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에 의해 건립된 청조(清朝)는 혈연관계를 통해 막강한 황제 권력 중심의 봉건제국을 이룬다. 황제권력의 상징인 황가원림은 청나라 초기까지는 명대에 조성된 것을 그대로 사용했었다.
그 틈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조성한 사가원림이 강남일대에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강희제가 재위한 후 황가원림은 활기를 되찾았다. 강희제 때는 중국 고전원림의 마지막 부흥을 위하여 초석을 마련하는 시기였으며, 건륭제(乾隆帝)와 가경제(嘉慶帝, 인조,1736~1820년) 때는 실질적 황가원림의 전성기라 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희제 때 조성된 황가원림은 중국원림 역사상 가장 큰 규모를 이루고 있으며 기능적으로나 구성형식에 있어 매우 다양하여 중국 고전 원림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1700년 당시, 중국 국민 생산 총액이 세계 전체총액의 23.1%를 차지했다는 점은 당시 청조가 세계적 경제강국의 반열에 올라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강희제>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서구 강대국과 어깨를 견주며 세계의 중심을 꿈꾸고 찬란한 청대 고전원림의 기반을 다진 강희제야말로 예찬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강희제의 원림조영 사상과 조영방식 그리고 그가 조영한 원림의 예술적 풍격을 통해 청나라 황가 원림의 진정한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강희제(康熙帝, 1654-1722년)는 중국 청나라 제4대 황제로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은 현엽(玄燁)으로 자금성 경인궁(景仁宮)에서 태어나 양춘원(현 북경대 서측문 옆)에서 붕어했다. 어린 나이에 황제 즉위(1661년) 후 조정의 내분과 삼번(三藩)의 난 등 변방의 반란을 겪으며 1697년에 전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강희제는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청조(淸朝)의 태평을 위해 문화치국(文化治國) 정책에 주력했다. 특히 그의 원림 조영 활동은 문화치국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Jean de Fontaney 선교사가 남긴 서신에 보면 강희제는 유가사상을 통일 국가의 기반으로 삼고 서구 강대국들의 이학(理學)을 비롯한 측량학 천문학 등 선진적 문화와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원림에 자신만의 자연관 및 우주관을 형성하였다(“康熙看到他的整個帝國處於太平之中, 決定學習歐洲的科學....”)고 적혀 있다.
<창춘원 구역>
강희제가 조영한 대부분의 원림은 그의 지방 순행(巡幸)과 관련이 깊다. 특히 남쪽지방의 순행을 통하여 강남의 수려한 자연풍광과 사가원림의 조영방식들을 보고 익혔다. 강남의 원림과 자연풍광은 그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었고, 그는 황가원림과 이궁 등에 강남원림의 조영방식 혹은 구성 요소를 모방하거나 재해석하여 원림에 재현했다.
강희제가 조영한 대표적 원림은 향산 정의원(靜宜園), 옥천산 정명원(靜明園), 원명원(圓明園), 창춘원(暢春園) 그리고 승덕 피서산장(承德 避暑山莊) 등이며 그 중 특히 창춘원과 피서산장은 강남원림의 모방이 비교적 뚜렷하고 그의 검약적 생활태도와 소박한 조원 조영사상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이다.
창춘원은 1684년 강희제가 남행을 마친 후 북경으로 돌아와 궁중화가와 첩산 전문가인 장연(張然)으로 하여금 명대 청화원(靑華園)의 유적에 강남원림을 모방하여 재현한 작품이다. 창춘원은 본래 청화원의 규모 보다 작게 조성되었고 전전후원(前殿後園)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수경관과 원림의 주요공간은 북쪽에 위치하여 의정 및 생활공간과는 완전히 분리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창춘원은 후일 승덕피서산장, 원명원, 이화원 등의 원림조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피서산장>
박지원의 《열하일기》로도 유명한 하북성 승덕에 위치한 피서산장(熱河行宮,1703년 조영시작)은 황제궁전, 황가원림과 사찰로 구성된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다. 이곳은 청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걸쳐 증축과 확장이 이루어지며 조성되었다.
산장의 모습은 어제(御題) "피서산장기(避暑山莊記)"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산장은 자연의 풍모를 그대로 간직한 채 자연과 인공이 결합되어 있다. 건조물의 규모는 비교적 작으며 외관의 색채나 형태가 소박하다. 강희제에 의해 기본골격이 형성된 피서산장은 건륭제에 이르러 확장되고 그 화려함을 더하게 된다.
특히 강희제가 제재로 삼은 피서산장 “삼십육경(三十六景)”은 원림에 대한 자신만의 조영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楹宇守樸、寧拙舍巧,無刻桷丹楹之費、喜林泉抱素之懷). 이 시기(17-18세기)에 조영된 중국의 원림 문화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원림과 건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중국통일을 꿈꾸고 이를 실현한 강희제는 진정한 하나 된 민족을 이루고자 문화치국(文化治國)을 시행하고 소박한 자연의 모습과 절제된 인공미의 융화를 통하여 원림 내 참된 중화사상을 구현하였다. 그의 원림과 치적을 통하여 민족의 하나 됨이 결코 어렵지 만은 않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세상을 통치하듯 원림조성을 통해 보여준 강희제의 전통과 서구문물이 융합된 자연관과 우주관은 중국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참고 문헌
[清]《清圣祖实录》
[清]康熙《.畅春园记》
周维权.1960.避暑山庄的园林艺术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만주족에 의해 건립된 청조(清朝)는 혈연관계를 통해 막강한 황제 권력 중심의 봉건제국을 이룬다. 황제권력의 상징인 황가원림은 청나라 초기까지는 명대에 조성된 것을 그대로 사용했었다.
