제월당 광풍각과 제월당  

 또 하나의 가치는 이 지역 정원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들의 창작물인 호남가사문학이다. 예로부터 누정기는 문인들의 사상과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주재료였다. 소쇄원과 담양의 많은 정자를 오가며 교유했던 인물들도 이 곳 문화의 중요한 일부다.
 

소쇄원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촬영 소쇄원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촬영

 소쇄원의 공간구성 원리는 석축의 높낮이로 위계를 나타내는 유교적 질서라 할 수 있다. 소쇄원 항공사진에서 보면 제월당에서부터 광풍각까지 공간의 위계가 계단식으로 경사를 통해 결정되어진 것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경사를 활용했기 때문에 경사가 급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신의 정원 담 안에 가두어 낸 솜씨는 자연과의 순응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화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화계는 경사를 이용해 계단식 화단을 만드는 우리나라 정원에서 독특한 시설 중 하나다. 소쇄원의 화계는 매대와 난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교에서 고고한 선비나 은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소쇄원의 조영에는 양산보와 그 후손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처가인 김윤제와 외가 송순 등의 조력이 지대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특히 환벽당의 주인인 김윤제와 면앙정의 송순의 영향력은 그들이 조성한 정원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속세에서 벗어나 은거하고자 조성한 소쇄정을 전신으로 삼고 있으며 이후 다양한 요소들을 도입하면서 정원의 기본골격을 형성하였다. 양산보 사후 정원을 소유한 양자정 대에는 선대의 정원을 내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했으며, 당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소쇄원을 별서로서 더욱 내실 있게 꾸몄다.
 

오곡문 오곡문
제월당과 담장 제월당과 담장

  전란에 의해 소실된 이후에는 남겨진 주변의 수목과 계류를 바라보며 그리움과 아쉬움 등의 담긴 시문들이 주로 창작되었으나 양천운을 시작으로 양진태와 양택지 대에 정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당대 문인과의 교유, 연회 개최 등 소쇄원 중흥을 시켰다. 

 이 소쇄원의 중흥은 양경지 대에 정원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기존의 정원 향유문화 외에도 전란 이전의 소쇄원을 회상하고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정원관이 담긴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나라 정원에서는 보기 힘든 효의 정신으로 평가된다.

 이점은 기존 공간의 존치와 함께 정원영역의 확장이 이루어진 점은 초기 조영자와 소유주가 지녔던 정원관을 계승하는 사례에 해당하며, 후대에 유교적 영향에 의한 선현에 대한 존경심이 정원 내 장소성에 부가된 점 또한 공간변화 특성을 형성하는 주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소쇄원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촬영 소쇄원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촬영

 명승 소쇄원은 혈연중심의 정원 소유주 대물림의 형식을 통해 유교적 영향에 의한 선조의 흔적을 기리는 효가 기본이 되며 정원의 형성과 쇠퇴과정, 재건과정을 통해 이러한 맥락이 작용하여 왔으며 과거 정원공간구성의 유지를 전재로 한 당대 소유주의 공간을 소극적으로 조성하는 태도를 보여 왔으며 내부공간의 완성기 이후에는 외부 지향적 발전을 통해 소쇄원의 본래가치를 유지 계승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분야를 대표하는 소쇄원은 조선의 선비정신과 효를 대표하는 자랑스런 우리의 유산이기도 한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원호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김덕진(2011), 소쇄원 사람들2, 다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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