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홍릉(南楊州 洪陵. 사적 제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은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高宗, 1852~1919)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 민 씨(明成皇后 閔 氏, 1851~1895)의 능이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 시신이 궁궐 밖에서 소각된 이후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공사가 또다시 중단되었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단되었던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하여 명성황후를 먼저 천장하고 고종을 합장하여 능을 조성하였다.
<홍릉 능침 사진제공=문화재청>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인 홍릉은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 따 조성된 홍릉은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돌렸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12칸의 꽃무늬를 새긴 난간석을 설치하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공간 앞으로 배치하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홍릉 석물 사진제공=조선왕릉>
기존의 제향공간이었던 정자각을 대신해 침전을 세우고, 침전 앞에 참도 양옆으로 문인석, 무인석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동물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그밖에 부속건물로 비각, 홍살문, 수복방, 수라간, 재실, 어정 등이 있다.
<홍살문과 침전 사진제공=조선왕릉>
고종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철종 3년(1852)에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정왕후 조 씨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에 봉해지고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을 대신해 10년을 넘게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 씨와 아버지 대원군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1873년부터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재위기간 동안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고, 군제를 개혁하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하지만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1882녀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894년에는 농민혁명이 발발하였으며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도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내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1905년에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일본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1907년 7월 강제 퇴위되었다. 서양 열강세력의 침입과 근대화, 일본의 식민지 등 격동의 세월을 지낸 고종은 191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세웠다 사진제공=문화재청>
명성왕후 민씨는 여흥민씨(驪興閔氏)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 씨의 딸로 1866년(고종 3)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던 명성왕후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고 친정일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고종과 함께 개방정책을 펼쳐나간 명성왕후는 일본과 수교하고,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하였는데,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에 의해 1895년(고종 32)에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하였다. 고종과의 사이에는 3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두 아들은 요절하고, 셋째 아들이 순종이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양주 홍릉(南楊州 洪陵. 사적 제207호,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은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高宗, 1852~1919)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 민 씨(明成皇后 閔 氏, 1851~1895)의 능이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 시신이 궁궐 밖에서 소각된 이후 동구릉 내 숭릉 근처에 숙릉(肅陵)이라는 능호로 능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아관파천하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홍릉(洪陵)이라는 능호로 현재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새로 능을 조성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공사가 또다시 중단되었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단되었던 금곡의 홍릉자리를 다시 공사하여 명성황후를 먼저 천장하고 고종을 합장하여 능을 조성하였다.
<홍릉 능침 사진제공=문화재청>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인 홍릉은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 따 조성된 홍릉은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돌렸으며, 봉분 밖으로 역시 12칸의 꽃무늬를 새긴 난간석을 설치하고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기존의 능침공간에 있던 석물(석양, 석호, 문무석인)들은 제향공간 앞으로 배치하고, 종류와 개수를 늘렸다.
<홍릉 석물 사진제공=조선왕릉>
기존의 제향공간이었던 정자각을 대신해 침전을 세우고, 침전 앞에 참도 양옆으로 문인석, 무인석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동물석상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그밖에 부속건물로 비각, 홍살문, 수복방, 수라간, 재실, 어정 등이 있다.
<홍살문과 침전 사진제공=조선왕릉>
고종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철종 3년(1852)에 태어났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정왕후 조 씨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에 봉해지고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을 대신해 10년을 넘게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 씨와 아버지 대원군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1873년부터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재위기간 동안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고, 군제를 개혁하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하지만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1882녀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894년에는 농민혁명이 발발하였으며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기도 하였으며, 1897년에는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면목을 내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1905년에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일본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자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1907년 7월 강제 퇴위되었다. 서양 열강세력의 침입과 근대화, 일본의 식민지 등 격동의 세월을 지낸 고종은 191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자각 대신 침전을 세웠다 사진제공=문화재청>
명성왕후 민씨는 여흥민씨(驪興閔氏)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 씨의 딸로 1866년(고종 3)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던 명성왕후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고 친정일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고종과 함께 개방정책을 펼쳐나간 명성왕후는 일본과 수교하고,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하였는데,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에 의해 1895년(고종 32)에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하였다. 고종과의 사이에는 3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두 아들은 요절하고, 셋째 아들이 순종이다.
자료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