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영천 매산 고택 (梅山 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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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이 푸른 하늘을 덮어 비가 오니

   하늘과 산을 분간할 수가 없네.

   문득 구름과 비가 걷히니

   하늘과 산이 본래 모양으로 돌아오네.

 

 스승이 구름 낀 산을 보고 운(韻)을 띄우니 열 살 나이의 어린 정중기가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시를 지어내니 스승은 크게 기뻐하며 앞으로 크게 될 인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매산 정중기(鄭重器, 1686~1757)는 영일정씨 함계공 정석달(鄭碩澾)과 안동 권씨 권숙(權塾)의 장남으로 영천 자양면 선원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 주위의 선비들이 모두 감탄하였다고 한다. 1715년 사마시 합격을 시작으로 병조 좌랑(兵曹佐郞),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형조 참의(刑曹參議)까지 올랐었다.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아우와 사촌 동생이 천연두에 걸려 목숨을 잃어버리자 선원리에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매곡마을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이 고택의 시초로 매산의 둘째 아들인 정일찬(鄭一鑽)이 완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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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이 터를 잡은 매곡마을은 낙동정맥 보현산에서 이어진 기룡산 자락 남쪽 줄기가 만들어 놓은 좁은 계곡 안에 들어앉아 있다. 풍수가들은 매산의 주 능선을 매화낙지(梅花落枝)에 비유하고 거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여러 지맥을 매화 꽃잎에 비유하고 있다. 매화 꽃잎의 꽃술에 해당하는 자리가 바로 매산고택이 앉아 있는 자리라고 한다. 
 매산 정중기가 쓴 매곡우사에서도 마을의 입지를 “겹겹이 싸인 산과 작은 시내에 우묵 들어간 곳이 있어, 이것을 매단혈(梅丹穴)이라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13년에 걸쳐 집을 지은 매산 정중기는 당호도 유학의 경전 중의 하나인 주역(周易)에서 따와 간소(艮巢)라 짓고, 선생 자신도 매곡이라는 산속에 숨어들어 세속에 대한 욕망을 접고 멈출 줄 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완성한 정자인 산수정(山水亭) 역시 육십사괘의 간괘(艮卦) 논리에서 ‘산(山)’과 ‘수(水)’를 따와 어리석은 자가 바른길을 가게 되면 삶에 형통하게 된다는 유학적 교육 의도와 계몽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이름을 지었다.

 

 매곡마을 입구를 들어서니 적당히 높은 둥근 봉우리가 인상적인 산들이 길손을 먼저 반긴다. 저 멀리 경북 영천 매산 고택(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중요민속문화재 제24호) 이정표가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설 때면 난 묘한 흥분감이 든다. 안채 어디선가 안주인은 인기척을 느끼고 지나가는 길손인지 지인인지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을 터. 그 옛날 안주인의 눈빛이 느껴지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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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조심스레 집을 돌아보는데, 장마 한가운데 있어서인지 금세 후두두둑 비가 쏟아진다. 안채에서 매산 선생의 11대 종손인 정문현 선생이 처마 끝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곤 웃으며 마중을 나온다. 안채로 먼저 들어오라며 안채 이곳저곳을 보여주는 선생은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추억까지 얘기한다.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어렸을 때 보았던 까맣고 반들반들했던 대청마루의 모습이 지금도 여기 오를 때마다 생생하게 떠오른다”며 그때를 추억한다. 그리고는 대청마루에 올라 앞산을 한 번 보라 한다. 아! 여기가 바로 거기구나 싶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 이곳저곳에서 자료를 찾으며 잠시 스쳐 지나가듯 읽었던 내용. 바로 앞에 풍수지리가들이 말하는 호접봉(나비가 날아 앉은 듯한 모양)이 펼쳐진다. 우리 한옥은 집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주변 풍경을 감상해야 함을, 집을 지을 때 우리 선조가 얼마나 지혜로웠었나를 새삼 느끼게 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양쪽에 방앗간채와 작은 사랑채가 있던 곳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근사한 누마루가 구성된 사랑채는 마당에 들어서면 별도의 건물처럼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특이하게도 안채와 ‘?’자형으로 서로 연결된 안동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뜰집형 가옥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중심부에 6칸의 시원하고 널찍한 대청마루는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초익공의 공포까지 짜는 장식을 하였다. 이곳의 경사진 지형을 잘 이용해서 지어진 안채는 사랑채 뒤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대청에 오르면 시야가 시원스레 탁 트여 있다. 대청마루 우측에는 안방과 부엌, 마루방으로 된 광이 있고, 좌측에는 건넌방과 마루방, 고방이 이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 문들을 활짝 열어젖힌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문들을 액자 삼아 한 폭의 풍경화처럼 걸린다. 선생은 이 집안만이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공간 한 곳을 보여주겠다며 작은 사랑방 안쪽에 붙은 골방의 문을 열었다. 이 방은 벽면과 바닥을 황토와 보리까락(보리의 낟알 겉껍질에 붙은 수염)을 배합해 만들어 놓아 집안에 초상이 나면 시신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보관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황토와 보리까락이 부패를 방지하고 방 안의 공기를 서늘하게 하는 원리를 이용한 우리 조상의 지혜가 엿보이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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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다 더 근사한 곳이 있다며 간간이 내리는 빗줄기에도 아랑곳없이 앞장서서 이 집안의 정자 인 ‘산수정(山水亭)’으로 안내한다. 산수정은 매산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에 올라보니 옛날 어른들이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사계절 변화하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풍류를 즐기던 그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산수정은 암벽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정자로 좌우 양쪽 칸에 온돌방을 만들어 별당처럼 지었다. 이곳은 사랑채에 머물던 선생의 할아버지께서 유월 여름이 시작하면 올라와서 여름이 끝날 무렵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산수정 바로 뒤에는 할아버지의 수발만을 전담하던 사람이 머물던 집까지 따로 마련돼 있었다.

 

 정문현 선생은 조금은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서울 생활 탓에 요즘은 한 달에 일주일 정도 이곳에 내려와 머물며 청소도 하고 관리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집에 내려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쓸쓸하게 혼자서 기다린 집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이란다. 집도 분위기를 타는지 한 달 만에 내려오면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아침이면 새소리, 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깨고 하루 이틀만 지나면 처음부터 여기에서 살았던 것처럼 편안하다고 한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으며, 이후에도 방학 때가 되면 언제나 이곳으로 내려와 지냈단다. 비록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지만, 1986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께서 이곳에서 사셨다 한다. 몇 년 후가 될지 약속할 수는 없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와 선생도 이곳 매산 고택에서 살 작정이란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싶다”는 정문현 선생. 그 옛날 가족들이 함께 북적이며 살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짧은 동안이나마 나는 매산 고택에서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고택을 지키며 찾아온 이를 보내는 사람은 늘 그리움과 아쉬움을 안고 있는 듯하다. 오늘도 인사를 나누며 약속을 한다. 훗날 꼭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사진 설명(위에서부터 차례로)

1. 입구에서 본 영천 매산 고택

2. 영천 매산 고택 안채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전경

3. 매산 정중기의 11대 종손 정문현 선생

4. 영천 매산 고택 정자 '산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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