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원림조영 방식은 명조(明朝)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일석(一石) 일수(一水)의 배치를 통한 대칭적 상징에서 탈피해 조영자의 이념과 사상이 결합된 하나의 독립된 세계의 창조라는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명나라 초기에는 주원장의 원림조영 금지령으로 인해 원림의 발전이 제한되고 쇠락의 길을 걷는 듯 했으나 곧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자, 옛 원림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원림조영이 활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은일(隱逸)사상의 원림 조영은 여전히 유행하였으나 생산적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관상과 유락을 위한 장소로 탈바꿈 하게 된다.
진한(秦漢) 시대의 자연적 원림의 형태에서 당송(唐宋)의 산수화 기법을 통한 원림 조영 방식은 명대에 이르러 변화를 맞게 된다. 특히 원림 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가산의 축조에 변화가 주목된다. 진한시대, 흙(土)을 취해 산을 조성한 후 돌을 배치하던 방식은 명대(明代)에 이르러 돌을 위주로 하여 산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고 이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돌이 풍부하였던 중국의 남방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가산의 조성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고, 가산조성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명대 가산(假山)으로 내노라 할만한 대표적 인물은 계성(計成), 주병충(周秉忠), 장남양(張南陽), 석도(石濤), 과유량(戈裕良)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중국 강남 원림 내 가산조성 및 원림 예술에 지대한 영향 끼친 인물들이다. 이중 예원을 조영한 장남양의 첩석(疊石) 기술과 원림 설계 방식은 지금 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그 명성이 퇴색되지 않고 있다. 이번호에 예찬할 인물이 바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남양이다.
<응야평-예원대 가산도>
장남양(張山人, 1517~1596)은 상해 사람으로 호는 소계자(小溪子) 혹은 와석생(臥石生)이라 불리었다. 화가였던 아버지로 인해 그 재능을 물려받았으며 다양한 회화기법을 기반으로 한차원 높은 원림예술을 창조해낸 인물이다.
명대(明代) 상해에는 3대 명원인 일섭원(日涉園), 예원(豫園), 노향원(露香園)이 있는데 이중 2개의 원림을 그가 설계하고 시공 할 만큼 장남양의 조원(造園)능력은 뛰어났다. 그의 대표적 원림으로는 예원(豫園) 엄산원(弇山園) 일섭원(日涉園)을 꼽을 수 있다. 장남양은 원림 소유주의 의뢰를 받고 원림을 설계, 시공한 직업적 조원가다. 기존의 가산 축조 기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첩석 방식을 도입했다. 토석(土石)을 결합하여 가산을 조성하되 마치 돌로만 이루어진 듯 흙의 노출없이 돌을 신묘하게 배치하여 기봉(奇峰), 현애(懸崖), 심곡(深谷)을 연상케 하는 기술을 사용하여, 규모가 작은 첩석을 이용 큰 규모의 경색(景色)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뛰어난 첩석 기술은 진소온(陳所蘊)의 《장산인전(張山人傳)》의 기록에도 자세히 나타나 있다.
經南陽疊的假山,競可做到隨地賦形,千變萬化,巧奪天工,如同自然。
他擅長運用無數大小不同的黃石,將它組成一個渾成的整體,具有真山真水之氣勢:
남양의 가산 축조는 본래의 자연 지형을 따라 형성되었고 변화무쌍 하고 기술이 뛰어나 마치 자연과 같다. 그는 수많은 크고 작은 황석을 이용하는 데 뛰어나, 각각의 돌들이 하나가 되어 진정한 산수의 기세를 이룬 형상이다.
<원- 대 석가산>
장남양(張南陽)이 설계한 ‘예원(豫園)’은 소유주 반윤단(潘允端)이 부친을 모시기 위해 조영한 것으로 이곳에서 부친이 즐겁고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豫悅老親”에서 이름을 취해 ‘예원’이라 명명했다. 소유주인 반윤단이 기록한 《豫園記》에 의하면 원림 내에 돌들을 한데 모으고 우물을 파 물길을 끌어 들이고 대나무와 정자가 예술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 예원은 특히 소규모의 황석이 무리를 이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며, 작은 암석과 동굴들로 인하여 심산 유곡의 경색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원 내 서북편에는 장남양이 절강성 무강의 황석을 쌓아 조성한 대형 황석 가산이 현존하고 있다.
