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당 고택 전경>
此退溪先生酒誡。爲金應順作也。
生三事一。恩義罔間。而篤愛之情。父子尤切。
庸敢書揭壁上。旣以自戒。因戒忠求。宗族賓友與忠求遊者。願共此戒。
이것은 퇴계(退溪) 선생의 주계(酒誡)로서 김응순(金應順)을 위해 지은 것이다.
낳아 주고 가르치고 먹여 주는 부모와 스승과 임금은 다 같이 한 가지로 섬겨야 하는 바로서 그 은의(恩義)가 서로 간에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그 독실한 애정으로 말하면 부자의 사이가 더욱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감히 이를 써서 벽 위에 붙이고 먼저 스스로를 경계한 다음, 이를 통하여 충구(忠求)를 경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족(宗族)과 빈우(賓友)들로서 충구와 서로 교유하는 자들도 이 경계를 함께하기를 바란다.
(1906년 어느 날, 수당 선생이 아들 충구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퇴계 선생의 주계’를 써서 아들과 그의 친구, 일가에게 쓴 글이다.)
4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 이남규 선생 고택(李南珪 先生 古宅, 충남유형문화재 제68호,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181-8)을 찾아가기 전 수당가의 인물을 한 분 한 분 짚어보고 가는 것이 예의일 듯하다.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 1855~1907) 선생은 서울에서 부친 이호직(李浩稙)과 모친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 이곡(稼亭 李穀), 목은 이색(牧隱 李穡), 이산해(李山海) 등 고려 말과 조선 시대에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한산이씨(韓山李氏)가의 유학적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구한말 4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다. 수당 선생은 과거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해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 형조참의(刑曹參議)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95년 을미사변 시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 討賊復讐疏)’ 상소를 올려 격렬히 맞섰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토적소(請討賊疏)’ 상소를 올려 매국노를 처단하고 대항할 것을 주장하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1907년 예산에서 칩거하던 수당 선생은 일제에 체포되어 강제 연행되자 “선비는 죽일 수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다”며 스스로 가마에 올랐다. 결국 온양 평촌 냇가에서 장남 이충구(李忠求, 1874~1907), 하인 김응길(金應吉)과 함께 모두 순국했다. 수당의 손자 이승복(李昇馥, 1895~1978)은 연해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귀국해서 조선·동아 및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수당의 증손 이장원(李章遠, 1929∼1951)은 한국전쟁 시 해병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 원산에서 순국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던 수당 선생의 애국충절과 유학자, 예학자, 실학자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아온 선비정신이 대를 이어 독립운동, 호국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이남규 선생 고택은 갈막마을 끝부분 나지막한 산자락에 안긴 듯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고택 바로 위에 있는 방산저수지를 만들 당시 수몰될 위기에 놓였지만 독립지사인 수당 선생뿐만 아니라 훈장을 받은 애국지사가 연이어 배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고택은 1637년(인조 15) 수당 선생의 10대조 이구(李久)의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가 터를 잡고 지었다.

<사랑채>
정자겸 사랑채인 ‘평원정(平遠亭)’은 담장도 없이 사방이 툭 터져 있다. 사랑채 앞마당 입구 돌에 새겨놓은 ‘반환대(盤桓臺)’. 어렴풋이 형태만 남아있는 글자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곳이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인 셈. 여기서 기다리며 집주인의 방문 허락을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 내부>
사랑채는 막돌로 3단 허튼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ㅡ’자형 건물로 전면에 길게 툇마루를 설치하고 좌우측에 각각 분합문을 단 마루방을 배치했다. 양쪽 마루방 뒤로 사랑방과 건넌방을 각각 배치했다. 툇마루를 올라 대청으로 들어가면 특이한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루보다 한 단을 높게 설치해 놓은 ‘고상(高床)’이 바로 그것. 가끔 누정에 이런 공간이 설치되어있긴 하지만 민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안채 전경>
‘튼 ㅁ’ 자형인 안채영역은 높은 축대 위에 문간채를 두고 돌아가며 돌로 장식한 담장을 쌓았다. 달이 뜬 것 같은 월방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대문의 문지방과 상인방을 둥글게 휜 나무를 사용했다.
대문채는 총 7칸 ‘ㅡ’자 건물로 대문칸을 사이에 두고 왼쪽 2칸은 하인이 사용하던 방과 오른쪽 3칸은 광으로 구성되었다.
