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적 살던 고택은 사랑채 대청이 무척 높았다. 대청이 높으니 지붕은 더욱 높아 고무공을 던져 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대청 난간을 따라 생뚱맞게도 넝쿨장미가 드리워져 있었다. 원래의 정원에는 없었겠지만 아마도 할아버지가 집안의 어른이 되면서 심으신 것 같다. 정원에서 대청 가운데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넝쿨장미는 다시 양쪽으로 나뉘어 정말로 난간을 타듯이 그렇게 뻗어갔다. 초여름부터 장미는 난간 전체에 빨갛게 피어나 대청의 팔작지붕이 빨간 파도를 타고 가는 배처럼 출렁거렸다. 빨간 장미꽃 사이사이로 난간에 늘어선 운문판은 그저 보일 듯 말 듯했다.
장미넝쿨이 올라가는 뒤쪽 축대 위에는 난간과 일직선으로 오줌 버지기(입구가 넓은 옹기)가 놓여 있었다.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밤새 채운 놋요강을 손수 들고 나와서는 절묘한 기술로 높은 난간 아래 버지기로 정확하게 부어 넣었다. 할아버지 외에는 그 누구도 한 방울도 튀어나가지 않게 골인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옆에서 보던 내가 괜스레 약이 올라 요강을 비우고 있는 할아버지 팔을 툭 건드려버렸다. 할아버지는 “예끼 이노옴!” 하시더니, 요새는 애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버릇없이 키운다고… 결국 영문도 모르던 아버지만 된통 혼이 났다.
그 때는 사진기도 무척 귀했다. 읍내 사진관에 돈을 내고 빌려서 사진을 찍곤 했다. 햇살이 눈부신 날에는 오가는 손님들이나 아이들이 즐겨 그 장미넝쿨 아래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아마도 장미향이 너무 강했나보다. 폼 잡고 선 포토라인 바로 뒤에서 나는 지린내를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넝쿨장미도 화단의 무궁화만큼이나 끈질기게 피다가 추석이 다가오면 시들어 갔다. 잎새마저 시들고 나면 다시 봄이 오기까지 우리 집 대청마루는 을씨년스럽고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장미가 만발한 대청과 추한 넝쿨만 남은 대청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겨울이면 그 오줌 버지기도 마당에서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
사실 옛 선조들은 집안의 어른이 되면 대청마루에 앉아 여름을 났다. 그들은 난간의 구름문양 사이로 이글거리는 맨 흙의 마당과 벼가 무르익는 들녘을 내려다보고 싶어 했다. 구름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세상을 조금 멀리 두고자 했다. 그래서 구름 위에 노니는 듯 살고 싶은 풍류였으리라. 아니면 구름 저편에서 대청마루에서 노니는 의미를 알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왜 그 운문판들을 송두리째 빨간 장미로 뒤덮어 버렸을까? 구름문양 대신 빨간 장미꽃 사이로 마당이며 들녘을 내려다보고 싶어 했을까? 빨간 장미 사이로 보이는 존재지평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구 건너편에 살았던 중세시대의 시인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Silesius)도 이렇게 장미를 바라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장미가 그를 보았던가? 그는 장미 한 송이에게 짤막한 시를 건넨다.
장미는 그저 피기에 피어날 뿐
결코 왜라고 묻지 않고 사네.
자기 스스로를 개의치 않으니
사람이 보는지 마는지 묻지도 않네.
그렇다. 삶의 의미는 찾는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존재지평은 어디라고 말해서 거기가 아니다. 우리가 장미라면, 왜라고 묻기 전에 그저 피어나야 한다. 장미는 피어나면 곧 장미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면 곧 사람이기 때문이다. 꽃을 피웠다고 해서 남들이 보아주기를 애태우지 말라. 사람답게 되었다는 것을, 잘났다는 것을, 남들이 보든 말든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대청 아래 정원도 없어지고 장미넝쿨도 없어졌다. 곁가지 한 두 뿌리가 마당 구석에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원래도 없던 정원이요, 한국의 전통 양식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이다. 실은 장미 사이로 삶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안계시니 저절로 없어진 것이다. 이제 추석이 다가오니 담벼락에 스러져 가는 장미 한 송이, 오히려 대청마루 구름문양 너머로 그윽이 대청을 바라보고 있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약 력 ◆ 중요민속자료 제172호 청운동성천댁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나 어릴 적 살던 고택은 사랑채 대청이 무척 높았다. 대청이 높으니 지붕은 더욱 높아 고무공을 던져 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대청 난간을 따라 생뚱맞게도 넝쿨장미가 드리워져 있었다. 원래의 정원에는 없었겠지만 아마도 할아버지가 집안의 어른이 되면서 심으신 것 같다. 정원에서 대청 가운데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넝쿨장미는 다시 양쪽으로 나뉘어 정말로 난간을 타듯이 그렇게 뻗어갔다. 초여름부터 장미는 난간 전체에 빨갛게 피어나 대청의 팔작지붕이 빨간 파도를 타고 가는 배처럼 출렁거렸다. 빨간 장미꽃 사이사이로 난간에 늘어선 운문판은 그저 보일 듯 말 듯했다.