<엄산원>
엄산원(弇山園)은 명대 후칠자(後七子) 중 하나인 왕세정(王世贞)의 부탁으로 조성된 곳이다. 왕세정과 장남양은 원래 친분이 두터웠는데 왕세정이 낙향하여 태창성(太仓城) 교외 융복사(隆福寺)서측에 조성했다. 장남양 말년기에 조성한 작품으로 명대 사가원림의 대표라 말할 수 있는 걸작이다. 초기 원림의 명칭은 소지원(小祇園) 이었으나 왕세정이 《山海經》의 선경에서 원림의 이름을 취하여 엄산원이라 고쳐 불렀다. 왕세정이 기록한 《弇山園記》에 의하면 이 원림은 출입구, 엄산당, 서엄산, 중엄산, 동엄산, 생활구역으로 나누어 설계되었으며 각 공간은 그 특징에 맞게 주제를 가지고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내는 물길을 끌어 들여 호수, 폭포, 동굴 등을 조성하고 석산을 쌓아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배치하였다. 이 원림은 마치 자연 풍광을 보는 듯 하였으며, 정대누각(亭臺樓閣)의 사이에는 기화이수(奇花異樹)를 사계절의 변화를 고려하여 계절에 맞게 식재 되었다. 왕세정의 경제적 문학적 기반과 장남양의 원림예술이 결합되어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張山人傳》에는 장남양이 설계 시공한 예원과 엄산원이 동쪽과 남쪽에 위치하며 당시에 최고의 명원으로 손꼽혔음이 기록되어 있다(“唯時吳中潘方伯以豫園勝,太倉王司寇(王世貞)以弇園勝,百里相望,為東南名園冠,則皆出山人之手”).
<일섭원>
일섭원(日涉園)은 진소온 소유의 주택으로 그가 사망한 후 육명윤이 구입 후 “송남소은(淞南小隱)” 이라 개명하였고 이후 전소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1990년대에 중건된 것이다.
장남양(張南陽)의 원림은 산수화의 기법과 은일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기존의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첩석 기술과 인수(引水) 기법으로 광대한 수면과 산릉을 결합하여 각 공간에 다양한 형태의 결합을 통하여 공간을 분할하고 합하면서 다양하고 풍부한 풍광을 만들어 냈다.
흔히 원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문화와 자연이 공존하며 겹겹히 쌓인 복합문화라 할 수 있는데 장남양은 신묘한 첩석기술 통해 제3의 자연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예찬 할 만하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중국의 원림조영 방식은 명조(明朝)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일석(一石) 일수(一水)의 배치를 통한 대칭적 상징에서 탈피해 조영자의 이념과 사상이 결합된 하나의 독립된 세계의 창조라는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명나라 초기에는 주원장의 원림조영 금지령으로 인해 원림의 발전이 제한되고 쇠락의 길을 걷는 듯 했으나 곧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자, 옛 원림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원림조영이 활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은일(隱逸)사상의 원림 조영은 여전히 유행하였으나 생산적 목적에서 완전히 벗어난 관상과 유락을 위한 장소로 탈바꿈 하게 된다.
진한(秦漢) 시대의 자연적 원림의 형태에서 당송(唐宋)의 산수화 기법을 통한 원림 조영 방식은 명대에 이르러 변화를 맞게 된다. 특히 원림 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가산의 축조에 변화가 주목된다. 진한시대, 흙(土)을 취해 산을 조성한 후 돌을 배치하던 방식은 명대(明代)에 이르러 돌을 위주로 하여 산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고 이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돌이 풍부하였던 중국의 남방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가산의 조성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고, 가산조성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명대 가산(假山)으로 내노라 할만한 대표적 인물은 계성(計成), 주병충(周秉忠), 장남양(張南陽), 석도(石濤), 과유량(戈裕良)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중국 강남 원림 내 가산조성 및 원림 예술에 지대한 영향 끼친 인물들이다. 이중 예원을 조영한 장남양의 첩석(疊石) 기술과 원림 설계 방식은 지금 까지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그 명성이 퇴색되지 않고 있다. 이번호에 예찬할 인물이 바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남양이다.
<응야평-예원대 가산도>
장남양(張山人, 1517~1596)은 상해 사람으로 호는 소계자(小溪子) 혹은 와석생(臥石生)이라 불리었다. 화가였던 아버지로 인해 그 재능을 물려받았으며 다양한 회화기법을 기반으로 한차원 높은 원림예술을 창조해낸 인물이다.
