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 사적 제206호, 경기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의 융릉은 장현세자((莊獻世子), 1735~1762)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 씨(惠慶宮 洪 氏, 1735~1815)의 능이고,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正祖, 1752~1800)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 김 씨(孝懿王后 金 氏, 1753~1821)의 능이다.
먼저, 우리에게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장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인 융릉은 왕으로 추존되기 이전의 능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의 효심으로 아버지의 능을 왕릉과 같이 격을 높여서 조성하였다. 원래 사도세자의 묘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목숨을 거두자 영조가 경기도 양주 배봉산 자락에 ‘수은묘(垂恩墓)’를 조성하였으나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1789년 화성으로 옮겨와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조성하였다. 그 후 1815년 혜경궁 홍 씨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였다. 1899년 사도세가가 장조로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게 되었다.
<화성 융릉>
<융릉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형태를 따랐다. 능 주변에는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으며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장조로 추존된 세도세자는 영조와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아들로, 1736년(영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헌경황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 씨는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첫 번째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고, 1752년(영조 28) 정조를 낳았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후 어머니를 혜경궁(惠慶宮)으로 바꾸었으며, 1795년 회갑을 맞아 회고록인 《한중록》을 썼다.
<화성 건릉>
건릉은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릉으로, 정조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1821년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을 천장하여 합장릉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건릉의 석물 사진제공=문화재청>
정조는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 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에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하였다. 1775년(영조 51) 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 설치, 금난전권 폐지,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실학을 발전시키고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룬 정조는 1800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의왕후 김 씨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1753년에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 10세 때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까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 씨와 혜경궁 홍 씨를 잘 공양하였으며, 평생을 검소하게 지냈다. 정조와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으며 1821년(순조 21)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용주사 사진제공=관광공사>
화성 융릉과 건릉 바로 옆에는 용주사(龍珠寺)가 있다.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는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정조가 아버지 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는 일반 사찰과는 다르게 궁궐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이 삼문을 두었다. 특히 정조의 지휘 감독 아래 지은 대웅보전은 정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융릉 설경>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 서려 있는 화성 융릉과 건릉은 주변이 울창한 송림과 상수리 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책코스로도 좋다. ‘화성팔경’의 하나인 이곳은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지만 특히 겨울철 노송 위에 백설이 쌓인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자료제공=문화제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
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 사적 제206호, 경기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의 융릉은 장현세자((莊獻世子), 1735~1762)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 씨(惠慶宮 洪 氏, 1735~1815)의 능이고,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正祖, 1752~1800)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 김 씨(孝懿王后 金 氏, 1753~1821)의 능이다.
먼저, 우리에게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장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인 융릉은 왕으로 추존되기 이전의 능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의 효심으로 아버지의 능을 왕릉과 같이 격을 높여서 조성하였다. 원래 사도세자의 묘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목숨을 거두자 영조가 경기도 양주 배봉산 자락에 ‘수은묘(垂恩墓)’를 조성하였으나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1789년 화성으로 옮겨와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조성하였다. 그 후 1815년 혜경궁 홍 씨가 세상을 떠나자 합장하였다. 1899년 사도세가가 장조로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하게 되었다.
<화성 융릉>
<융릉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능침은 난간석을 생략하고 병풍석만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은 인조의 장릉(長陵)의 형태를 따랐다. 능 주변에는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으며 특히 문석인은 복두를 쓴 일반적인 왕릉형식이 아닌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장조로 추존된 세도세자는 영조와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아들로, 1736년(영조 12)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싸움에 휘말려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헌경황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 씨는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첫 번째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고, 1752년(영조 28) 정조를 낳았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후 어머니를 혜경궁(惠慶宮)으로 바꾸었으며, 1795년 회갑을 맞아 회고록인 《한중록》을 썼다.
<화성 건릉>
건릉은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릉으로, 정조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후 1821년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능을 천장하여 합장릉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능침은 융릉과 비슷하지만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그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수라간,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건릉의 석물 사진제공=문화재청>
정조는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 씨의 둘째 아들로 1752년(영조 28)에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영조 38)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하였다. 1775년(영조 51) 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 설치, 금난전권 폐지, 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실학을 발전시키고 조선 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룬 정조는 1800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효의왕후 김 씨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1753년에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 10세 때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까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 씨와 혜경궁 홍 씨를 잘 공양하였으며, 평생을 검소하게 지냈다. 정조와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으며 1821년(순조 21)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용주사 사진제공=관광공사>
화성 융릉과 건릉 바로 옆에는 용주사(龍珠寺)가 있다.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는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정조가 아버지 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는 일반 사찰과는 다르게 궁궐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이 삼문을 두었다. 특히 정조의 지휘 감독 아래 지은 대웅보전은 정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단원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융릉 설경>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 서려 있는 화성 융릉과 건릉은 주변이 울창한 송림과 상수리 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책코스로도 좋다. ‘화성팔경’의 하나인 이곳은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지만 특히 겨울철 노송 위에 백설이 쌓인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자료제공=문화제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