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초 공예와 평생을 함께한 삶
중요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 이상재

예로부터 강화도에는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완초(왕골) 공예. 과거 임금에게 진상했을 만큼 이 지역 완초 공예품은 최고로 뽑혔다. 원래 화문석, 동고리, 사주함 등과 같은 완초 공예는 교동도라는 섬 일대에서 겨울철과 같은 농한기에 부업으로 만들었었는데, 교동도에 살던 사람들이 강화에 나오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단다. 초록이 완연한 5월. 필자가 강화에서 만난 완초장 이상재 선생도 강화에 완초 공예를 널리 퍼뜨린 인물 중 하나였다.
이상재 선생은 1943년 강화도 옆 작은 섬인 교동도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일흔인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 때 처음 완초를 만지기 시작했으니 벌써 56년째이다. 처음 선생이 완초 공예를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교동 사람들은 당연히 다들 하니까’ 였다. 옛날부터 농사를 짓기 어려웠던 교동도에서는 완초농사를 지었고, 비교적 한가한 겨울철에 쌈짓돈이나 좀 벌어볼까 하는 마음에 남녀 할 것 없이 완초로 소품을 만들어 팔았다.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이 일을 배웠고, 나중에는 당시 솜씨 좋기로 유명했던 고(故) 형식 할아버지한테서 어려운 기술을 익혔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 일을 배웠지만, 손재주가 좋았던 선생은 3년 만에 교동면에서 열린 왕골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알려진 강화 화문석을 비롯해 꽃삼합, 반짇고리, 동고리, 사주함 등 완초 공예로 만드는 소품은 다양하다. 모자와 신발, 가방 등 못 만드는 생활 소품이 없을 정도. 얇은 왕골대를 야무지게 엮어 만든 소품은 단단하기까지 하다. 선생이 방으로 들어서 필자에게 보여주던 보석함과 3개가 한 세트로 된 꽃삼합, 사주함 등 선생의 작품들은 크기가 작든 크든 무늬가 섬세하고 단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름답고 고급스러웠다.
“예전에는 완초 제품이 없어서 못 팔만큼 인기가 많았는데, 이거 말고는 없었으니까요. 요즘은 플라스틱 제품도 많고, 특히 중국산. 질은 떨어져도 가격이 워낙 싸니까 국산 완초 공예품이 잘 안 팔려요. 이 주먹만 한 보석함 한 개가 능숙한 사람이 밤낮해서 3∼4일 걸려요. 힘들죠. 완초 재배 하는 것도 힘들고, 시골에 젊은 사람이 있어야 완초도 키우고 하지요”

완초로 소품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완초로 소품 한 개 만드는데 크기에 따라 적으면 3일, 어떤 건 열흘에서 보름, 한 달까지 걸린다. 원모양으로 만든 완초 소품은 그나마 쉽지만, 글씨가 무늬가 들어가고, 원에서 사각으로 변형되면 그 난이도가 올라간단다. 선생은 혹시 본인이 없을 때 제자들이 완초를 엮다가 어려움이 있으면 보고 따라 하라는 이유에서 제품 한 개 한 개에 샘플을 만들어 고이 보관을 해놨다.
“젊은 사람들이 좀 와서 이 일을 배워줬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그래도 꽤 있지만, 다들 강화도 부녀자들이죠. 애들 다 키워놓고 배우는… 그나마 이 일을 배우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좀 더 젊은… 10대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일을 배워야 대가 안끊기죠. 처음에 배우려고 와도 몇일 하고 포기해요.”
선생의 꿈은 하나다.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다든지 건강하고 싶다든지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 일을 배웠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완초 공예의 대가 끊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힘드시다는 선생. 방 한켠에 수북히 쌓인 완초가 선생의 꿈대로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만져져 더욱 발전하길 바래본다.
완초 공예와 평생을 함께한 삶
중요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 이상재
예로부터 강화도에는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완초(왕골) 공예. 과거 임금에게 진상했을 만큼 이 지역 완초 공예품은 최고로 뽑혔다. 원래 화문석, 동고리, 사주함 등과 같은 완초 공예는 교동도라는 섬 일대에서 겨울철과 같은 농한기에 부업으로 만들었었는데, 교동도에 살던 사람들이 강화에 나오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단다. 초록이 완연한 5월. 필자가 강화에서 만난 완초장 이상재 선생도 강화에 완초 공예를 널리 퍼뜨린 인물 중 하나였다.
이상재 선생은 1943년 강화도 옆 작은 섬인 교동도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일흔인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 때 처음 완초를 만지기 시작했으니 벌써 56년째이다. 처음 선생이 완초 공예를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교동 사람들은 당연히 다들 하니까’ 였다. 옛날부터 농사를 짓기 어려웠던 교동도에서는 완초농사를 지었고, 비교적 한가한 겨울철에 쌈짓돈이나 좀 벌어볼까 하는 마음에 남녀 할 것 없이 완초로 소품을 만들어 팔았다.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이 일을 배웠고, 나중에는 당시 솜씨 좋기로 유명했던 고(故) 형식 할아버지한테서 어려운 기술을 익혔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 일을 배웠지만, 손재주가 좋았던 선생은 3년 만에 교동면에서 열린 왕골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알려진 강화 화문석을 비롯해 꽃삼합, 반짇고리, 동고리, 사주함 등 완초 공예로 만드는 소품은 다양하다. 모자와 신발, 가방 등 못 만드는 생활 소품이 없을 정도. 얇은 왕골대를 야무지게 엮어 만든 소품은 단단하기까지 하다. 선생이 방으로 들어서 필자에게 보여주던 보석함과 3개가 한 세트로 된 꽃삼합, 사주함 등 선생의 작품들은 크기가 작든 크든 무늬가 섬세하고 단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름답고 고급스러웠다.
“예전에는 완초 제품이 없어서 못 팔만큼 인기가 많았는데, 이거 말고는 없었으니까요. 요즘은 플라스틱 제품도 많고, 특히 중국산. 질은 떨어져도 가격이 워낙 싸니까 국산 완초 공예품이 잘 안 팔려요. 이 주먹만 한 보석함 한 개가 능숙한 사람이 밤낮해서 3∼4일 걸려요. 힘들죠. 완초 재배 하는 것도 힘들고, 시골에 젊은 사람이 있어야 완초도 키우고 하지요”
완초로 소품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완초로 소품 한 개 만드는데 크기에 따라 적으면 3일, 어떤 건 열흘에서 보름, 한 달까지 걸린다. 원모양으로 만든 완초 소품은 그나마 쉽지만, 글씨가 무늬가 들어가고, 원에서 사각으로 변형되면 그 난이도가 올라간단다. 선생은 혹시 본인이 없을 때 제자들이 완초를 엮다가 어려움이 있으면 보고 따라 하라는 이유에서 제품 한 개 한 개에 샘플을 만들어 고이 보관을 해놨다.
“젊은 사람들이 좀 와서 이 일을 배워줬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그래도 꽤 있지만, 다들 강화도 부녀자들이죠. 애들 다 키워놓고 배우는… 그나마 이 일을 배우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좀 더 젊은… 10대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일을 배워야 대가 안끊기죠. 처음에 배우려고 와도 몇일 하고 포기해요.”
선생의 꿈은 하나다.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다든지 건강하고 싶다든지가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 일을 배웠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완초 공예의 대가 끊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힘드시다는 선생. 방 한켠에 수북히 쌓인 완초가 선생의 꿈대로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만져져 더욱 발전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