명대(明代) 상해에는 3대 명원인 일섭원(日涉園), 예원(豫園), 노향원(露香園)이 있는데 이중 2개의 원림을 그가 설계하고 시공 할 만큼 장남양의 조원(造園)능력은 뛰어났다. 그의 대표적 원림으로는 예원(豫園) 엄산원(弇山園) 일섭원(日涉園)을 꼽을 수 있다. 장남양은 원림 소유주의 의뢰를 받고 원림을 설계, 시공한 직업적 조원가다. 기존의 가산 축조 기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첩석 방식을 도입했다. 토석(土石)을 결합하여 가산을 조성하되 마치 돌로만 이루어진 듯 흙의 노출없이 돌을 신묘하게 배치하여 기봉(奇峰), 현애(懸崖), 심곡(深谷)을 연상케 하는 기술을 사용하여, 규모가 작은 첩석을 이용 큰 규모의 경색(景色)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뛰어난 첩석 기술은 진소온(陳所蘊)의 《장산인전(張山人傳)》의 기록에도 자세히 나타나 있다.
經南陽疊的假山,競可做到隨地賦形,千變萬化,巧奪天工,如同自然。
他擅長運用無數大小不同的黃石,將它組成一個渾成的整體,具有真山真水之氣勢:
남양의 가산 축조는 본래의 자연 지형을 따라 형성되었고 변화무쌍 하고 기술이 뛰어나 마치 자연과 같다. 그는 수많은 크고 작은 황석을 이용하는 데 뛰어나, 각각의 돌들이 하나가 되어 진정한 산수의 기세를 이룬 형상이다.
<원- 대 석가산>
장남양(張南陽)이 설계한 ‘예원(豫園)’은 소유주 반윤단(潘允端)이 부친을 모시기 위해 조영한 것으로 이곳에서 부친이 즐겁고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豫悅老親”에서 이름을 취해 ‘예원’이라 명명했다. 소유주인 반윤단이 기록한 《豫園記》에 의하면 원림 내에 돌들을 한데 모으고 우물을 파 물길을 끌어 들이고 대나무와 정자가 예술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 예원은 특히 소규모의 황석이 무리를 이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며, 작은 암석과 동굴들로 인하여 심산 유곡의 경색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예원 내 서북편에는 장남양이 절강성 무강의 황석을 쌓아 조성한 대형 황석 가산이 현존하고 있다.
<엄산원>
엄산원(弇山園)은 명대 후칠자(後七子) 중 하나인 왕세정(王世贞)의 부탁으로 조성된 곳이다. 왕세정과 장남양은 원래 친분이 두터웠는데 왕세정이 낙향하여 태창성(太仓城) 교외 융복사(隆福寺)서측에 조성했다. 장남양 말년기에 조성한 작품으로 명대 사가원림의 대표라 말할 수 있는 걸작이다. 초기 원림의 명칭은 소지원(小祇園) 이었으나 왕세정이 《山海經》의 선경에서 원림의 이름을 취하여 엄산원이라 고쳐 불렀다. 왕세정이 기록한 《弇山園記》에 의하면 이 원림은 출입구, 엄산당, 서엄산, 중엄산, 동엄산, 생활구역으로 나누어 설계되었으며 각 공간은 그 특징에 맞게 주제를 가지고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내는 물길을 끌어 들여 호수, 폭포, 동굴 등을 조성하고 석산을 쌓아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배치하였다. 이 원림은 마치 자연 풍광을 보는 듯 하였으며, 정대누각(亭臺樓閣)의 사이에는 기화이수(奇花異樹)를 사계절의 변화를 고려하여 계절에 맞게 식재 되었다. 왕세정의 경제적 문학적 기반과 장남양의 원림예술이 결합되어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張山人傳》에는 장남양이 설계 시공한 예원과 엄산원이 동쪽과 남쪽에 위치하며 당시에 최고의 명원으로 손꼽혔음이 기록되어 있다(“唯時吳中潘方伯以豫園勝,太倉王司寇(王世貞)以弇園勝,百里相望,為東南名園冠,則皆出山人之手”).
<일섭원>
일섭원(日涉園)은 진소온 소유의 주택으로 그가 사망한 후 육명윤이 구입 후 “송남소은(淞南小隱)” 이라 개명하였고 이후 전소되었다. 현존하는 것은 1990년대에 중건된 것이다.
장남양(張南陽)의 원림은 산수화의 기법과 은일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기존의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첩석 기술과 인수(引水) 기법으로 광대한 수면과 산릉을 결합하여 각 공간에 다양한 형태의 결합을 통하여 공간을 분할하고 합하면서 다양하고 풍부한 풍광을 만들어 냈다.
흔히 원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문화와 자연이 공존하며 겹겹히 쌓인 복합문화라 할 수 있는데 장남양은 신묘한 첩석기술 통해 제3의 자연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 예찬 할 만하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