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수화(山水畵)의 유행과 함께 문인들은 자신의 원림에 그림 같은 경관을 조성하고 그곳에서 은일하는 미술작품의 현실화를 꿈꾸었다. 중국 산수화는 화가의 눈에 비친 명산의 경치가 문인화 기법을 빌려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 원림 내에서는 그림의 소재들이 돌과 물과 나무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특히 문인들은 돌의 구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송대에 와서는 선종의 영향으로 고산수 원림(故山水園林)이 성행하여 원림 내 돌의 구성방법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문인 화가들은 누구보다 첩석(疊石:돌을 겹치고 쌓는 것)이 이루는 수려함에 심취했고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첩석 기술을 이루고자 갈망했다.
<석가산 내부>
각 왕조 마다 첩석기술에 대한 이론 및 시공방법이 존재했고 송대에 이르러 성행하던 것이 명 청대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이론과 시공을 겸비한 첩석 전문가의 등장과 그에 관한 서적들을 보면 첩석 기술과 그에 따른 원림발전 정도를 알 수 있다. 명·청대에 장남양(張南陽), 석도(石濤), 과유량(戈裕良), 주병충(周秉忠)등이 강남일대를 무대로 석가산과 첩석을 잘 다루었으며 계성과 문진향은 동시대에 소주 지역에 거주하며 자신만의 원림 조영 방식을 정립했다. 이를 통해 명·청대에 원림에 대한 관심과 발전의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밖에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원림 조영가로서 명 청대를 거쳐 자손 까지도 가업을 잇는 전문 원림 조영가가 있었다. 대를 이어 원림 분야에 종사하며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가원림에 까지도 영향을 미친 원림가 ‘장남원(張南垣)’과 그의 후손들이 이번호에 예찬될 대상이다.
<기창원 수변>
장남원(1587~-1671년)은 명나라 사람으로 말년에 명조가 멸망하여 청으로 유입된 명조(明朝) 사람이다. 지금의 상해시 남부 화정(松江華亭)사람으로 본명은 장연(張漣)이다. 장남원은 얼굴빛이 검고 뚱뚱했으며 신분에 상관없이 교류하기를 좋아하고 입담이 좋아 직위에 관계없이 그를 청하여 교류하기를 원하는 아주 원만한 사람이었다. 장남원은 기존의 원림 조영가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회화 분야에 천부적 소질을 지니고 있어 이를 기반으로 원림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는 원림조영에 있어 자연과 인공이 결합하여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자연적 공간을 표현해내려 하였으며 한 공간에서 각 요소들이 점철(點綴: 어떤 대상이 일관된 것으로 서로 이음)을 이루는 형태를 추구했다. 그는 첩석과 분재 기술이 뛰어나 강남 제일의 산사(山師: 첩석 기술이 유명한 명사를 일컬음)로 불리었다(松江縣志).
<기창원 석가산 >
장남원은 송강(松江), 가흥(嘉興), 강녕(江寧), 금산(金山), 상숙(常熟), 태창(太倉)등에서 활동하였고, 무석의 기창원(無錫寄暢園), 태창의 남원과 서원(南園和西園), 가흥연우루의 가산(煙雨樓的假山), 소주의 동원(東園), 상해예원(豫園) 및 황가원림인 창춘원 (暢春園), 정명원(靜明園), 청의원(清漪園) 등의 가산을 축조하고 정원을 개축하기도 하였다.
장남원이 축조한 원림은 기본적으로 산수화의 의경에 기초하고 있으며 원림 조성 및 첩석에 있어 먼저 대상지의 지형을 살피고 그에 따라 수목의 위치와 첩석의 위치를 정하는 기법에 충실했다. 또 외부의 경관을 내부의 경관과 이어 하나의 경관을 이루도록 가산과 수목의 위치를 정했다. 따라서 원림은 자연스럽게 작은 가산, 암석 또는 지당에 의해 축이 변화되면서 원림감상의 재미를 더하게 된다. 이는 곧 송조 곽희(郭熙)의《林泉高致》(임천고치)중 나타난 ‘山有三遠(삼원법)’의 경지를 차용한 듯 공간감을 더하게 된다. 대량의 흙을 쌓아 산의 형태를 이루고 흙이 돌을 감싸는 듯 하며, 흙 속의 암석은 종횡으로 연결되어 놓이고 쌓여 기괴한 봉우리와 절벽을 형성하고 낮은 담이 이를 두르고 대나무로 이를 차폐하여 기괴한 산봉우리가 연결된 경관을 연출했다. 여기에 계류, 호수, 수목이 우거지고 정사누각(亭舍樓閣)이 이어져 있었다. 수목은 마치 자연에서 스스로 자라난 듯 인공미를 남기지 않도록 경사와 심도 및 암석과의 결합을 통하여 이질감이 없도록 꾸며 원림에 자연스러움을 주었다. “앵두나무는 구부러진 길에 열지어 식재하고 그 사이에는 해당화를 심는다” 라고 기록한것 처럼 장남원은 수목도 적재적소에 적합한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대상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의 원림조영술은 축소와 비례의 근거한 것이 특징이다.
