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잣나무 울울창창하고 연기와 노을이 어슴푸레 덮여 있어
松栢鬱乎蒼蒼烟霞
맑고 그윽한 한 고을이 신선 세계 그대로이니 이곳이 바로 청송이구나!
其靄靄淸幽一洞依然仙境者乃靑松也
- 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지은 찬경루 기문 中에서 -

<청운동 성천댁 전경>
경북 청송군 청운마을에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청운동 성천댁(靑雲洞 星川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경북 청송군 청송읍 서당길 12)을 찾아간다. 가을빛으로 이미 물들기 시작한 황금들녘은 가을걷이로 분주하다. 살부채를 펴놓은 형국인 청운마을은 31번 국도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용전천(龍纏川)이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자락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멀리 하천과 앞산이 굽어보이는 좋은 자리에 터를 잡고 있는 청운동 성천댁은 조선 고종 때 행장능참봉(行莊陵參奉)을 지낸 예천임씨(醴泉林氏) 임춘섭(林春燮, 1872~1931)이 구입해서 예천임씨 집안에서 거주해 오다가 1997년 신창석(申昌錫, 1957년생) 교수가 매입했다. 이 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는 없지만 200여 년 전에 건축된 가옥으로 추정하고 있다. 집의 택호는 보통 이 댁으로 시집온 사람의 출신지명에 따라 붙이게 되는데 임춘섭이 집을 소유한 이후 성천에서 이 댁으로 출가해 온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어 이 택호는 그전부터 불리던 것이 그대로 이어졌거나 문화재 지정 당시 이곳에 살던 할머니의 택호를 사용했다고 본다.

<대문채 전경>
골목길로 접어들자 집을 에워싼 토석담장과 초가로 된 대문채가 보인다. 주변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서 있다. 청운동 성천댁은 너른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문채와 본채를 앉혔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一’ 자형 초가로 경사진 면을 그대로 이용해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우측부터 대문칸, 마루방, 온돌방을 배치했다.

<안채에서 바라본 하늘>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口’ 자형 구조인데 사랑방 뒤 웃사랑방과 부엌이 외부로 돌출되어 있다. 이런 형식은 청송지방에서 볼 수 있는 배치방식이며, 강원도 남부지방의 9칸 똬리집과 거의 흡사하다. 추위와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외양간, 고방, 부엌 등 집안에 모든 것을 둔 폐쇄적인 구조이다. 본채로 들어갈 때는 사랑방과 외양간 사이로 난 출입문을 통하게 되는데 주로 남자나 외부인들이 드나들었고, 부녀자들은 부엌 쪽으로 난 문을 사용했다.

<안채 내부에 자리한 외양간>

본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웃방, 사랑방과 웃사랑방을 서로 마주하게 배치해 남녀의 공간을 구분했다. 사랑방은 1칸 반 규모의 큰사랑과 외부로 돌출된 1칸 웃사랑방이 있다. 사랑으로 출입하는 외부인들은 본채로 들어오지 않고도 마당 쪽으로 나 있는 쪽마루를 통해 바로 사랑방으로 출입할 수도 있다. 안방과 웃방은 각각 1칸 규모이고 안방 앞쪽으로는 쪽마루를 두어 출입이 편리하도록 배려했다. 외부로 반 칸 정도 돌출되어 있는 부엌은 집 규모에 비하면 상당히 넓다. 부엌과 나란히 고방과 외양간을 배치했는데 특히 외양간은 높이를 상하로 나눠 아래는 소를 먹일 수 있는 공간으로, 상부는 물건을 저장할 수 있게끔 해서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하고 있다.
본채에 들어서면 한 평도 안 되는 안뜰과 그 위로 보이는 작은 하늘이 이채롭다. 일명 ‘한 칸의 뜰집’이라 불리며, 아주 작은 안마당을 가지고 있다. 안뜰은 봉당보다 약간 낮고 경사지게 만들고, 자연석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바닥에는 작은 돌을 깔아놓았다. 두 뼘 정도 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작은 연못으로 변했다가 구멍을 통해 외부로 배출한다. 안채는 높게, 부엌과 외양간은 조금 낮게, 전후좌우 건물 높이 차이를 두고 설계해 처마선이 서로 맞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작게 뚫린 지붕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최대한으로 끌어들였다. 좁은 틈으로 들어온 환한 빛은 시간대에 따라 그림자를 만들기도 하고 방을 밝히기도 한다.

