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고택]해남 녹우당 (綠雨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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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구즌비 머저가고 시낻물이 맑아온다 (궂은 비 점차 멈춰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떠라 배떠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낫대를 두러 메니 기픈 興을 禁목 할돠 (낚시대를 둘러메고 깊은 흥이 절로난다)

至국悤 至국悤 於思臥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煙江疊?은 뉘 라셔 그려 낸고 (산수의 경개를 그 누가 그려낸고)

 

-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 하사1 -

 

 우리나라 최고의 시조문학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서울 연지동에서 아버지 해남윤씨 윤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2남으로 태어나 8세가 되던 해에 큰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해남 윤씨 대종가를 잇는다. 천성적으로 곧은 성격의 고산은 부당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끝까지 펼쳐 일생동안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30세(광해군 8)가 되던 해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집권파인 북인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상소문은 임금에게 전해지지도 못한 채 6년 간 유배생활을 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난다. 
42세(인조 6년) 때 별시초시에 장원급제하며 출사의 꿈을 펼치게 된 고산은 5년간 훗날 효종 임금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師傅)와 요직을 두루 걸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산 윤선도는 향리 자제와 가졸 등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배편으로 강화도로 향한다. 이미 왕자들은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가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자 고산은 세상을 개탄하며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린다. 하지만 도중에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닿았다가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반해 은거지로 정한다. 
 고산은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을 짓고 자연에 묻혀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수많은 시조를 지어냈다. 72세가 되던 해 고산은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工曺參議) 제수받게 되었지만 서인들의 탄핵으로 결국 삭직되었다. 효종은 사부인 고산이 멀리 해남에 있으면 왕의 과실을 충고하기 어렵다하여 화성(수원)에 집을 지어 그곳에 살도록 했다. 왕이 승하하자 인조계비(장렬왕후)의 복제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대립되어 또다시 고산은 81세 유배에서 풀릴 때까지 7년 동안 세번째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고산은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보길도 부용동에서 유배와 은둔생활을 거듭한 굴곡 많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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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해남 덕음산 자락에 자리 잡은 녹우당(錄雨堂, 사적 제167호,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5)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 중 하나이다. 고산의 4대조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은 강진 덕진동에서 해남 백련동(지금의 연동마을)에 터를 잡고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시조가 되어 해남윤씨가가 해남지역에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큰 기틀을 마련했다.

 

 해남시내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연동마을에 들어서면 백련을 심어놓은 연지와 소나무숲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집을 지을 당시 함께 만든 연지는 연못을 파고 나온 흙으로 동산을 마음심(心) 형태로 조성할 만큼 어초은은 성리학적 이상향을 추구했다. 대저택이라 고택까지는 좀 걸어 올라야 한다. 그래도 주변풍경을 감상하다보면 금방이다. 뒷산의 사계절 푸르름을 간직한 비자림(천연기념물 제241호)과 대문 앞에는 수령이 500년 된 은행나무가 그 이름을 대변해주고 있다. 녹우당이란 당호는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는 모습’ 또는 ‘집 뒤 대나무와 비자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인공으로 조성된 비자나무숲은 어초은이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유훈을 남겨 후손들이 나무를 심어 수령이 300년 된 비자나무 4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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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이제 이름처럼 아름다운 고택, 녹우당의 솟을대문 앞에 선다.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는 ‘ㄱ’자 형으로 가운데 솟을대문을 두고 방과 곳간, 마굿간, 부엌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정원이 잘 꾸며진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가 높게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효종이 고산에게 수원에 하사한 집으로, 고산이 82세가 되던 해에 해남까지 뱃길로 옮겨와 다시 지었다. 사랑채는 ‘ㅡ’자형 건물로 전면과 측면에 퇴를 둔 4칸 집으로, 좌측에 사랑방을 우측에 대청을 배치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다른 고택에서는 보기 드문 겹처마 양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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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차양(遮陽)구조를 달아냈으며, 좌측으로 한단 낮게 2칸이 분리되어 있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500년 전 어초은이 지은 당시의 건물로 사랑채 뒤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정원이 있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앙에 3칸 대청과 그 뒤편으로 마루방이 있고 그 옆으로 작은 온돌방이 2칸이 있으며, 끝으로 큰 부엌이 붙어 있다. 특히 안채 큰 부엌과 건넛방 부엌 상부에 설치되어 있는 솟을지붕은 환기용 구조물로 우리 고택에서는 흔치않다. 사당은 3곳으로, 안채 대나무 숲 뒤로 4대조를 받드는 가묘와 고택 뒤로 술길로 오르는 길에 어초은사당과 고산사당이 있다. 또 하나의 볼거리, 지난 2010년에 개관한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에는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 10점 등을 비롯해 고산 윤선도와 해남윤씨가에서 남긴 문집과 글씨, 그림 등 4,600여 점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산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오르는 길이든 내려오는 길이든 꼭 들러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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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


 현재 해남 녹우당에는 고산의 14대손 윤형식(79세) 선생 부부가 살고 계신다. 지난 4월 안채 보수를 시작했지만 문화재위원들의 정확한 보수방향이 결정이 나지 않아 공사는 시작도 못한 채 해체된 채로 중단되어 그대로 5개월째 방치 중이다. 노부부는 그저 문화재청의 결정을 기다리고만 계신다. 선생이 생활하시는 사랑채에 올랐다. 두 대의 선풍기가 열심히 돌고 있지만 35도를 오르내리며 기승을 부리는 폭염을 식히기엔 역부족이다. 힘겨워 보이는 이 모습이 대부분 고택의 현실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동안 외국계 회사에 근무했다. 직접 회사를 설립해 경영도 하다가 45세에 녹우당으로 들어왔다. 선생은 당시에는 집이 비가 샐 정도로 많이 훼손되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고 하셨다. 문화재 수리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나 선례도 없고, 전문기술자도 없었지만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수리를 하고 해남윤씨 종가의 종손으로써 해야 할 일들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선생의 5대조까지 산소부터 관리를 했고, 선조들이 남긴 책과 고문서들을 전문가에게 맡겨 정리?번역해 문헌들을 책으로 발간하고, 자료들을 디지털화하기 시작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녹우당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소홀함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접빈객 봉사에 여념이 없다. 
 선생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아 매일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맞는다. 더 바램이 있다면 문화재청이나 지자체에서 전통 고택에 대한 연구를 해서 주인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하신다. 더 이상 고택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문화재에 대해선 국가에서 관리를 하고 주인이 생활할 수 있는 고택의 품위에 어울리는 집을 지어줬으면 좋겠고, 자식이나 손자에게는 선생과 같은 고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시며 웃으신다. 연로해서 고택에서 지내시기 불편해 보이지만 그래도 활기차게 생활하시는 선생의 모습이 근사하다. 
 집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종손으로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계시는 선생 같은 분이 계셔서 녹우당이 더욱 빛이 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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