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長山色碧嵯峨 세월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
鍾得乾坤正氣多 천하에 떨친 바른 기상은 여전히 드높아라
北去南來同一義 북으로 떠난 이나 남으로 내려간 이나 의로움은 매한가지
精金堅石不曾磨 금석같이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
-동계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정조의 어제시-
경남 거창은 금원산, 기백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다. 조선 시대 때는 거창으로 발령이 나면 울고 왔다가 울고 갔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워낙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서 오기 싫어서 울었고, 임지를 떠날 때는 산수가 좋아 떠나기가 아쉬워서 울었다고 한다. 거창에는 산과 계곡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곳에 아직도 아담한 정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간간이 찾아오는 꽃샘추위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충절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선생 댁을 방문하는 날은 하늘빛이 유난히 푸르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동계 선생은 조선 선조·광해군·인조 때의 학자로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생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서 죽이고 그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자 이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0여 년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했다. 또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음에도 인조 임금이 항복하자 목숨을 버리려 했던 충신이다. 이때 할복자살에 실패한 동계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고향집에 머물지 않고 덕유산 자락으로 들어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으며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훗날 정조 임금은 선생의 충절을 기려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이 집안의 또 다른 인물, 동계 선생의 현손인 정희량(鄭希亮, ?~1728)은 조선 영조 4년 무신란(戊申亂)을 일으켜 집안을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무신란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가장 큰 반란사건으로 반란에 가담했던 충청과 영·호남의 명문집안들이 대부분 멸문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씨 가문은 30여 명이 연루되어 죽는 등 멸문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동계 선생의 높은 명망 덕분에 사대부층이 구명운동을 벌여 간신히 멸문의 화는 면해 집안이 복구될 수 있었다.

멀리서 선생 댁을 사진에 담으려고 차를 세웠는데 동계 선생의 15대 종손인 정완수(鄭完秀·69세) 선생은 벌써 대문 밖에 나와 손을 기다리고 있다. 외출 준비를 하셨던 터라 긴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선생은 집 안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이곳에서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신다.
거창의 겨울은 길다. 남쪽은 연일 꽃소식이 한창인데도 앞마당의 매화는 아직 필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선생께 여쭤봤더니 “겨우내 얼었던 수도가 며칠 전에 녹았지요. 거창은 추위가 심한 곳이지요.”라며 매화가 피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한단다. 집안 구석구석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 윤기 나는 대청마루. 손이 안 간 곳이 없다. 동계 선생의 14대 종부인 최희 여사는 경주 최 부잣집 딸로 15세 때 이 집으로 시집와서 70년을 넘게 종부로 살고 있다. 맛깔스러운 종가 요리로 유명한 어머님의 안부를 여쭸더니 노모는 병원에 가시고 안 계신다 한다. 85세라는 연세임에도 허리가 약간 불편한 것 빼고는 여전히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건강하게 지내신단다. 노모와 함께 살고 있는 정완수 선생은 6년 전 부인 류성규 여사와 함께 이곳으로 내려왔다. 류성규 여사는 퇴계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은 안동의 명문가 전주 류씨 류치명(柳致明) 선생 집안의 딸로, 시어머니 최희 여사 못지않게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

초계 정씨가 거창 강동마을로 들어온 것은 동계 선생의 조부인 승지공 때부터이다. 동계 선생은 지금 가옥에서 조금 떨어진 역골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자랐다. 거창 정온 선생 가옥(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은 동계 선생의 아버지가 처음 지은 지 약 500년 정도 되었으며, 그 후 순조 20년(1820)에 그의 후손 정종필(鄭宗弼)이 지금의 가옥으로 중건하였다. 정종필의 동생인 정기필(鄭夔弼)이 지은 반구헌(反球軒,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2호)이 바로 옆에 같이 붙어 있다.