<기창원 전경>
그가 조성에 참여한 대표적 원림인 기창원은 명나라 병부상서 진금(秦金)의 사가원림이다. 1657년 진금의 후손인 진덕조(秦德藻)가 장남원의 첩석 기술을 흠모하여 그에게 기존 기창원의 개조를 의뢰한 것이다. 당시 장남원은 본인의 주도하에 조카 장무(张武)를 통해 시공하게 했다. 기창원은 첩석을 통해 멀리 보이는 경치와 연계한 후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겹겹이 굴곡을 이룬 물이 원내로 유입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청조 강희제와 건륭제(康熙,乾隆) 또한 기창원에 애착을 보였다. 조손(祖孫)은 강남 순시 때마다 기창원을 방문하여 유람했다. 건륭제는 기창원을 그리워하여 북경으로 회궁한 후 이화원내 기창원을 모방한 청의원(현 이화원)을 조성하게 까지 했었다.
청나라 시기 저명한 작가 장영(張英)은 장남원의 원림 첩산 이후, 그 이전의 수준 낮은 첩산 작품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첩석 기술은 최고의 경지로 칭송되기에 한치 모자람이 업었다.
<기창원>
장남원은 슬하에 4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 모두 전문 원림 조영가로 활동했다. 그중 장란(張然)과 장웅(張熊), 조카 장무(張武) 또한 뛰어난 원림가와 산사로서 유명하다. 장란은 강희제때 황가 원림사로 활동하였고 경춘원(慶春園), 창춘원(暢春園)과 남해영대(南海瀛台)를 조영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중국 원림가들과 같이 장남원과 그의 자녀들은 원림의 조영과 첩석기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로인해 생활고를 겪기도 했으나 원림조영에 담긴 참뜻을 잊은 적은 없었다.
아마도 장남원과 가족들은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자신들이 조영한 원림을 통해 원림을 향유하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안식을 찾길 바랬던 소박한 보람을 위해 평생을 바쳤는지 모르겠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중국 산수화(山水畵)의 유행과 함께 문인들은 자신의 원림에 그림 같은 경관을 조성하고 그곳에서 은일하는 미술작품의 현실화를 꿈꾸었다. 중국 산수화는 화가의 눈에 비친 명산의 경치가 문인화 기법을 빌려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 원림 내에서는 그림의 소재들이 돌과 물과 나무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시도로 인해 특히 문인들은 돌의 구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송대에 와서는 선종의 영향으로 고산수 원림(故山水園林)이 성행하여 원림 내 돌의 구성방법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문인 화가들은 누구보다 첩석(疊石:돌을 겹치고 쌓는 것)이 이루는 수려함에 심취했고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첩석 기술을 이루고자 갈망했다.
<석가산 내부>
각 왕조 마다 첩석기술에 대한 이론 및 시공방법이 존재했고 송대에 이르러 성행하던 것이 명 청대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이론과 시공을 겸비한 첩석 전문가의 등장과 그에 관한 서적들을 보면 첩석 기술과 그에 따른 원림발전 정도를 알 수 있다. 명·청대에 장남양(張南陽), 석도(石濤), 과유량(戈裕良), 주병충(周秉忠)등이 강남일대를 무대로 석가산과 첩석을 잘 다루었으며 계성과 문진향은 동시대에 소주 지역에 거주하며 자신만의 원림 조영 방식을 정립했다. 이를 통해 명·청대에 원림에 대한 관심과 발전의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밖에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원림 조영가로서 명 청대를 거쳐 자손 까지도 가업을 잇는 전문 원림 조영가가 있었다. 대를 이어 원림 분야에 종사하며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가원림에 까지도 영향을 미친 원림가 ‘장남원(張南垣)’과 그의 후손들이 이번호에 예찬될 대상이다.
<기창원 수변>
장남원(1587~-1671년)은 명나라 사람으로 말년에 명조가 멸망하여 청으로 유입된 명조(明朝) 사람이다. 지금의 상해시 남부 화정(松江華亭)사람으로 본명은 장연(張漣)이다. 장남원은 얼굴빛이 검고 뚱뚱했으며 신분에 상관없이 교류하기를 좋아하고 입담이 좋아 직위에 관계없이 그를 청하여 교류하기를 원하는 아주 원만한 사람이었다. 장남원은 기존의 원림 조영가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회화 분야에 천부적 소질을 지니고 있어 이를 기반으로 원림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는 원림조영에 있어 자연과 인공이 결합하여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자연적 공간을 표현해내려 하였으며 한 공간에서 각 요소들이 점철(點綴: 어떤 대상이 일관된 것으로 서로 이음)을 이루는 형태를 추구했다. 그는 첩석과 분재 기술이 뛰어나 강남 제일의 산사(山師: 첩석 기술이 유명한 명사를 일컬음)로 불리었다(松江縣志).