신창석 교수는 대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부회장으로 계신다. 신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숭겸(申崇謙, ?~927)의 31세손인 신치학(申致鶴)이 1700년대에 건립한 청송 사남고택(靑松 泗南古宅, 경북민속문화재 제154호, 경북 청송군 파천면 중들2길 26)에 살다가 대구로 유학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고택에서 생활했던 익숙함이 15년 전 친구로부터 이 집을 매입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 신창석 교수는 햇볕에 얼굴이 그을릴 정도로 대구와 청송을 오가며 중평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청주복원사업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이 술은 밀이 아닌 쌀로 만든 누룩으로 빚어야 하기 때문에 쌀 재배부터 모든 과정을 일일이 신경을 쓰느라 여념이 없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열정이 느껴진다.
신창석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대청으로 오른다. 처마선이 드리워져 한없이 작아 보이는 하늘이지만 지붕선 너머로 더욱 높아진 파란 가을하늘과 흰 구름, 가을빛을 머금은 나무가 그림처럼 걸려있다. 자귀로 거칠게 다듬은 빈지널로 이루어진 벽체, 채광을 위한 벽을 뚫어 창틀 없이 창호지만 여러 겹 바른 봉창은 옛 집에 대한 친근감을 더해 주고 눈길을 머물게 한다. 마루 곳곳에 깊이 파인 홈은 이곳이 길쌈동네라서 길쌈을 매던 흔적이라고. 그것은 우리 어머니들이 질곡의 삶을 살아온 상흔들이었다.
청운동 성천댁은 올해 말부터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갈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택에서 머물며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명품고택(한국관광공사 선정)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내려앉은 고택에서 그들만이 간직한 사연을 들으며 하룻밤! 그 날을 기약해 본다.