장미넝쿨이 올라가는 뒤쪽 축대 위에는 난간과 일직선으로 오줌 버지기(입구가 넓은 옹기)가 놓여 있었다.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밤새 채운 놋요강을 손수 들고 나와서는 절묘한 기술로 높은 난간 아래 버지기로 정확하게 부어 넣었다. 할아버지 외에는 그 누구도 한 방울도 튀어나가지 않게 골인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옆에서 보던 내가 괜스레 약이 올라 요강을 비우고 있는 할아버지 팔을 툭 건드려버렸다. 할아버지는 “예끼 이노옴!” 하시더니, 요새는 애들을 너무 오냐오냐 하면서 버릇없이 키운다고… 결국 영문도 모르던 아버지만 된통 혼이 났다.
그 때는 사진기도 무척 귀했다. 읍내 사진관에 돈을 내고 빌려서 사진을 찍곤 했다. 햇살이 눈부신 날에는 오가는 손님들이나 아이들이 즐겨 그 장미넝쿨 아래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아마도 장미향이 너무 강했나보다. 폼 잡고 선 포토라인 바로 뒤에서 나는 지린내를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넝쿨장미도 화단의 무궁화만큼이나 끈질기게 피다가 추석이 다가오면 시들어 갔다. 잎새마저 시들고 나면 다시 봄이 오기까지 우리 집 대청마루는 을씨년스럽고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장미가 만발한 대청과 추한 넝쿨만 남은 대청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겨울이면 그 오줌 버지기도 마당에서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
사실 옛 선조들은 집안의 어른이 되면 대청마루에 앉아 여름을 났다. 그들은 난간의 구름문양 사이로 이글거리는 맨 흙의 마당과 벼가 무르익는 들녘을 내려다보고 싶어 했다. 구름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세상을 조금 멀리 두고자 했다. 그래서 구름 위에 노니는 듯 살고 싶은 풍류였으리라. 아니면 구름 저편에서 대청마루에서 노니는 의미를 알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왜 그 운문판들을 송두리째 빨간 장미로 뒤덮어 버렸을까? 구름문양 대신 빨간 장미꽃 사이로 마당이며 들녘을 내려다보고 싶어 했을까? 빨간 장미 사이로 보이는 존재지평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구 건너편에 살았던 중세시대의 시인 안젤루스 실레시우스(A.Silesius)도 이렇게 장미를 바라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장미가 그를 보았던가? 그는 장미 한 송이에게 짤막한 시를 건넨다.
그렇다. 삶의 의미는 찾는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존재지평은 어디라고 말해서 거기가 아니다. 우리가 장미라면, 왜라고 묻기 전에 그저 피어나야 한다. 장미는 피어나면 곧 장미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면 곧 사람이기 때문이다. 꽃을 피웠다고 해서 남들이 보아주기를 애태우지 말라. 사람답게 되었다는 것을, 잘났다는 것을, 남들이 보든 말든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대청 아래 정원도 없어지고 장미넝쿨도 없어졌다. 곁가지 한 두 뿌리가 마당 구석에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원래도 없던 정원이요, 한국의 전통 양식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이다. 실은 장미 사이로 삶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안계시니 저절로 없어진 것이다. 이제 추석이 다가오니 담벼락에 스러져 가는 장미 한 송이, 오히려 대청마루 구름문양 너머로 그윽이 대청을 바라보고 있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약 력 ◆
중요민속자료 제172호 청운동성천댁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