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선비들은 자연 산수와 흡사한 환경인 정원을 조성하고 자연과 하나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시와 그림 속에 의미를 담아 정원생활을 표현하기도 했다. 정원경영은 선비들이 평생을 통해 이루고픈 꿈이었고 명원(名園)을 소유한 사람들은 덩달아 자신들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서로 앞 다투어 정원을 꾸미고 뽐내는 일들을 반복하다 보니 선비라면 정원의 아취를 아는 것은 기본덕목이 되었다. 또 정원의 소재인 정원기법이나 식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해박해졌다.
태평성시도
조선 시대에는 원예취미와 정원조성이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발달했었다. 정민 교수에 따르면 18,19세기 원예취미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수요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고 벽(癖)의 수준에 오른 사람이 많았었다고 한다(태평성시도 그림에서 보면 분재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또 이 시기 문집에는 전에 없이 각종 정원의 구체적인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심경호 교수도 18세기 후반 화원경영에 대해 ‘풍속’으로까지 표현한 바 있다. 이러한 원예와 정원 붐의 이전에는 어떤 일들과 인물들이 있었을까? 이 배경을 이야기할 때 바로 조선 최초의 원예서를 출간한 강희안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이웃나라의 정원관련 전문서를 살펴보면 중국은 <원야(園冶)>를 쓴 계성이 있고 일본은 <작정기(作庭記)>를 쓴 귤준망이 있다. 우리나라 정원에 대한 내용들은 개인의 문집에 자주 등장하지만 정원전문서만 따로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강희안은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綠)>을 쓴 강희맹과 형제이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 분야에 업적을 남긴 셈이다.
강희안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강시(姜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동생이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평대군은 이종형이기도 하다.
강희안은 학문이 출중하여 집현전에서도 근무했고 그림에도 능한 화가였다. 고사관수도의 작자가 바로 강희안이다. 이 그림은 조선 중기에 크게 유행했던 소경산수인물도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시대 백과사전을 편찬한 인물들의 집안은 대부분 사대부 명문가로 부유하고 견문을 쌓기 좋은 환경을 지녔던 특징이 있다. 강희안의 집안도 그러했고 출중한 인물도 많았다.
양화소록-규장각 소장
<양화소록>의 원저명은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다. 청천은 진주의 옛 지명이다. <양화소록>은 진주강씨 3인의 시문을 모은 보물 제1290호 《진산세고(晉山世稿)》에 실린 것으로 4권 1책 중 권4에 수록되어 있다. <양화소록>을 처음 국역한 을유문화사 발행본에서는 유박의 화암수록이 부록으로 실려 관련학계와 정원사(庭園史)에서는 이 모두가 강희안의 저작으로 오해하는 헤프닝이 있기도 했다.
이 책은 꽃과 나무 수십 종을 사례로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한 원예전문서다. 강희안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꽃과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 상징성을 논하고 있어 단순한 전문서 이상의 조선 지식인이 도달한 이념적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강희안이 이 책을 쓰기 이전에는 선비들이 자신의 원예취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이 없었다. 고려시대의 산문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강희안의 <양화소록> 자서에 보면
여가에 다른 일은 모두 제쳐 놓고 꽃 가꾸기를 일삼았다. 친구들이 간혹 화초를 얻으면 반드시 나에게 분양하여 주었으므로 나는 화초를 제법 골고루 갖추게 되었다. ...중략... 이는 화초의 천성을 저마다 잘 알아서 맞추었기 때문이요, 처음부터 지혜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라고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타난다.
국화 그림(소치 허련)
<양화소록>에는 노송(老松)·만년송(萬年松)·오반죽(烏班竹)·국화(菊花)·매화(梅花)·혜란(惠蘭)·서향화(瑞香花)·연화(蓮花)·석류화(石榴花)·백엽(百葉)·치자화(梔子花) 등이 있다. 또, 사계화(四季花)·월계화(月桂花)·산다화(山茶花:동백)·자미화(紫薇花: 백일홍)·일본 척촉화(躑躅花)·귤(橘樹)·석창포(石菖蒲) 등도 언급된다. 이밖에 원예기법으로 화수법(花樹法)·최화법(催花法)·백화기선(百花忌宣)·취화훼법(取花卉法)·양화법(養花法)·배화분법(排花盆法)·수장법(收藏法) 등도 설명과 함께 하고 있다.