그 틈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조성한 사가원림이 강남일대에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강희제가 재위한 후 황가원림은 활기를 되찾았다. 강희제 때는 중국 고전원림의 마지막 부흥을 위하여 초석을 마련하는 시기였으며, 건륭제(乾隆帝)와 가경제(嘉慶帝, 인조,1736~1820년) 때는 실질적 황가원림의 전성기라 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희제 때 조성된 황가원림은 중국원림 역사상 가장 큰 규모를 이루고 있으며 기능적으로나 구성형식에 있어 매우 다양하여 중국 고전 원림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1700년 당시, 중국 국민 생산 총액이 세계 전체총액의 23.1%를 차지했다는 점은 당시 청조가 세계적 경제강국의 반열에 올라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강희제>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서구 강대국과 어깨를 견주며 세계의 중심을 꿈꾸고 찬란한 청대 고전원림의 기반을 다진 강희제야말로 예찬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강희제의 원림조영 사상과 조영방식 그리고 그가 조영한 원림의 예술적 풍격을 통해 청나라 황가 원림의 진정한 가치를 되새겨 볼 수 있다.
강희제(康熙帝, 1654-1722년)는 중국 청나라 제4대 황제로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은 현엽(玄燁)으로 자금성 경인궁(景仁宮)에서 태어나 양춘원(현 북경대 서측문 옆)에서 붕어했다. 어린 나이에 황제 즉위(1661년) 후 조정의 내분과 삼번(三藩)의 난 등 변방의 반란을 겪으며 1697년에 전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강희제는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청조(淸朝)의 태평을 위해 문화치국(文化治國) 정책에 주력했다. 특히 그의 원림 조영 활동은 문화치국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Jean de Fontaney 선교사가 남긴 서신에 보면 강희제는 유가사상을 통일 국가의 기반으로 삼고 서구 강대국들의 이학(理學)을 비롯한 측량학 천문학 등 선진적 문화와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원림에 자신만의 자연관 및 우주관을 형성하였다(“康熙看到他的整個帝國處於太平之中, 決定學習歐洲的科學....”)고 적혀 있다.
<창춘원 구역>
강희제가 조영한 대부분의 원림은 그의 지방 순행(巡幸)과 관련이 깊다. 특히 남쪽지방의 순행을 통하여 강남의 수려한 자연풍광과 사가원림의 조영방식들을 보고 익혔다. 강남의 원림과 자연풍광은 그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었고, 그는 황가원림과 이궁 등에 강남원림의 조영방식 혹은 구성 요소를 모방하거나 재해석하여 원림에 재현했다.
강희제가 조영한 대표적 원림은 향산 정의원(靜宜園), 옥천산 정명원(靜明園), 원명원(圓明園), 창춘원(暢春園) 그리고 승덕 피서산장(承德 避暑山莊) 등이며 그 중 특히 창춘원과 피서산장은 강남원림의 모방이 비교적 뚜렷하고 그의 검약적 생활태도와 소박한 조원 조영사상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이다.
창춘원은 1684년 강희제가 남행을 마친 후 북경으로 돌아와 궁중화가와 첩산 전문가인 장연(張然)으로 하여금 명대 청화원(靑華園)의 유적에 강남원림을 모방하여 재현한 작품이다. 창춘원은 본래 청화원의 규모 보다 작게 조성되었고 전전후원(前殿後園)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수경관과 원림의 주요공간은 북쪽에 위치하여 의정 및 생활공간과는 완전히 분리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창춘원은 후일 승덕피서산장, 원명원, 이화원 등의 원림조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피서산장>
박지원의 《열하일기》로도 유명한 하북성 승덕에 위치한 피서산장(熱河行宮,1703년 조영시작)은 황제궁전, 황가원림과 사찰로 구성된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다. 이곳은 청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걸쳐 증축과 확장이 이루어지며 조성되었다.
산장의 모습은 어제(御題) "피서산장기(避暑山莊記)"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산장은 자연의 풍모를 그대로 간직한 채 자연과 인공이 결합되어 있다. 건조물의 규모는 비교적 작으며 외관의 색채나 형태가 소박하다. 강희제에 의해 기본골격이 형성된 피서산장은 건륭제에 이르러 확장되고 그 화려함을 더하게 된다.
특히 강희제가 제재로 삼은 피서산장 “삼십육경(三十六景)”은 원림에 대한 자신만의 조영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楹宇守樸、寧拙舍巧,無刻桷丹楹之費、喜林泉抱素之懷). 이 시기(17-18세기)에 조영된 중국의 원림 문화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원림과 건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중국통일을 꿈꾸고 이를 실현한 강희제는 진정한 하나 된 민족을 이루고자 문화치국(文化治國)을 시행하고 소박한 자연의 모습과 절제된 인공미의 융화를 통하여 원림 내 참된 중화사상을 구현하였다. 그의 원림과 치적을 통하여 민족의 하나 됨이 결코 어렵지 만은 않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세상을 통치하듯 원림조성을 통해 보여준 강희제의 전통과 서구문물이 융합된 자연관과 우주관은 중국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참고 문헌
[清]《清圣祖实录》
[清]康熙《.畅春园记》
周维权.1960.避暑山庄的园林艺术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