<안채 내부>
소나무 잣나무 울울창창하고 연기와 노을이 어슴푸레 덮여 있어
松栢鬱乎蒼蒼烟霞
맑고 그윽한 한 고을이 신선 세계 그대로이니 이곳이 바로 청송이구나!
其靄靄淸幽一洞依然仙境者乃靑松也
- 관찰사 홍여방(洪汝方)이 지은 찬경루 기문 中에서 -
<청운동 성천댁 전경>
경북 청송군 청운마을에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청운동 성천댁(靑雲洞 星川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72호, 경북 청송군 청송읍 서당길 12)을 찾아간다. 가을빛으로 이미 물들기 시작한 황금들녘은 가을걷이로 분주하다. 살부채를 펴놓은 형국인 청운마을은 31번 국도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용전천(龍纏川)이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자락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멀리 하천과 앞산이 굽어보이는 좋은 자리에 터를 잡고 있는 청운동 성천댁은 조선 고종 때 행장능참봉(行莊陵參奉)을 지낸 예천임씨(醴泉林氏) 임춘섭(林春燮, 1872~1931)이 구입해서 예천임씨 집안에서 거주해 오다가 1997년 신창석(申昌錫, 1957년생) 교수가 매입했다. 이 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는 없지만 200여 년 전에 건축된 가옥으로 추정하고 있다. 집의 택호는 보통 이 댁으로 시집온 사람의 출신지명에 따라 붙이게 되는데 임춘섭이 집을 소유한 이후 성천에서 이 댁으로 출가해 온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어 이 택호는 그전부터 불리던 것이 그대로 이어졌거나 문화재 지정 당시 이곳에 살던 할머니의 택호를 사용했다고 본다.
<대문채 전경>
골목길로 접어들자 집을 에워싼 토석담장과 초가로 된 대문채가 보인다. 주변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서 있다. 청운동 성천댁은 너른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문채와 본채를 앉혔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一’ 자형 초가로 경사진 면을 그대로 이용해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우측부터 대문칸, 마루방, 온돌방을 배치했다.
<안채에서 바라본 하늘>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口’ 자형 구조인데 사랑방 뒤 웃사랑방과 부엌이 외부로 돌출되어 있다. 이런 형식은 청송지방에서 볼 수 있는 배치방식이며, 강원도 남부지방의 9칸 똬리집과 거의 흡사하다. 추위와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외양간, 고방, 부엌 등 집안에 모든 것을 둔 폐쇄적인 구조이다. 본채로 들어갈 때는 사랑방과 외양간 사이로 난 출입문을 통하게 되는데 주로 남자나 외부인들이 드나들었고, 부녀자들은 부엌 쪽으로 난 문을 사용했다.
<안채 내부에 자리한 외양간>
본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웃방, 사랑방과 웃사랑방을 서로 마주하게 배치해 남녀의 공간을 구분했다. 사랑방은 1칸 반 규모의 큰사랑과 외부로 돌출된 1칸 웃사랑방이 있다. 사랑으로 출입하는 외부인들은 본채로 들어오지 않고도 마당 쪽으로 나 있는 쪽마루를 통해 바로 사랑방으로 출입할 수도 있다. 안방과 웃방은 각각 1칸 규모이고 안방 앞쪽으로는 쪽마루를 두어 출입이 편리하도록 배려했다. 외부로 반 칸 정도 돌출되어 있는 부엌은 집 규모에 비하면 상당히 넓다. 부엌과 나란히 고방과 외양간을 배치했는데 특히 외양간은 높이를 상하로 나눠 아래는 소를 먹일 수 있는 공간으로, 상부는 물건을 저장할 수 있게끔 해서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하고 있다.
본채에 들어서면 한 평도 안 되는 안뜰과 그 위로 보이는 작은 하늘이 이채롭다. 일명 ‘한 칸의 뜰집’이라 불리며, 아주 작은 안마당을 가지고 있다. 안뜰은 봉당보다 약간 낮고 경사지게 만들고, 자연석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바닥에는 작은 돌을 깔아놓았다. 두 뼘 정도 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작은 연못으로 변했다가 구멍을 통해 외부로 배출한다. 안채는 높게, 부엌과 외양간은 조금 낮게, 전후좌우 건물 높이 차이를 두고 설계해 처마선이 서로 맞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작게 뚫린 지붕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최대한으로 끌어들였다. 좁은 틈으로 들어온 환한 빛은 시간대에 따라 그림자를 만들기도 하고 방을 밝히기도 한다.
신창석 교수는 대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부회장으로 계신다. 신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평산신씨(平山申氏) 신숭겸(申崇謙, ?~927)의 31세손인 신치학(申致鶴)이 1700년대에 건립한 청송 사남고택(靑松 泗南古宅, 경북민속문화재 제154호, 경북 청송군 파천면 중들2길 26)에 살다가 대구로 유학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고택에서 생활했던 익숙함이 15년 전 친구로부터 이 집을 매입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 신창석 교수는 햇볕에 얼굴이 그을릴 정도로 대구와 청송을 오가며 중평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청주복원사업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이 술은 밀이 아닌 쌀로 만든 누룩으로 빚어야 하기 때문에 쌀 재배부터 모든 과정을 일일이 신경을 쓰느라 여념이 없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열정이 느껴진다.
신창석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대청으로 오른다. 처마선이 드리워져 한없이 작아 보이는 하늘이지만 지붕선 너머로 더욱 높아진 파란 가을하늘과 흰 구름, 가을빛을 머금은 나무가 그림처럼 걸려있다. 자귀로 거칠게 다듬은 빈지널로 이루어진 벽체, 채광을 위한 벽을 뚫어 창틀 없이 창호지만 여러 겹 바른 봉창은 옛 집에 대한 친근감을 더해 주고 눈길을 머물게 한다. 마루 곳곳에 깊이 파인 홈은 이곳이 길쌈동네라서 길쌈을 매던 흔적이라고. 그것은 우리 어머니들이 질곡의 삶을 살아온 상흔들이었다.
청운동 성천댁은 올해 말부터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갈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택에서 머물며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명품고택(한국관광공사 선정)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내려앉은 고택에서 그들만이 간직한 사연을 들으며 하룻밤! 그 날을 기약해 본다.
<안채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