<기창원 석가산 >
장남원은 송강(松江), 가흥(嘉興), 강녕(江寧), 금산(金山), 상숙(常熟), 태창(太倉)등에서 활동하였고, 무석의 기창원(無錫寄暢園), 태창의 남원과 서원(南園和西園), 가흥연우루의 가산(煙雨樓的假山), 소주의 동원(東園), 상해예원(豫園) 및 황가원림인 창춘원 (暢春園), 정명원(靜明園), 청의원(清漪園) 등의 가산을 축조하고 정원을 개축하기도 하였다.
장남원이 축조한 원림은 기본적으로 산수화의 의경에 기초하고 있으며 원림 조성 및 첩석에 있어 먼저 대상지의 지형을 살피고 그에 따라 수목의 위치와 첩석의 위치를 정하는 기법에 충실했다. 또 외부의 경관을 내부의 경관과 이어 하나의 경관을 이루도록 가산과 수목의 위치를 정했다. 따라서 원림은 자연스럽게 작은 가산, 암석 또는 지당에 의해 축이 변화되면서 원림감상의 재미를 더하게 된다. 이는 곧 송조 곽희(郭熙)의《林泉高致》(임천고치)중 나타난 ‘山有三遠(삼원법)’의 경지를 차용한 듯 공간감을 더하게 된다. 대량의 흙을 쌓아 산의 형태를 이루고 흙이 돌을 감싸는 듯 하며, 흙 속의 암석은 종횡으로 연결되어 놓이고 쌓여 기괴한 봉우리와 절벽을 형성하고 낮은 담이 이를 두르고 대나무로 이를 차폐하여 기괴한 산봉우리가 연결된 경관을 연출했다. 여기에 계류, 호수, 수목이 우거지고 정사누각(亭舍樓閣)이 이어져 있었다. 수목은 마치 자연에서 스스로 자라난 듯 인공미를 남기지 않도록 경사와 심도 및 암석과의 결합을 통하여 이질감이 없도록 꾸며 원림에 자연스러움을 주었다. “앵두나무는 구부러진 길에 열지어 식재하고 그 사이에는 해당화를 심는다” 라고 기록한것 처럼 장남원은 수목도 적재적소에 적합한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대상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의 원림조영술은 축소와 비례의 근거한 것이 특징이다.
<기창원 전경>
그가 조성에 참여한 대표적 원림인 기창원은 명나라 병부상서 진금(秦金)의 사가원림이다. 1657년 진금의 후손인 진덕조(秦德藻)가 장남원의 첩석 기술을 흠모하여 그에게 기존 기창원의 개조를 의뢰한 것이다. 당시 장남원은 본인의 주도하에 조카 장무(张武)를 통해 시공하게 했다. 기창원은 첩석을 통해 멀리 보이는 경치와 연계한 후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겹겹이 굴곡을 이룬 물이 원내로 유입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청조 강희제와 건륭제(康熙,乾隆) 또한 기창원에 애착을 보였다. 조손(祖孫)은 강남 순시 때마다 기창원을 방문하여 유람했다. 건륭제는 기창원을 그리워하여 북경으로 회궁한 후 이화원내 기창원을 모방한 청의원(현 이화원)을 조성하게 까지 했었다.
청나라 시기 저명한 작가 장영(張英)은 장남원의 원림 첩산 이후, 그 이전의 수준 낮은 첩산 작품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첩석 기술은 최고의 경지로 칭송되기에 한치 모자람이 업었다.
<기창원>
장남원은 슬하에 4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 모두 전문 원림 조영가로 활동했다. 그중 장란(張然)과 장웅(張熊), 조카 장무(張武) 또한 뛰어난 원림가와 산사로서 유명하다. 장란은 강희제때 황가 원림사로 활동하였고 경춘원(慶春園), 창춘원(暢春園)과 남해영대(南海瀛台)를 조영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중국 원림가들과 같이 장남원과 그의 자녀들은 원림의 조영과 첩석기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로인해 생활고를 겪기도 했으나 원림조영에 담긴 참뜻을 잊은 적은 없었다.
아마도 장남원과 가족들은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자신들이 조영한 원림을 통해 원림을 향유하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안식을 찾길 바랬던 소박한 보람을 위해 평생을 바쳤는지 모르겠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