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안동 토계동 향산 고택(安東 土溪洞 響山 古宅)



가슴 속의 피 다 마르니 이 마음 다시 허명하구나 (此心更虛明)

  내일이면 어깨에 날개가 돋아  (明日生羽翰)

옥경에 올라가 소요하리라 (逍遙上玉京)

- 향산 선생의 《靑丘日記》 中에서 -


5c64ced571516.jpg

<안동>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이 되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끊고 순절(殉節)하였다. 가장 먼저 단식으로 순절한 분, 안동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1842~1910) 선생이 항일독립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그를 따라간 이가 전국에서 90명에 이른다고 하니 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향산 선생은 진성이씨(眞城李氏)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났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이휘준(李彙濬, 1806~1867)의 둘째 아들인 그는 일곱 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 숙부 이휘철(李彙澈)의 양자가 되었다. 25세에 문과 장원급제해 명문가 후예답게 성균관의 전적(典籍)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사헌부 장령(掌令)과 지평(指平), 사간원 사간(司諫) 등 청직(淸職)을 지냈다.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을 때는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격렬한 상소를 올린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을 변호하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훗날 공조참의(工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지만 오르지 않고 42세에 고향으로 내려와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5c64cf268525c.jpg

<안동>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54세가 되던 해, 1895년 일본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있어났다. 이만도 선생도 일본 군대에 맞서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거를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 결국 1905년 을사늑약이 이뤄지자 선생은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오적을 처단하라)’라는 상소문을 써서 아들인 기암 이중업(起巖 李中業, 1863~1921)에게 소를 올리게 하고 자신은 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선생의 나이 69세, 경술국치 소식에 나라를 잃고 군왕이 치욕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1910년 9월 17일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식으로서 죽음을 결정하고 집을 떠나 안동시 예안면 청구리 율리마을 만화공(晩花公) 종가로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선생은 단식을 시작하는 날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까지 친구들과 함께 인생을 논하고 제자들에게 경학을 강의했으며, 어린 손자들에게는 유학의 원리를 강의하는 등 마지막까지 유학자로서 길을 걸어갔다. 10월 10일, 단식을 시작한 지 24일 만에 순국했고, 24일간 단식 과정을 기록한 ‘청구일기(靑丘日記)’를 남겼다.

 

 이런 선생의 유지에 따라 아들, 며느리, 손자 3대에 걸쳐 모두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아들 이중업은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분통을 이기지 못해 유인식(柳寅植), 이상룡(李相龍), 박재중(朴在重)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당교격문(唐橋檄文)’을 지어 각 지방에 내붙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파리장서(巴里長書) 서명운동에도 참여했고, 1921년에는 한국 유림대표로 손문(孫文)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2통과 중국 군벌 오패부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1통을 갖고 출국하기로 계획했었지만 출국 직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다.

 

 선생의 며느리 김락(金洛, 1863~1929)은 시아버지, 남편 등 항일독립투쟁의 뒷바라지를 했고, 자신도 3.1만세운동에 직접 나섰다가 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으로 두 눈을 잃고 10년을 넘게 고생한 나머지 끝내 숨졌다. 선생의 손자 이동흠(李棟欽, 1881~1967)과 이종흠도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1915년 결성된 광복회(光復會)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해 일경에 잡히기도 하고, 제2차 유림단 의거에도 참가했다. 이종흠은 영양 석보 원리에서 자금을 모으다 탄로나 1926년 형제가 모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목,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단식으로 항거를 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 향산 선생의 옛 집이 있다. 이곳은 한 집안의 3대(代) 독립유공을 기려 ‘3代 독립운동가문’으로, 목숨과 전 재산을 나라를 위해 내놓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이다. 원래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었는데 안동댐 공사로 수몰되자, 1976년 안동시 안막동으로 이건했다. 소나무와 밤나무 숲이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아늑함마저 느끼게 한다. 나지막한 토담 너머로 안동 토계동 향산 고택(安東 土溪洞 響山 古宅, 경북 민속자료 제9호, 안동시 퇴계로 297-6)이 자리 잡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ㅡ’자형 사랑채 뒤로 안마당을 사이에 둔 정면 5칸, 측면 3칸 반 규모의 ‘?’자형 안채가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자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을 사이에 두고 중문채와 사랑채가 연결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왼쪽에는 문간방과 중문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2칸의 사랑방과 1칸의 사랑대청을 두고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했다. 사랑방 한 쪽에는 3대 독립운동가 서훈장을 복사해 전시해 놓았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랑방 뒷벽에는 수장 공간인 벽장을 꾸며 서책이나 집기류 등을 보관하기 용이하게 했다. 특히 사랑채 좌우에는 일반 주택에는 잘 볼 수 없는 양식인 박공면에 풍판을 설치해 벽체에 비바람이 치는 것을 막았다.

 

5c64cf5d9b38e.jpg

<안동>


                                                              


5c64cf7cf3691.jpg

<안동>


<안채> 

 안채는 2칸 안방과 1칸의 안대청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란히 익랑을 배치했다. 좌익랑에는 2칸의 부엌과 상방을 두었고, 우익랑은 1칸의 고방과 2칸의 상방을 두었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안채에도 수장 공간을 두고 있는데, 안방과 고방 위에는 안대청에서 이용할 수 있는 더그매(지붕과 천장 사이 비어 있는 공간, 주로 수장 공간으로 사용한다)와 안방 뒷벽에 벽장을 설치해 놓았다.

 

 항일독립운동가문이라는 것에 걸맞지 않게 집은 낡고 쇠락했지만 굳건함이 느껴진다. 현재 안동 토계동 향산 고택에는 10년 전부터 이동렬 씨 부부가 생활하며 향산 이만도 선생의 유지를 받들며 독립운동가문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기 위해 간간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안채의 건축적인 공간 구성이 이채롭고, 독립운동가문이라는 역사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승격된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고택 위로 잠잠히 내려오는 적막함에도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될 듯.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고 찾아오는 이가 있어 행복해 보인다.




 News & Company

법인명 : 주식회사 리몽 | LEEMONG corp.

등록번호 : 강원 아00093 |  발행일자 : 2011. 9. 5

발행인 :  이원석 | 편집인 : 김은미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미 기사배열 책임자 : 이원석

[25464]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강릉선교장

63, Unjeong-gil, Gangneung-si, Gangwon-do,[25464] Republic of Korea

Email : kchnews@naver.com T : 02-733-5270 F : 02-6499-9911

 ⓒ문화유산신문 당사의 기사를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링크, 게재하거나 배포하실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19 KCHN All rights reserved. Hosting &  Powered by Leemong co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