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 경릉(景陵)은 조선 24대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과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 씨(孝顯王后 金 氏, 1828~1843)와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 홍 씨(孝定王后 洪 氏, 1831~1903)의 능이다. 동구릉 내 왼쪽 산줄기에 조성한 경릉은 헌종의 능과 왕후의 능 3개가 나란히 조성된 삼연릉(三連陵)의 형태이다.
<동구릉 안내도>
원래 경릉이 있는 자리는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었던 곳으로, 1630년(인조 8) 이곳에 물길이 있고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목릉을 다른 지역으로 천장하였다. 하지만 목릉을 옮길 때 이곳은 아무 이상이 없었고, 1843년 효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1849년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현왕후 능 옆에 능을 조성하였으며 1904년 효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을 나란히 조성하게 되었다.
<경릉 사진제공=문화재청>
경릉은 왼쪽부터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 봉분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난간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봉분 주변에 망주석, 석호, 석양을, 봉분 앞에 장명등을 가운데 세우고 그 아래 문석인과 무석인, 석마 등을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구릉 경릉과 정자각 사진제공=조선왕릉>
순조(純祖)의 손자인 헌종은 효명세자(孝明世子, 추존 익종)와 신정왕후의 아들로 1827년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7년 효현왕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6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효정왕후를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따로 마음에 둔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들여 낙선재를 지어주고 그곳에서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헌종이 재위하는 동안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대립으로 국정은 혼란에 빠지고,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은 민생고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천주교의 탄압이 심했던 시기로 1846년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처형하였다. 《동국사략》 《삼조보감》 등을 찬술하는 등 치적을 남기고, 후사 없이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구릉 내 경릉 사진제공=조선왕릉>
헌종의 첫 번째 왕비인 효현왕후는 안동김씨 영흥부원군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 씨의 딸로, 183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후사를 낳지 못하고 1843년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의 두 번째 왕비인 효정왕후는 남양홍씨 익풍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안 씨의 딸로, 1844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헌대비가 되고, 1859년(철종 10)에 왕대비가 되었다. 헌종과는 후사가 없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콘텐츠닷컴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내 경릉(景陵)은 조선 24대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과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 씨(孝顯王后 金 氏, 1828~1843)와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 홍 씨(孝定王后 洪 氏, 1831~1903)의 능이다. 동구릉 내 왼쪽 산줄기에 조성한 경릉은 헌종의 능과 왕후의 능 3개가 나란히 조성된 삼연릉(三連陵)의 형태이다.
<동구릉 안내도>
원래 경릉이 있는 자리는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었던 곳으로, 1630년(인조 8) 이곳에 물길이 있고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목릉을 다른 지역으로 천장하였다. 하지만 목릉을 옮길 때 이곳은 아무 이상이 없었고, 1843년 효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1849년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현왕후 능 옆에 능을 조성하였으며 1904년 효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을 나란히 조성하게 되었다.
<경릉 사진제공=문화재청>
경릉은 왼쪽부터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 봉분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난간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봉분 주변에 망주석, 석호, 석양을, 봉분 앞에 장명등을 가운데 세우고 그 아래 문석인과 무석인, 석마 등을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구릉 경릉과 정자각 사진제공=조선왕릉>
순조(純祖)의 손자인 헌종은 효명세자(孝明世子, 추존 익종)와 신정왕후의 아들로 1827년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7년 효현왕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6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효정왕후를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따로 마음에 둔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들여 낙선재를 지어주고 그곳에서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헌종이 재위하는 동안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대립으로 국정은 혼란에 빠지고,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은 민생고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천주교의 탄압이 심했던 시기로 1846년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처형하였다. 《동국사략》 《삼조보감》 등을 찬술하는 등 치적을 남기고, 후사 없이 1849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구릉 내 경릉 사진제공=조선왕릉>
헌종의 첫 번째 왕비인 효현왕후는 안동김씨 영흥부원군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 씨의 딸로, 183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후사를 낳지 못하고 1843년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의 두 번째 왕비인 효정왕후는 남양홍씨 익풍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안 씨의 딸로, 1844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헌대비가 되고, 1859년(철종 10)에 왕대비가 되었다. 헌종과는 후사가 없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인 1904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