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정자는 숫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가히 조선의 정자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한양서 본 영남지방의 정자를 좌 안동, 우 함양 이라 했다.
주자 성리학의 정신적인 축을 형성하신 퇴계 선생의 고향근처 예안 및 도산을 비롯해 오천, 풍산 등의 정자를 살펴보자.
안동문화는 퇴계 선생이 연상된다. 한 세대 아래인 율곡 선생과 비교하기도 한다. 퇴계의 유명한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퇴계의 학문은 명쾌하고 쉽다. 덕은 온화하고 상서로운 구름 같다.....”로 칭송하였다.
<퇴계종택>
퇴계 종택 내의 추월한수정은 봉화 닭실마을 입향조인 충재 권벌 선생의 5세손인 창설재 권두경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퇴계가 자라고, 공부하고, 은퇴 후 머문 도산면 토계리 상계에 세운 정자
<추월한수정>
남송의 유학자 주자의 시 ‘재거감흥’의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 가을 달이 찬 강물을 비춘다)에 바탕을 두었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밝기만 한 가을 달이 차가운 강물을 비추는 투명하고 밝은 현인의 마음을 뜻한다.
<노송정>
노송정은 퇴계 선생의 조부 노송정 이계양이 1454년 도산면 온혜리에 입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이계양이 봉화 훈도로 있을 때, 온혜를 지나면서 산수가 수려함을 느낄 때 마침 풍수에 해박한 승려와 만나게 된다. 그 승려가 대유학자가 나올수 있는 길지의 집터를 잡아주었다. 손자 퇴계가 이곳 노송정 종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논어의 자한편 구절인 “歲寒然後 知松栢 之後彫也 (새한연후 지송백 지후조야)에 근거한 매서운 추위가 온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꿋꿋한 선비의 지조를 의미한다.
<수졸당>
수졸당은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 이영도 선생이 분가 하실 때 지어진 하계파의 종택이다. 이 집은 본채, 정자, 사당, 재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계 종택' 또는 '동암 종택' 이라 부르기도한다. 이는 동암의 장자 수졸당 이기 선생의 호를 당호로 사용하였다. 동암은 영특함과 포용력이 남달라 퇴계로부터 '나와 재능을 계승할 자는 이 아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형이 일찍 죽어 퇴계 후사 문제가 불거졌을 때 동암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는 관행을 거부하고 큰 집을 지키고자 했다. 동암은 홀로된 형수를 돌보며 둘째 아들을 성장시켜 혼인과 동시에 큰 집으로 보내 퇴계종가를 보전하였다. 수졸당 이기 선생은 “실속없이 겉만 화려함을 없애고 본래의 모습을 깊고 맑게 성찰했으며, 자신의 드러냄을 감추고 수양하면서 남이 알아 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라는 그 당대에 현실성 있는 사고를 하였다
<탁청정>
<후조당>
후조당은 외내 광산김씨인 김부필 선생의 종택 별당 정자이다. 김부필은 대사헌을 지낸 김연의 아들이며 탁청정 김수의 조카로,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성리학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나, 정계에는 뜻이 없어 관직을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문순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곳을 군자리라 칭하는데 그 이유는 예안입향 시조인 김효로 이후 3대만에 광산김씨 문중은 명문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김효로의 친손이나 외손으로 구성된 세칭 ‘오천 칠군자’가 배출된 영향이 크다.
한강 정구가 안동 부사로 재임시에 오천 마을을 방문한 다음 “한 집안 식구 모두가 착하기 어려운데 오천 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 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소산마을 청원루>
풍산읍 소산마을의 청원루는 평양 서윤을 지낸 김반이 살던 집으로 청음 김상헌이 누각으로 고쳐 세웠다. 'ㄷ'자형의 아주 독특한 누각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여, 1641년에 청나라에 끌려가 4년 동안 고초를 격었다. 돌아온 김상헌이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으로, 기존 건물을 누각식으로 중건하면서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하였다.
그가 청나라 가기전에 고향을 그리던 한 많은 시구를 살펴보자.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라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여 올동말동하여라.
<삼구정>
삼구정은 소산 입향조인 김혁의 증손인 김영전이 사헌부 감찰시 조성하였으며, 노모를 즐겁게 해드리고자 하였다. 삼구정이란 십장생인 거북과 같이 생긴 3개의 바위가 정자를 등에 진 것 같은 모습으로 정자 뜰에 소반처럼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3마리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밖에도 이렇게 이름을 붙인 연유는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는 효성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양동마을에도 수졸당이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언적의 손자 수졸당 이의잠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다.
<인터넷상의 관련글도 참조 했음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정중수 교수
국립안동대학교 공과대학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정자는 숫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가히 조선의 정자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한양서 본 영남지방의 정자를 좌 안동, 우 함양 이라 했다.
