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청나라 원림은 위진남북조 이후 시작된 도연명의 산수 시(詩)에 기반을 두고 발전한 것이 대부분이다.
산수 경관을 모방한 원림의 조영은 첩산형식을 탄생시키며 다양한 형태의 가산 조성 방식을 견인했고, 청대에 이르러 이름난 원림에서는 돌을 쌓아서 승경(勝景)을 이루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약 삼백년의 중원통치를 통해 여러 차례 개혁을 이뤄냈고 그 결과 다양한 민족이 하나로 통일 될 수 있었다. 특히 육로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여러 국가와의 교역으로 수공업과 상업이 급격하게 발달하여 지배계층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치와 향락 생활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중국 전역의 이름난 곳마다 명원과 명승지 조영에 열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원림 내 첩석 배치는 원림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로 자리 잡았고 그 기교의 절묘함 또한 극에 달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첩산 조영으로 인하여 조잡하고 품격이 떨어지는 원림이 조성되기도 했다.
<과유량 자화상>
이번호에는 중국고전원림의 마지막 시기인 청나라 때 원림 첩석가산 조영의 종결자로 평가되는 과유량(戈裕良)을 예찬한다.
과유량(1764~1830)은 청대 중엽의 첩산명장으로 통한다. 자는 입산(立山)이며 무진현(현재의 상주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빈곤한 가정 형편으로 어린시절부터 원림에서 잡부일을 하면서 성장했고 그로인해 첩석과 가산에 대한 기초 구조기술부터 독특한 고급단계 기술까지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과유량의 첩산 기술은 기존의 명·청 시대 계성(計成), 장남원(張南垣), 이어(李漁) 등이 구사했던 산수화를 모방한 예술적 첩산(疊山) 기법에서 벗어나 장인적 기술이 부각되어 원림 첩산기술과 예술적 차원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전영(錢泳)의 <이원총화(履園叢話)>에는 과유량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적혀있다. <이원총화> 제12권 “예능(艺能)” 편 퇴가산(堆假山)조에 보면 청나라 초기 가산 쌓기는 장남원이 최고였고 강희제 시대에는 승려 석도가 있었고 그 후에는 구호석, 동도사 등이 있다. 최근에는 상주 출신 과유량이 있는데 그의 첩석 기법이 매우 뛰어나며 박원, 문원, 오송원, 이사원 등에 가산을 축조하였다(堆假山者,國初以張南垣為最. 康熙中則有石濤和尚,其後則有仇好石, 董道士, 王天放, 張國泰, 皆為妙手. 近時有戈裕良者, 常州人, 其堆法尤勝於諸家. 如儀征之樸園, 如皋之文園, 江寧之五松園, 虎丘之一榭園, 又孫古云家朽廳前山子一座, 皆其手筆)라고 되어 있다. 이는 과유량이 청말(淸末) 첩산 기술의 대가였으며 강남과 강북 일대에 많은 원림에 가산을 축조하였음을 말해 주는 증거다.
<환수산장>
과유량의 회화적 수법과 기술이 융합된 첩석 예술은 구대법(鉤帶法)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가산 기법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조영한 원림중 대표적으로 소주 환수산장, 양주 소반곡 등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환수산장(環秀山莊)의 면적은 약 2180㎡, 그 중 가산 면적이 약 500㎡를 차지하고 있고 원내 수경관의 면적이 전체의 1/4로써 가산이 원림의 주경관요소가 된 중국 고전원림 중 하나다.
<환수산장 평면도>
북쪽에는 대부분 원림이 조성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건축물인 방이 위치하고 있다. 가산은 주로 동남과 서북쪽에 조영되어 있으며 주산의 산세는 서쪽을 향해 있고 수경관이 위치한 쪽에는 이 가산의 흐름에 따라 단애 혹은 절벽 등을 형성하고 있다.
주봉은 약 7.2m , 계곡 곡장은 12m에 달한다. 가산지역은 안팎이 관통하고 그 사이로 물을 끌어 들여 주변 경관과 달빛이 투영되도록 하여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내는 동굴과 석실 절벽 등이 심산유곡과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환수산장>
환수산장은 중국의 태호석으로 만든 가산 중 그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또 조영 당시의 모습을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환수산장이 위치한 곳은 오대(五代) 시기 금곡원(金谷園), 북송 시기 낙포(樂圃) 등 각 왕조 시기마다 주인은 달랐으나 모두 명원으로 알려진 원림들이 있던 곳이었다. 현재 이 원림은 여러 차례 보수를 통하여 과유량이 조영한 시기의 원형을 회복한 상태다. 환수산장은 1988년 중국 국가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당당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과유량은 중국 봉건체제 말기인 가장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기를 살면서 조원가로서 자신만의 독창적 기법으로 중국고전 원림의 최고조를 이끈 인물로 예찬되어 마땅하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중국 역사상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청나라 원림은 위진남북조 이후 시작된 도연명의 산수 시(詩)에 기반을 두고 발전한 것이 대부분이다.
