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문화재]서울 독립문 (서울 獨立門) 1897년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면서 세운 문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 사적 제32호,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이 건립된 지 120년을 맞이하였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면서 세운 독립문은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을 허물고 1897년에 건립하였다. 이 문은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모금행사를 통해 모은 자금으로 건립되었다.
 

                                                         <서울 독립문 사진제공=문화재청>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독립문은 1896년 11월에 시작해 1897년 11월 20일, 1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 문은 파리 개선문을 본뜬 모습으로, 독일공사관의 기사가 설계를 하고 공사는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였다.

 정육면체 화강석으로 쌓아올리고, 가운데 홍예문이 있다. 문 왼편 안쪽으로는 꼭대기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고 맨 꼭대기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쓴 글씨와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서울 독립문>


 독립문은 일제강점기 때 두 차례 수리를 한 적이 있고,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파괴되어 1966년에 보수공사가 하였다. 그 후에도 한 두 차례 수리한 적이 있으며, 1979년에는 성산대로의 고가도로 공사로 인해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되었다.

 

 독립문 바로 앞에는 서울 영은문 주초(서울 迎恩門 柱礎, 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영은문 주춧돌은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으로,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서울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은 1407년(태종 7)에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명칭을 바꿨다. 그 후 모화관 앞에 세웠던 홍살문을 개축하여 영조문(迎詔門)이라는 세웠다. 1539년 영조문을 영은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 독립문 뒤편으로는 서재필 동상을 비롯해 당시 모화관을 허물고 지은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이 있다.



자료제공=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콘텐츠진흥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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