주자 성리학의 정신적인 축을 형성하신 퇴계 선생의 고향근처 예안 및 도산을 비롯해 오천, 풍산 등의 정자를 살펴보자.
안동문화는 퇴계 선생이 연상된다. 한 세대 아래인 율곡 선생과 비교하기도 한다. 퇴계의 유명한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퇴계의 학문은 명쾌하고 쉽다. 덕은 온화하고 상서로운 구름 같다.....”로 칭송하였다.
<퇴계종택>
퇴계 종택 내의 추월한수정은 봉화 닭실마을 입향조인 충재 권벌 선생의 5세손인 창설재 권두경이 퇴계의 도학을 추모해 퇴계가 자라고, 공부하고, 은퇴 후 머문 도산면 토계리 상계에 세운 정자
<추월한수정>
남송의 유학자 주자의 시 ‘재거감흥’의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 가을 달이 찬 강물을 비춘다)에 바탕을 두었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밝기만 한 가을 달이 차가운 강물을 비추는 투명하고 밝은 현인의 마음을 뜻한다.
<노송정>
노송정은 퇴계 선생의 조부 노송정 이계양이 1454년 도산면 온혜리에 입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이계양이 봉화 훈도로 있을 때, 온혜를 지나면서 산수가 수려함을 느낄 때 마침 풍수에 해박한 승려와 만나게 된다. 그 승려가 대유학자가 나올수 있는 길지의 집터를 잡아주었다. 손자 퇴계가 이곳 노송정 종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논어의 자한편 구절인 “歲寒然後 知松栢 之後彫也 (새한연후 지송백 지후조야)에 근거한 매서운 추위가 온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꿋꿋한 선비의 지조를 의미한다.
<수졸당>
수졸당은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 이영도 선생이 분가 하실 때 지어진 하계파의 종택이다. 이 집은 본채, 정자, 사당, 재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계 종택' 또는 '동암 종택' 이라 부르기도한다. 이는 동암의 장자 수졸당 이기 선생의 호를 당호로 사용하였다. 동암은 영특함과 포용력이 남달라 퇴계로부터 '나와 재능을 계승할 자는 이 아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형이 일찍 죽어 퇴계 후사 문제가 불거졌을 때 동암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다'는 관행을 거부하고 큰 집을 지키고자 했다. 동암은 홀로된 형수를 돌보며 둘째 아들을 성장시켜 혼인과 동시에 큰 집으로 보내 퇴계종가를 보전하였다. 수졸당 이기 선생은 “실속없이 겉만 화려함을 없애고 본래의 모습을 깊고 맑게 성찰했으며, 자신의 드러냄을 감추고 수양하면서 남이 알아 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라는 그 당대에 현실성 있는 사고를 하였다
<탁청정>
<후조당>
후조당은 외내 광산김씨인 김부필 선생의 종택 별당 정자이다. 김부필은 대사헌을 지낸 김연의 아들이며 탁청정 김수의 조카로,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성리학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나, 정계에는 뜻이 없어 관직을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문순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곳을 군자리라 칭하는데 그 이유는 예안입향 시조인 김효로 이후 3대만에 광산김씨 문중은 명문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김효로의 친손이나 외손으로 구성된 세칭 ‘오천 칠군자’가 배출된 영향이 크다.
한강 정구가 안동 부사로 재임시에 오천 마을을 방문한 다음 “한 집안 식구 모두가 착하기 어려운데 오천 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 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소산마을 청원루>
풍산읍 소산마을의 청원루는 평양 서윤을 지낸 김반이 살던 집으로 청음 김상헌이 누각으로 고쳐 세웠다. 'ㄷ'자형의 아주 독특한 누각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여, 1641년에 청나라에 끌려가 4년 동안 고초를 격었다. 돌아온 김상헌이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으로, 기존 건물을 누각식으로 중건하면서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하였다.
그가 청나라 가기전에 고향을 그리던 한 많은 시구를 살펴보자.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라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여 올동말동하여라.
<삼구정>
삼구정은 소산 입향조인 김혁의 증손인 김영전이 사헌부 감찰시 조성하였으며, 노모를 즐겁게 해드리고자 하였다. 삼구정이란 십장생인 거북과 같이 생긴 3개의 바위가 정자를 등에 진 것 같은 모습으로 정자 뜰에 소반처럼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3마리 거북이 엎드린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밖에도 이렇게 이름을 붙인 연유는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는 효성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양동마을에도 수졸당이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언적의 손자 수졸당 이의잠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다.
<인터넷상의 관련글도 참조 했음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
정중수 교수
국립안동대학교 공과대학
정보통신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