산수 경관을 모방한 원림의 조영은 첩산형식을 탄생시키며 다양한 형태의 가산 조성 방식을 견인했고, 청대에 이르러 이름난 원림에서는 돌을 쌓아서 승경(勝景)을 이루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약 삼백년의 중원통치를 통해 여러 차례 개혁을 이뤄냈고 그 결과 다양한 민족이 하나로 통일 될 수 있었다. 특히 육로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여러 국가와의 교역으로 수공업과 상업이 급격하게 발달하여 지배계층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치와 향락 생활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중국 전역의 이름난 곳마다 명원과 명승지 조영에 열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원림 내 첩석 배치는 원림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로 자리 잡았고 그 기교의 절묘함 또한 극에 달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첩산 조영으로 인하여 조잡하고 품격이 떨어지는 원림이 조성되기도 했다.
<과유량 자화상>
이번호에는 중국고전원림의 마지막 시기인 청나라 때 원림 첩석가산 조영의 종결자로 평가되는 과유량(戈裕良)을 예찬한다.
과유량(1764~1830)은 청대 중엽의 첩산명장으로 통한다. 자는 입산(立山)이며 무진현(현재의 상주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빈곤한 가정 형편으로 어린시절부터 원림에서 잡부일을 하면서 성장했고 그로인해 첩석과 가산에 대한 기초 구조기술부터 독특한 고급단계 기술까지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과유량의 첩산 기술은 기존의 명·청 시대 계성(計成), 장남원(張南垣), 이어(李漁) 등이 구사했던 산수화를 모방한 예술적 첩산(疊山) 기법에서 벗어나 장인적 기술이 부각되어 원림 첩산기술과 예술적 차원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전영(錢泳)의 <이원총화(履園叢話)>에는 과유량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히 적혀있다. <이원총화> 제12권 “예능(艺能)” 편 퇴가산(堆假山)조에 보면 청나라 초기 가산 쌓기는 장남원이 최고였고 강희제 시대에는 승려 석도가 있었고 그 후에는 구호석, 동도사 등이 있다. 최근에는 상주 출신 과유량이 있는데 그의 첩석 기법이 매우 뛰어나며 박원, 문원, 오송원, 이사원 등에 가산을 축조하였다(堆假山者,國初以張南垣為最. 康熙中則有石濤和尚,其後則有仇好石, 董道士, 王天放, 張國泰, 皆為妙手. 近時有戈裕良者, 常州人, 其堆法尤勝於諸家. 如儀征之樸園, 如皋之文園, 江寧之五松園, 虎丘之一榭園, 又孫古云家朽廳前山子一座, 皆其手筆)라고 되어 있다. 이는 과유량이 청말(淸末) 첩산 기술의 대가였으며 강남과 강북 일대에 많은 원림에 가산을 축조하였음을 말해 주는 증거다.
<환수산장>
과유량의 회화적 수법과 기술이 융합된 첩석 예술은 구대법(鉤帶法)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가산 기법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조영한 원림중 대표적으로 소주 환수산장, 양주 소반곡 등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환수산장(環秀山莊)의 면적은 약 2180㎡, 그 중 가산 면적이 약 500㎡를 차지하고 있고 원내 수경관의 면적이 전체의 1/4로써 가산이 원림의 주경관요소가 된 중국 고전원림 중 하나다.
<환수산장 평면도>
북쪽에는 대부분 원림이 조성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건축물인 방이 위치하고 있다. 가산은 주로 동남과 서북쪽에 조영되어 있으며 주산의 산세는 서쪽을 향해 있고 수경관이 위치한 쪽에는 이 가산의 흐름에 따라 단애 혹은 절벽 등을 형성하고 있다.
주봉은 약 7.2m , 계곡 곡장은 12m에 달한다. 가산지역은 안팎이 관통하고 그 사이로 물을 끌어 들여 주변 경관과 달빛이 투영되도록 하여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내는 동굴과 석실 절벽 등이 심산유곡과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환수산장>
환수산장은 중국의 태호석으로 만든 가산 중 그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또 조영 당시의 모습을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환수산장이 위치한 곳은 오대(五代) 시기 금곡원(金谷園), 북송 시기 낙포(樂圃) 등 각 왕조 시기마다 주인은 달랐으나 모두 명원으로 알려진 원림들이 있던 곳이었다. 현재 이 원림은 여러 차례 보수를 통하여 과유량이 조영한 시기의 원형을 회복한 상태다. 환수산장은 1988년 중국 국가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당당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과유량은 중국 봉건체제 말기인 가장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기를 살면서 조원가로서 자신만의 독창적 기법으로 중국고전 원림의 최고조를 이끈 인물로 예찬되어 마땅하다.
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