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은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 김 씨(貞純王后 金 氏, 1745~1805)의 능이다. 동구릉 내 중앙 산줄기에 조성한 원릉은 쌍릉의 형태로 영조의 능과 정순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하였다. 이 자리는 효종의 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구릉 안내도 사진제공=문화재청>
<원릉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원릉은 1776년에 영조의 능을 먼저 조성하고 그 후 1805년(순조 5)에 능을 조성하였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봉분 주위를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하나씩 배치하였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가 하나는 하늘을 향하고, 또 하나는 땅을 각각 향하고 있다. 능 사이에는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을 세웠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원릉 석물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는 원래 1757년(영조 33)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 씨(貞聖王后 徐 氏, 1692~1757)가 세상을 떠나자 능을 조성하면서 쌍릉 형식으로 조성해,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 한 쪽을 비워두는 허우제(虛右制)로 홍릉(弘陵)을 조성하였다. 석물도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고 비워있는 자리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기하게 하였다. 하지만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홍릉이 아닌 동구릉 내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고양 서오릉(高陽 西五陵) 내 홍릉의 왼쪽 자리는 그대로 비어 있다.
<원릉 정자각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 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에 태어났다. 1699년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가 경종이 왕 위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04년 정성왕후와 가례를 올리고 궁궐 밖으로 나가 살기도 하였다. 1724년 숙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을 기울였으나 아들 사도세자가 희생되는 비운을 겪었다.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청법도 제정하였다.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농사를 장려하고 국방에도 충실을 기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조선 최장수 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에 이르는 영조는 1776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릉 후면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759년(영조 35)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정조가 죽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5년(순조 5)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릉 전경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은 고양 서오릉 내에 있는 홍릉으로, 정성왕후 한 분만 모신 단릉이지만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704년 연잉군과 혼인하였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가 소생도 없이 1757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제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은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 김 씨(貞純王后 金 氏, 1745~1805)의 능이다. 동구릉 내 중앙 산줄기에 조성한 원릉은 쌍릉의 형태로 영조의 능과 정순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하였다. 이 자리는 효종의 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구릉 안내도 사진제공=문화재청>
<원릉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원릉은 1776년에 영조의 능을 먼저 조성하고 그 후 1805년(순조 5)에 능을 조성하였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봉분 주위를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하나씩 배치하였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가 하나는 하늘을 향하고, 또 하나는 땅을 각각 향하고 있다. 능 사이에는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을 세웠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원릉 석물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는 원래 1757년(영조 33)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 씨(貞聖王后 徐 氏, 1692~1757)가 세상을 떠나자 능을 조성하면서 쌍릉 형식으로 조성해,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잡아 한 쪽을 비워두는 허우제(虛右制)로 홍릉(弘陵)을 조성하였다. 석물도 쌍릉의 형식으로 배치하고 비워있는 자리에 십자(十字)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기하게 하였다. 하지만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홍릉이 아닌 동구릉 내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고양 서오릉(高陽 西五陵) 내 홍릉의 왼쪽 자리는 그대로 비어 있다.
<원릉 정자각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 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에 태어났다. 1699년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가 경종이 왕 위에 오르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04년 정성왕후와 가례를 올리고 궁궐 밖으로 나가 살기도 하였다. 1724년 숙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을 기울였으나 아들 사도세자가 희생되는 비운을 겪었다.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서자의 관리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통청법도 제정하였다.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농사를 장려하고 국방에도 충실을 기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조선 최장수 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에 이르는 영조는 1776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릉 후면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759년(영조 35)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정조가 죽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5년(순조 5)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릉 전경 사진제공=조선왕릉>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은 고양 서오릉 내에 있는 홍릉으로, 정성왕후 한 분만 모신 단릉이지만 석물의 배치는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704년 연잉군과 혼인하였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가 소생도 없이 1757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제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