정온 선생 가옥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집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는 이 지역 기후의 특징에 맞게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겹집으로 짓는 북부 지방 형식과 기단을 높여서 집을 짓고 높은 툇마루를 두는 남부 지방 형식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려는데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이라고 쓰인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인조 임금은 동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문간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려문을 세우게 했다. 현판이 이 집안의 기품을 한층 더 높여 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당당한 모습의 사랑채가 두 눈 가득 들어온다. 용마루 밑에 짧은 기왓골을 덧대어 만든 눈썹지붕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사랑채 누마루 삼면에는 들어열개 사분합문을 달아 누마루 공간을 언제든지 쉽게 여닫을 수 있게 했다. 분합문들은 아래위를 삼등분하여 가운데는 완자살로 아래위는 정자살로 되어 있는데, 눈썹지붕과 함께 멋진 조화를 이룬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충신당’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동계 선생이 귀양살이한 제주도 대정현에서 귀양살이하게 된 추사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동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훗날 이곳 동계 선생 댁에 들렀을 때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한다.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서면 정면 8칸의 큰 규모의 안채가 당당해 보인다. 넓은 앞마당은 사랑채 뒤로 나란히 앉은 안채의 답답함을 없애준다. ‘ㅡ’자로 길게 지어진 안채는 특이하게도 건넌방 앞에 툇마루를 높이고 난간을 둘렀다. 안채 좌측으로는 큰 규모의 곳간채가 자리 잡고 있고, 안채에 사당이 있다. 지금도 사당 문루에는 정조 임금이 쓴 어제시(御製詩)가 걸려 있다.
정완수 선생은 다른 일정이 있어 바쁜 가운데서도 이것저것 더 설명해 주려 한다. 전국 각지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통에 이곳은 항상 붐빈다. 고택에서의 일과 중 손님 접대도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깨끗하게 살고 싶어요. 조상님들께 욕되지 않게 항상 깨끗한 삶을 살고 싶어요.”라며 이곳에서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대문간까지 따라와 몇 번이고 인사를 건네며 손을 배웅하는 선생. 사람 사는 향취가 느껴지는 그곳에서의 시간은 집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눈앞에 선하다. 고향에서 돌아온 애잔한 그리움 같은 그 무엇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日長山色碧嵯峨 세월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
鍾得乾坤正氣多 천하에 떨친 바른 기상은 여전히 드높아라
北去南來同一義 북으로 떠난 이나 남으로 내려간 이나 의로움은 매한가지
精金堅石不曾磨 금석같이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
-동계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정조의 어제시-
경남 거창은 금원산, 기백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다. 조선 시대 때는 거창으로 발령이 나면 울고 왔다가 울고 갔다, 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워낙 교통이 불편한 오지라서 오기 싫어서 울었고, 임지를 떠날 때는 산수가 좋아 떠나기가 아쉬워서 울었다고 한다. 거창에는 산과 계곡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곳에 아직도 아담한 정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간간이 찾아오는 꽃샘추위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충절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선생 댁을 방문하는 날은 하늘빛이 유난히 푸르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동계 선생은 조선 선조·광해군·인조 때의 학자로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생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서 죽이고 그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자 이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0여 년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했다. 또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하였음에도 인조 임금이 항복하자 목숨을 버리려 했던 충신이다. 이때 할복자살에 실패한 동계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고향집에 머물지 않고 덕유산 자락으로 들어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으며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훗날 정조 임금은 선생의 충절을 기려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이 집안의 또 다른 인물, 동계 선생의 현손인 정희량(鄭希亮, ?~1728)은 조선 영조 4년 무신란(戊申亂)을 일으켜 집안을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무신란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가장 큰 반란사건으로 반란에 가담했던 충청과 영·호남의 명문집안들이 대부분 멸문되었다. 이 사건으로 정씨 가문은 30여 명이 연루되어 죽는 등 멸문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동계 선생의 높은 명망 덕분에 사대부층이 구명운동을 벌여 간신히 멸문의 화는 면해 집안이 복구될 수 있었다.
멀리서 선생 댁을 사진에 담으려고 차를 세웠는데 동계 선생의 15대 종손인 정완수(鄭完秀·69세) 선생은 벌써 대문 밖에 나와 손을 기다리고 있다. 외출 준비를 하셨던 터라 긴 시간을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선생은 집 안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이곳에서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신다.