‘?’자형 안채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건물을 짓다보니 익랑채에서 안대청으로 이르는 기단이 점점 높아진다. 건물이 시작되는 양쪽 익랑채 부엌은 1단 기단으로 시작해 건넌방, 대청에 이르러선 3단이다.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안방을, 왼쪽은 벽감(壁龕)과 마루방을 배치했다. 팔작지붕을 둔 익랑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맞배지붕을 둔 익랑채에는 방과 부엌을 배치했다. 대청의 전면은 부연을 단 겹처마로 해 빗물이 들이치지 않는 것은 물론 안채가 한층 격이 높아 보이도록 했다. 특히 사당 대신 조상의 위패를 모신 벽감을 집안에 두어 이곳에서 차례와 제사를 올린다.
대청에 앉으면 문간채 너머 앞산의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뒤편 바라지창을 열면 후원과 뒷산이 훤히 다 내다보인다. 밖에서 바라보면 폐쇄적인 공간처럼 느껴지지만 안주인이 지은 건물답게 세심하게 배려한 모습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수당기념관>
2008년 문을 연 수당기념관은 수당 선생이 실천한 ‘士可殺 不可辱(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의 고귀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해 건립했다. 또한 수당의 4대, 이남규(李南珪) 이충구(李忠求) 이승복(李昇馥) 이장원(李章遠)으로 이어진 애국·호국 활동을 소개하고 이를 통하여 수당가(修堂家)의 독립·호국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문원 관장 >
수당 선생의 증손인 이문원(李文遠, 1937년생) 관장은 서울에서 40년을 넘게 교직생활을 마치고 제6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하셨다. 칠순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애국지사 후손답게 건장한 체구와 꼿꼿한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2005년 이곳으로 내려와 생활하면서 선조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택을 수리하고 수당가의 애국정신과 선조들의 유물들을 전시한 수당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서울과 예산을 오르내리며 많은 일을 하셨다. 내년에는 사랑채 앞에 있던 연못과 정자 복원 계획이 잡혀 있고, 안채 앞에 있던 행랑채의 복원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라고 푸념하시지만 목소리에선 열정이 넘친다. 그동안 이 관장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기분 좋은 소식이 들린다.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승격될 예정이라고.
<수당 고택 전경>
此退溪先生酒誡。爲金應順作也。
生三事一。恩義罔間。而篤愛之情。父子尤切。
庸敢書揭壁上。旣以自戒。因戒忠求。宗族賓友與忠求遊者。願共此戒。
이것은 퇴계(退溪) 선생의 주계(酒誡)로서 김응순(金應順)을 위해 지은 것이다.
낳아 주고 가르치고 먹여 주는 부모와 스승과 임금은 다 같이 한 가지로 섬겨야 하는 바로서 그 은의(恩義)가 서로 간에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그 독실한 애정으로 말하면 부자의 사이가 더욱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감히 이를 써서 벽 위에 붙이고 먼저 스스로를 경계한 다음, 이를 통하여 충구(忠求)를 경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족(宗族)과 빈우(賓友)들로서 충구와 서로 교유하는 자들도 이 경계를 함께하기를 바란다.
(1906년 어느 날, 수당 선생이 아들 충구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퇴계 선생의 주계’를 써서 아들과 그의 친구, 일가에게 쓴 글이다.)
4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 이남규 선생 고택(李南珪 先生 古宅, 충남유형문화재 제68호,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방산로 181-8)을 찾아가기 전 수당가의 인물을 한 분 한 분 짚어보고 가는 것이 예의일 듯하다.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 1855~1907) 선생은 서울에서 부친 이호직(李浩稙)과 모친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 이곡(稼亭 李穀), 목은 이색(牧隱 李穡), 이산해(李山海) 등 고려 말과 조선 시대에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한산이씨(韓山李氏)가의 유학적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구한말 4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다. 수당 선생은 과거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해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 형조참의(刑曹參議)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95년 을미사변 시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 討賊復讐疏)’ 상소를 올려 격렬히 맞섰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토적소(請討賊疏)’ 상소를 올려 매국노를 처단하고 대항할 것을 주장하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1907년 예산에서 칩거하던 수당 선생은 일제에 체포되어 강제 연행되자 “선비는 죽일 수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다”며 스스로 가마에 올랐다. 결국 온양 평촌 냇가에서 장남 이충구(李忠求, 1874~1907), 하인 김응길(金應吉)과 함께 모두 순국했다. 수당의 손자 이승복(李昇馥, 1895~1978)은 연해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귀국해서 조선·동아 및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수당의 증손 이장원(李章遠, 1929∼1951)은 한국전쟁 시 해병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 원산에서 순국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던 수당 선생의 애국충절과 유학자, 예학자, 실학자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아온 선비정신이 대를 이어 독립운동, 호국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이남규 선생 고택은 갈막마을 끝부분 나지막한 산자락에 안긴 듯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고택 바로 위에 있는 방산저수지를 만들 당시 수몰될 위기에 놓였지만 독립지사인 수당 선생뿐만 아니라 훈장을 받은 애국지사가 연이어 배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고택은 1637년(인조 15) 수당 선생의 10대조 이구(李久)의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가 터를 잡고 지었다.
