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Viet Nam)의 수도 하노이에 있는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Imperial Citadel of Thang Long-Hanoi)은 다이비엣(Đại Việt)의 독립을 기념하여 11세기에 리 비엣 왕조(Ly Viet Dynasty)가 홍강(紅江, Red River) 삼각주에 건설한 유적지이다.
거의 13세기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한 하노이 탕롱은 베트남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며, 유물과 유적층이 다양하게 보존되고 있다. 하노이 중심지에 자리 잡은 탕롱의 18개의 고고학 유적지 성채와 유적들은 중국의 문화와 남쪽으로는 고대 참파 왕국의 문화가 만나 독특한 동남아시아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Vincent Ko Hon Chiu>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에는 7세기에 건설된 중국 성벽과 유적, 리왕조가 건설한 킨티엔 궁(Kinh Thien Palace), 황제의 순행 거처로 사용되던 북쪽 성채, 19세기에 건설된 총독의 관저 등 왕조 시대부터 근대까지 건설된 유서 깊은 건축 유산에는 다양한 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역사까지 반영하고 있다.
<저자=Geoff Steven>
베트남 하노이는 기원 전 삼천년 경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으며, 코로아 성채는 기원전 3세기에 세워졌다. 7세기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는 이곳 하노이가 원난과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교역로에 위치해 있어 거점도시로 성장하였으며 당시 지은 중국 성벽과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 10세기 베트남의 첫 번째 리 왕조(1009~1225)가 독립 왕국 다이비엣을 건국하였다. 리 왕조는 중국의 유적이 있던 곳에 새로운 ‘떠오르는 용’이라는 뜻의 탕롱을 건설하며 1029년 벽돌로 건축된 ‘금단의 도시(Forbidden City)’를 확장하고 방어벽을 쌓았다. 불교문화를 이루던 다이비엣 왕국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넓혀나가다가 레(黎, Le, 1428~1789) 왕조로 바뀌면서 유교적인 문화로 바뀌게 된다. 당시 건설된 킨티엔 궁을 비롯해 탕롱 성채의 규모는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최대에 이르렀고, 이곳에 종사한 공인·상인들 구역도 발달하였다.
<저자=Vincent Ko Hon Chiu>
하지만 17세기에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북쪽의 찡(鄭, Trinh) 가문과 남쪽의 응우옌(阮, Nguyen) 가문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18세기 초에 이르러 응우옌 가문이 마침내 후에(Hué)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새 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새 왕조의 건설로 탕롱은 황제가 이 지역을 순행할 때 거처로 이용되었으며 그때 이용했던 북쪽 성채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저자= Bui Minh Tri>
<저자=Bui Minh Tri>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군대가 근대 베트남 남부 지역에 주둔하면서 1880년대에는 북부 지역도 정복하였다. 다시 한 번 권력의 중심지가 된 탕롱은 근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이루어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거대한 식민지 권력의 총본부 역할을 하며 킨티엔 궁을 비롯한 많은 궁전이 유럽 양식,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다시 건설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총독의 관저가 건설되었고, 고대 성채 주변과 그 내부에 유럽 양식의 도시 개발을 위하여 요새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저자=Vincent Ko Hon Chiu>
탕롱은 1954년 제1차 독립전쟁과 베트남의 분단 이후에는 북베트남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으며 1967년 남베트남과 미국이 싸운 제2차 전쟁 중에는 킨티엔 궁의 경내에 D67 사령부 지하 벙커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탕롱 성채는 1994년부터 점진적으로 문화·역사적 용도로 바뀌게 되고, 2002년 ‘호앙 지에우 18 고고학유적지’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자료제공=유네스코와 유산, http://en.unesco.org/ , 두산백과
베트남(Viet Nam)의 수도 하노이에 있는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Imperial Citadel of Thang Long-Hanoi)은 다이비엣(Đại Việt)의 독립을 기념하여 11세기에 리 비엣 왕조(Ly Viet Dynasty)가 홍강(紅江, Red River) 삼각주에 건설한 유적지이다.
거의 13세기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한 하노이 탕롱은 베트남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며, 유물과 유적층이 다양하게 보존되고 있다. 하노이 중심지에 자리 잡은 탕롱의 18개의 고고학 유적지 성채와 유적들은 중국의 문화와 남쪽으로는 고대 참파 왕국의 문화가 만나 독특한 동남아시아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Vincent Ko Hon Chiu>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탕롱의 제국주의 시대 성채 중앙 구역에는 7세기에 건설된 중국 성벽과 유적, 리왕조가 건설한 킨티엔 궁(Kinh Thien Palace), 황제의 순행 거처로 사용되던 북쪽 성채, 19세기에 건설된 총독의 관저 등 왕조 시대부터 근대까지 건설된 유서 깊은 건축 유산에는 다양한 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역사까지 반영하고 있다.
<저자=Geoff Steven>
베트남 하노이는 기원 전 삼천년 경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으며, 코로아 성채는 기원전 3세기에 세워졌다. 7세기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는 이곳 하노이가 원난과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교역로에 위치해 있어 거점도시로 성장하였으며 당시 지은 중국 성벽과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 10세기 베트남의 첫 번째 리 왕조(1009~1225)가 독립 왕국 다이비엣을 건국하였다. 리 왕조는 중국의 유적이 있던 곳에 새로운 ‘떠오르는 용’이라는 뜻의 탕롱을 건설하며 1029년 벽돌로 건축된 ‘금단의 도시(Forbidden City)’를 확장하고 방어벽을 쌓았다. 불교문화를 이루던 다이비엣 왕국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넓혀나가다가 레(黎, Le, 1428~1789) 왕조로 바뀌면서 유교적인 문화로 바뀌게 된다. 당시 건설된 킨티엔 궁을 비롯해 탕롱 성채의 규모는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최대에 이르렀고, 이곳에 종사한 공인·상인들 구역도 발달하였다.
<저자=Vincent Ko Hon Chiu>
하지만 17세기에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북쪽의 찡(鄭, Trinh) 가문과 남쪽의 응우옌(阮, Nguyen) 가문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18세기 초에 이르러 응우옌 가문이 마침내 후에(Hué)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새 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새 왕조의 건설로 탕롱은 황제가 이 지역을 순행할 때 거처로 이용되었으며 그때 이용했던 북쪽 성채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저자= Bui Minh Tri>
<저자=Bui Minh Tri>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군대가 근대 베트남 남부 지역에 주둔하면서 1880년대에는 북부 지역도 정복하였다. 다시 한 번 권력의 중심지가 된 탕롱은 근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이루어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거대한 식민지 권력의 총본부 역할을 하며 킨티엔 궁을 비롯한 많은 궁전이 유럽 양식,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다시 건설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총독의 관저가 건설되었고, 고대 성채 주변과 그 내부에 유럽 양식의 도시 개발을 위하여 요새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저자=Vincent Ko Hon Chiu>
탕롱은 1954년 제1차 독립전쟁과 베트남의 분단 이후에는 북베트남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으며 1967년 남베트남과 미국이 싸운 제2차 전쟁 중에는 킨티엔 궁의 경내에 D67 사령부 지하 벙커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탕롱 성채는 1994년부터 점진적으로 문화·역사적 용도로 바뀌게 되고, 2002년 ‘호앙 지에우 18 고고학유적지’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자료제공=유네스코와 유산, http://en.unesco.org/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