연꽃그림(소치 허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꽃을 분에 심을 때는 반드시 거름진 흙을 써야하며 겨울에 양지쪽 도랑 흙을 파서 볕에 쬐어 말리고 체로 기와쪽이나 자갈을 쳐내고 인분을 앙구어 띄운다고 했다.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으로 마분을 물에 담갔다가 주면 삼사일 뒤에 필 것을 다음날에 핀다고 적고 있으며 꽃이 꺼리는 것으로 오징어 뼈로 꽃나무를 찌르면 바로 죽는다는 신기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양화소록에는 꽃나무 뿐 아니라 정원의 괴석에 대한 내용도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괴석그림(소치 허련)
괴석은 안산군에서 나는 돌은 누렇고 붉어 대부분 흙 빛깔로 되었으니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 세상 사람들이 괴석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침향석을 얻으면 구명을 파서 앞뒤를 뚫어놓고 미록이나 승불 형상을 조각하여 그 구멍 가운데에 꽂아 세우고 바위옷이나 잡훼를 오목하게 팬 곳에 심어 놓고서 저마다 고상한 운치로 아니 이것은 저속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침향석은 돌결이 제대로 구멍을 이루고 구멍 속에 가는 모래가 붙어서 물이 한번 돌 밑의 구멍으로 들어가면 가는 모래에 스며들어 자연히 돌꼭대기로 끌어 올린다. ...중략... 아무리 인위적으로 기교를 다한다 하더라도 천연적으로 훌륭하게 된 것을 따르지 못할지니.....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고대의 선비들은 자연 산수와 흡사한 환경인 정원을 조성하고 자연과 하나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시와 그림 속에 의미를 담아 정원생활을 표현하기도 했다. 정원경영은 선비들이 평생을 통해 이루고픈 꿈이었고 명원(名園)을 소유한 사람들은 덩달아 자신들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서로 앞 다투어 정원을 꾸미고 뽐내는 일들을 반복하다 보니 선비라면 정원의 아취를 아는 것은 기본덕목이 되었다. 또 정원의 소재인 정원기법이나 식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해박해졌다.
태평성시도
조선 시대에는 원예취미와 정원조성이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발달했었다. 정민 교수에 따르면 18,19세기 원예취미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수요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고 벽(癖)의 수준에 오른 사람이 많았었다고 한다(태평성시도 그림에서 보면 분재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또 이 시기 문집에는 전에 없이 각종 정원의 구체적인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고 밝히고 있다.
심경호 교수도 18세기 후반 화원경영에 대해 ‘풍속’으로까지 표현한 바 있다. 이러한 원예와 정원 붐의 이전에는 어떤 일들과 인물들이 있었을까? 이 배경을 이야기할 때 바로 조선 최초의 원예서를 출간한 강희안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이웃나라의 정원관련 전문서를 살펴보면 중국은 <원야(園冶)>를 쓴 계성이 있고 일본은 <작정기(作庭記)>를 쓴 귤준망이 있다. 우리나라 정원에 대한 내용들은 개인의 문집에 자주 등장하지만 정원전문서만 따로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강희안은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綠)>을 쓴 강희맹과 형제이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이 분야에 업적을 남긴 셈이다.
강희안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강시(姜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동생이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평대군은 이종형이기도 하다.
강희안은 학문이 출중하여 집현전에서도 근무했고 그림에도 능한 화가였다. 고사관수도의 작자가 바로 강희안이다. 이 그림은 조선 중기에 크게 유행했던 소경산수인물도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시대 백과사전을 편찬한 인물들의 집안은 대부분 사대부 명문가로 부유하고 견문을 쌓기 좋은 환경을 지녔던 특징이 있다. 강희안의 집안도 그러했고 출중한 인물도 많았다.
