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중정원가예찬 35] 첩석으로 승경을 표현한 양주 원림문화의 주역, 주약극(朱若極)편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문화는 그 시대를 주도한 계층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거대한 중국에서 저명한 고전원림(古典園林)이 강남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명조 북경으로의 천도 이후 북방지역은 황족에 의한 황가원림이 꽃을 피웠으며 황폐해진 강남 일대는 황가(皇家)문화에 뒤지지 않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강남은 양주 일대의 문화 중심세력으로 떠오른 휘주(徽州: 현 황산 일대지역) 상인들에 의해 형성된 휘주 문화가 주도했다. 휘주 염상(鹽商: 소금상인)들은 학문적 견식이 넓고 깊었으나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외지로 나와 상업에 종사한 부류를 말한다.

  "상기호이(尚奇好異)" 즉 "독특하고 다른 문화를 선호한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염상들은 학문과 예술의 교류와 발전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지지를 보냈다.


<석도 자화상>


 당대(當代) 많은 학자와 예술인이 염상을 배후에 두고 교류하거나 지원을 받아 경제적 걱정 없이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번호에 예찬할 인물은 이 휘주 상인과 관련이 깊은 바로 양주 원림문화를 주도한 주약극(朱若極,, 1642-1707)이다. 그는 휘주상인과 교류를 통해 기존 양주의 휘주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인물이다.

 주약극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후손으로서 청의 건국과 함께 부친을 잃고 도피의 한 방편으로 불교에 출가하게 된다. 주약극의 법명은 원제(原濟) 호는 석도(石濤), 고과화상(苦瓜和尚), 대척자(大滌子) 등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원림조영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그림에 능했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유람을 통해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체득하고 화폭에 담았으며 이를 원림 내 실제로 구현하고자 했다.

 주약극의 저서 화어록(畵語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산수, 화조, 인물, 난죽, 화과 등 다양한 소재를 잘 그렸으며 기존의 화풍과는 다른 독특함을 지녔다. 청조 시인 유대관(劉大觀)은 "양주는 원림과 정자가 뛰어나다(杭州以湖山勝,蘇州以市肆勝,揚州以園亭勝)"고 말했다. 당시 양주지역은 당시의 풍요로운 경제상황을 말해주듯이 곳곳에 원림이 조성되었고 그곳마다 정자와 기화이수, 괴석들이 넘쳐났다. 

 이러한 원림의 특징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주약극의 기묘한 솜씨 덕이다. 그는 주변에 산악이 없었던 양주의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첩석(疊石)기법을 사용했다.

<석도의 첩석 기법>


 실제 자연의 승경을 보는 듯한 그의 독특한 첩석기법은 양주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가 첩석기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천하제일의 명산인 황산을 여행하고 난 후 였다. 또 양주의 휘상들과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원림조영에 적용하게 된 것이다. 황산의 기괴하고 웅장한 풍광이 그의 독특하고 기괴한 첩석 기법에 영감을 준 것이다.


<편석산방 평면도>


 주약극이 조영한 대표적 원림인 만석원(萬石園), 편석산방(片石山房), 대척초당(大滌草堂)을 통하여 그의 원림조영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만석원은 왕씨 소유의 저택을 석도 자신의 화풍으로 설계하고 경물을 배치하여 원을 조영한 것이다. 만석원에는 산수, 화훼가 격식 없이 흩뿌려진 듯 했고 구름이 드나들었다. 여기에 첩석이 더해져 양주의 이름난 원림 승경을 만들고 명원은 첩석으로서 승경을 이뤘다(錫州畫舫錄 : 工山水花卉,任意揮灑,雲氣迸出。兼工壘石。揚州以名園勝,名園以壘石勝). 아쉽게도 만석원은 현존하지 않고 이두(李斗)의 양주화방록(錫州畫舫錄)에 글로 전해지고 있다.


<편석산방 >


<편석산방 첩석>


 또 편석산방은 현 강소성 양주 서응문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도의 스케치를 감본으로 삼아 조성하였다. 이원총화(履園叢話)의 기록에 따르면, 양주 화원거리에 편석산방이 있는데 두 개의 큰방이 있으며 낮고 움푹한 곳에 방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호수에는 약 17-20m 높이의 태호석 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모습이 매우 기괴하고 높으며 험준하였다(揚州新城花園巷又有片石山房者,二廳之後,湫以方池。池上有太湖石山子一座,高五六丈,甚奇峭).고 기록돼 있다. 편석산방은 하가화원(何家花園) 내 현존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아직도 주약극의 손길이 곳곳에 남아 있다.
 

 주약극은 1692년 양주로 옮겨 대동성 외곽 서편 강가에 대척초당에 머물게 된다. 이 초당은 석도가 평생동안 유일하게 소유한 자신의 거처이다. 성을 등지고 입지해 있는 초당은 평탄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곳곳에 오래된 석류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석도는 이 원림을 직접 설계하였으며 첩석을 이용한 가산을 축조하고 다양한 원림구성 요소들을 교묘하게 배치했다. 

  그는 평생 첩석으로 산수화를 실체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극대화 하기위해 정사, 지당, 수목들을 다각적으로 배치해 첩석과 원림구성요소들 간의 신묘한 조화를 꾀했다. 

 오늘날 양주라는 지방도시가 garden city로 불릴만한 융성한 원림문화를 갖게 된 것은 모두 주약극의 덕이라 예찬할 수 있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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