거창의 겨울은 길다. 남쪽은 연일 꽃소식이 한창인데도 앞마당의 매화는 아직 필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선생께 여쭤봤더니 “겨우내 얼었던 수도가 며칠 전에 녹았지요. 거창은 추위가 심한 곳이지요.”라며 매화가 피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한단다. 집안 구석구석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 윤기 나는 대청마루. 손이 안 간 곳이 없다. 동계 선생의 14대 종부인 최희 여사는 경주 최 부잣집 딸로 15세 때 이 집으로 시집와서 70년을 넘게 종부로 살고 있다. 맛깔스러운 종가 요리로 유명한 어머님의 안부를 여쭸더니 노모는 병원에 가시고 안 계신다 한다. 85세라는 연세임에도 허리가 약간 불편한 것 빼고는 여전히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건강하게 지내신단다. 노모와 함께 살고 있는 정완수 선생은 6년 전 부인 류성규 여사와 함께 이곳으로 내려왔다. 류성규 여사는 퇴계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은 안동의 명문가 전주 류씨 류치명(柳致明) 선생 집안의 딸로, 시어머니 최희 여사 못지않게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
초계 정씨가 거창 강동마을로 들어온 것은 동계 선생의 조부인 승지공 때부터이다. 동계 선생은 지금 가옥에서 조금 떨어진 역골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자랐다. 거창 정온 선생 가옥(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은 동계 선생의 아버지가 처음 지은 지 약 500년 정도 되었으며, 그 후 순조 20년(1820)에 그의 후손 정종필(鄭宗弼)이 지금의 가옥으로 중건하였다. 정종필의 동생인 정기필(鄭夔弼)이 지은 반구헌(反球軒,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2호)이 바로 옆에 같이 붙어 있다.
정온 선생 가옥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집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는 이 지역 기후의 특징에 맞게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겹집으로 짓는 북부 지방 형식과 기단을 높여서 집을 짓고 높은 툇마루를 두는 남부 지방 형식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려는데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이라고 쓰인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인조 임금은 동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문간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려문을 세우게 했다. 현판이 이 집안의 기품을 한층 더 높여 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당당한 모습의 사랑채가 두 눈 가득 들어온다. 용마루 밑에 짧은 기왓골을 덧대어 만든 눈썹지붕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사랑채 누마루 삼면에는 들어열개 사분합문을 달아 누마루 공간을 언제든지 쉽게 여닫을 수 있게 했다. 분합문들은 아래위를 삼등분하여 가운데는 완자살로 아래위는 정자살로 되어 있는데, 눈썹지붕과 함께 멋진 조화를 이룬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충신당’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동계 선생이 귀양살이한 제주도 대정현에서 귀양살이하게 된 추사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동계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훗날 이곳 동계 선생 댁에 들렀을 때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 한다.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서면 정면 8칸의 큰 규모의 안채가 당당해 보인다. 넓은 앞마당은 사랑채 뒤로 나란히 앉은 안채의 답답함을 없애준다. ‘ㅡ’자로 길게 지어진 안채는 특이하게도 건넌방 앞에 툇마루를 높이고 난간을 둘렀다. 안채 좌측으로는 큰 규모의 곳간채가 자리 잡고 있고, 안채에 사당이 있다. 지금도 사당 문루에는 정조 임금이 쓴 어제시(御製詩)가 걸려 있다.
정완수 선생은 다른 일정이 있어 바쁜 가운데서도 이것저것 더 설명해 주려 한다. 전국 각지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통에 이곳은 항상 붐빈다. 고택에서의 일과 중 손님 접대도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깨끗하게 살고 싶어요. 조상님들께 욕되지 않게 항상 깨끗한 삶을 살고 싶어요.”라며 이곳에서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대문간까지 따라와 몇 번이고 인사를 건네며 손을 배웅하는 선생. 사람 사는 향취가 느껴지는 그곳에서의 시간은 집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눈앞에 선하다. 고향에서 돌아온 애잔한 그리움 같은 그 무엇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