양화소록-규장각 소장
<양화소록>의 원저명은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다. 청천은 진주의 옛 지명이다. <양화소록>은 진주강씨 3인의 시문을 모은 보물 제1290호 《진산세고(晉山世稿)》에 실린 것으로 4권 1책 중 권4에 수록되어 있다. <양화소록>을 처음 국역한 을유문화사 발행본에서는 유박의 화암수록이 부록으로 실려 관련학계와 정원사(庭園史)에서는 이 모두가 강희안의 저작으로 오해하는 헤프닝이 있기도 했다.
이 책은 꽃과 나무 수십 종을 사례로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한 원예전문서다. 강희안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꽃과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 상징성을 논하고 있어 단순한 전문서 이상의 조선 지식인이 도달한 이념적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강희안이 이 책을 쓰기 이전에는 선비들이 자신의 원예취미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이 없었다. 고려시대의 산문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강희안의 <양화소록> 자서에 보면
여가에 다른 일은 모두 제쳐 놓고 꽃 가꾸기를 일삼았다. 친구들이 간혹 화초를 얻으면 반드시 나에게 분양하여 주었으므로 나는 화초를 제법 골고루 갖추게 되었다. ...중략... 이는 화초의 천성을 저마다 잘 알아서 맞추었기 때문이요, 처음부터 지혜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라고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타난다.
국화 그림(소치 허련)
<양화소록>에는 노송(老松)·만년송(萬年松)·오반죽(烏班竹)·국화(菊花)·매화(梅花)·혜란(惠蘭)·서향화(瑞香花)·연화(蓮花)·석류화(石榴花)·백엽(百葉)·치자화(梔子花) 등이 있다. 또, 사계화(四季花)·월계화(月桂花)·산다화(山茶花:동백)·자미화(紫薇花: 백일홍)·일본 척촉화(躑躅花)·귤(橘樹)·석창포(石菖蒲) 등도 언급된다. 이밖에 원예기법으로 화수법(花樹法)·최화법(催花法)·백화기선(百花忌宣)·취화훼법(取花卉法)·양화법(養花法)·배화분법(排花盆法)·수장법(收藏法) 등도 설명과 함께 하고 있다.
연꽃그림(소치 허련)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꽃을 분에 심을 때는 반드시 거름진 흙을 써야하며 겨울에 양지쪽 도랑 흙을 파서 볕에 쬐어 말리고 체로 기와쪽이나 자갈을 쳐내고 인분을 앙구어 띄운다고 했다.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으로 마분을 물에 담갔다가 주면 삼사일 뒤에 필 것을 다음날에 핀다고 적고 있으며 꽃이 꺼리는 것으로 오징어 뼈로 꽃나무를 찌르면 바로 죽는다는 신기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양화소록에는 꽃나무 뿐 아니라 정원의 괴석에 대한 내용도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괴석그림(소치 허련)
괴석은 안산군에서 나는 돌은 누렇고 붉어 대부분 흙 빛깔로 되었으니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 세상 사람들이 괴석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여 침향석을 얻으면 구명을 파서 앞뒤를 뚫어놓고 미록이나 승불 형상을 조각하여 그 구멍 가운데에 꽂아 세우고 바위옷이나 잡훼를 오목하게 팬 곳에 심어 놓고서 저마다 고상한 운치로 아니 이것은 저속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침향석은 돌결이 제대로 구멍을 이루고 구멍 속에 가는 모래가 붙어서 물이 한번 돌 밑의 구멍으로 들어가면 가는 모래에 스며들어 자연히 돌꼭대기로 끌어 올린다. ...중략... 아무리 인위적으로 기교를 다한다 하더라도 천연적으로 훌륭하게 된 것을 따르지 못할지니.....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