<사랑채>
정자겸 사랑채인 ‘평원정(平遠亭)’은 담장도 없이 사방이 툭 터져 있다. 사랑채 앞마당 입구 돌에 새겨놓은 ‘반환대(盤桓臺)’. 어렴풋이 형태만 남아있는 글자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곳이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인 셈. 여기서 기다리며 집주인의 방문 허락을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 내부>
사랑채는 막돌로 3단 허튼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ㅡ’자형 건물로 전면에 길게 툇마루를 설치하고 좌우측에 각각 분합문을 단 마루방을 배치했다. 양쪽 마루방 뒤로 사랑방과 건넌방을 각각 배치했다. 툇마루를 올라 대청으로 들어가면 특이한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루보다 한 단을 높게 설치해 놓은 ‘고상(高床)’이 바로 그것. 가끔 누정에 이런 공간이 설치되어있긴 하지만 민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안채 전경>
‘튼 ㅁ’ 자형인 안채영역은 높은 축대 위에 문간채를 두고 돌아가며 돌로 장식한 담장을 쌓았다. 달이 뜬 것 같은 월방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대문의 문지방과 상인방을 둥글게 휜 나무를 사용했다.
대문채는 총 7칸 ‘ㅡ’자 건물로 대문칸을 사이에 두고 왼쪽 2칸은 하인이 사용하던 방과 오른쪽 3칸은 광으로 구성되었다.
‘?’자형 안채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건물을 짓다보니 익랑채에서 안대청으로 이르는 기단이 점점 높아진다. 건물이 시작되는 양쪽 익랑채 부엌은 1단 기단으로 시작해 건넌방, 대청에 이르러선 3단이다.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안방을, 왼쪽은 벽감(壁龕)과 마루방을 배치했다. 팔작지붕을 둔 익랑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맞배지붕을 둔 익랑채에는 방과 부엌을 배치했다. 대청의 전면은 부연을 단 겹처마로 해 빗물이 들이치지 않는 것은 물론 안채가 한층 격이 높아 보이도록 했다. 특히 사당 대신 조상의 위패를 모신 벽감을 집안에 두어 이곳에서 차례와 제사를 올린다.
대청에 앉으면 문간채 너머 앞산의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뒤편 바라지창을 열면 후원과 뒷산이 훤히 다 내다보인다. 밖에서 바라보면 폐쇄적인 공간처럼 느껴지지만 안주인이 지은 건물답게 세심하게 배려한 모습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수당기념관>
2008년 문을 연 수당기념관은 수당 선생이 실천한 ‘士可殺 不可辱(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의 고귀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해 건립했다. 또한 수당의 4대, 이남규(李南珪) 이충구(李忠求) 이승복(李昇馥) 이장원(李章遠)으로 이어진 애국·호국 활동을 소개하고 이를 통하여 수당가(修堂家)의 독립·호국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문원 관장 >
수당 선생의 증손인 이문원(李文遠, 1937년생) 관장은 서울에서 40년을 넘게 교직생활을 마치고 제6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하셨다. 칠순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애국지사 후손답게 건장한 체구와 꼿꼿한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2005년 이곳으로 내려와 생활하면서 선조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택을 수리하고 수당가의 애국정신과 선조들의 유물들을 전시한 수당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서울과 예산을 오르내리며 많은 일을 하셨다. 내년에는 사랑채 앞에 있던 연못과 정자 복원 계획이 잡혀 있고, 안채 앞에 있던 행랑채의 복원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라고 푸념하시지만 목소리에선 열정이 넘친다. 그동안 이 관장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기분 좋은 소식이 들린다.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승격될 예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