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신창석의 문화사색] 집과 길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옛 생각이 더욱 새롭다. 어릴 적 도시로 전학을 왔을 때였다. 촌스런 아이를 보면 말쑥한 도시 사람들은 꼭 묻곤 했다. 어디서 왔다고 대답하면 하나같이 “아 골짜기”라면서 즉시 알아주었다. 내가 지독한 산골 촌놈이라는 것을 나에게 바로 알려주었던 것이다. 지금 그 산골짜기로 최신형 고속도로가 동해 바다로 내달리고 있다. 마을 앞산에는 카페와 식당 그리고 식당보다 더 깔끔한 화장실을 갖춘 휴게소가 쌍으로 들어서 있다. 어릴 때는 높은 앞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은근히 금기시 되어 있어서 늘 올려다보기만 하던 그 산인데... 이제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서벽 고택 사진제공=문화재청>


  마을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몇 채 남아 있다. 이 기와집들도 처음 지을 때는 너무나 새롭고 생소한 집이었으리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틈틈이 널린 텃밭의 먹거리에 아웅다웅 식솔들이 목숨을 걸고 수백년을 살아왔을 테니까. 그 한 가운데를 널찍하게 밀어버리고, 생판 처음 보는 직사각형의 까마득히 높은 담을 세워 이제 더 이상 살아가는 소리도 넘지 못하고, 그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게 들어섰으니, 하나같이 입이 쩍 벌어졌으리라. 게다가 노송이 일렁이는 더 높은 둔덕에는 서당이며 제사가 들어서 까막눈 아이들이 규칙적으로 글을 배우러 가게 되었으니... 마구 들녘을 헤집고 놀기만 하던 아이들의 시간도 바뀌었으리라.

 몇백년 전에는 그렇게 새로웠었던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도 이제 고속도로 아래서는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여기저기 깍아지른 듯한 판넬창고들이 불뚝거리고, 기와집들은 사이사이의 양옥지붕에 묻혀버렸다. 저 기와집들을 왜 “고래등 같은 집”이라 불렀는지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밤이 되니 고속도로변에 도열한 가로등 불빛에 떠밀려 버린 마을은 옛 이야기인양 까마득하다.  

 

 며칠 전 국민학교 동창회가 있어서 고향을 찾았다. 해거름에 묵은 동무 셋이 고속도로 근처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고위공직에서 명예로이 낙향하여 기와집을 지키는 동무1이  말했다. “에혀! 고속도로가 대낮 같아 눈이 부시구만, 이 동네도 이젠 버렸어.” 한 평생 이 산골을 지켜온 동무2가 맞받았다. “이 동네도 도시가 다되었지. 온천지가 환하고 좋기만 하구만.” 동무3인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대도시가 가까워진다더니 여기가 도시구만.” 동무1이 또 보탠다. “산골이라 쎄엑쎄엑하는 자동차 소리가 더 크게 들려, 잠을 못자겠구만.” 동무2가 방책을 내놓는다. “그래도 창문만 닫아걸면 아직도 적막강산이여...” 나도 또 거들었다. “자네야 양옥집에 살지만, 옛 기와집은 창호지라서...” 세 동무는 어쩌다 마주친 옛 선사라도 된 듯, 선문답의 수위를 높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만 떠들고 한 잔 하러 들어오란다. 동무 셋이 이어가던 선문답의 주제는 “고래등”과 “고속도로”였다. 공안으로 말하자면, “집”이냐? “길”이냐? 하지만 집도 길도 식후경이었기에 다시 곱씹어본다. 

 

 집이냐? 인생의 반은 집이요, 나머지 반은 길이 아닐까. 집의 그리스어 어원은 오이코스(oikos)다. 여기에 규칙이나 규범을 의미하는 노모스(nomos)를 붙이면 오늘날 경제(oikos+nomos=economy)나 경제학(economics)이 된다. 원천적으로 집에 제대로 규범을 세우고, 집을 제대로 운영하는 일이 곧 경제라는 말이다.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것은 집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집집마다 살림살이가 잘 돌아가는 것이다 경제다.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은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노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이렇게 일성을 질렀다. “한 처음에 집, 부인 그리고 밭갈이하는 황소가 있었노라.” 이 말은 부인과 농사지을 황소를 갖춘 삶의 근간을 오이코스, 즉 집이라 부른다는 말도 되고, 집을 지키는 사람은 적어도 부인과 황소를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 말을 알고나 있었는지 우리 마을의 고래등 같은 집에는 원래 외양간이 기와집 안에 있었다. 소도 한 식구로서 기와집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마을 기와집에는 소여물을 끓이는 솥이 집 안에서 가장 큰 가마솥이었고, 대체로 그 기와집의 제일 큰 어른이 거하시는 사랑방에 걸려 있었다. 다른 지방은 모르겠으나, 이 마을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물론 안방에는 부인이 살았다. 그러니 마을의 기와집 주인들은 아마도 일찍부터 그 옛날 헤시오도스의 말을 알았거나, 아니면 우직한 벽창호라 소와 한 집에서 살았으리라.

 벽창호도 실은 창과 문에서 유래하는 말이 아니다. 벽창호는 벽창우(碧昌牛)라는 말이 발음하기 편하게 바뀐 것이다. 벽창우(碧昌牛)는 원래 평안도 벽동군과 창성군의 소(牛)를 일컫는다. 두 지방의 소가 덩치나 성질로 보아 막상막하로 억세고 우둔하였던 모양이다. 금수강산 곳곳이 워낙 개성이 강하다 보니, 말도 지역 특색을 가지고 만들기가 쉬웠나 보다. 소와 한 집에 살았던 기와집 양반들이 더욱 그리웁다.

 

 길이냐? 길의 고대 그리스어 어원은 호도스(hodos)다.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 규칙을 뜻하는 접미어 노모스(nomos)가 붙어 “경제”(econmy)가 되었다. 엇비슷하게 길을 뜻하는 호도스(hodos)에는 “다음에” 또는 “따라서”를 뜻하는 접두어 메타가 붙어서 “방법”(methodos)이 되었다. 방법을 뜻하는 영어의 메토드(method)이나 독일어의 메토데(Methode)는 공히 메타호도스로 “길을 따라서”라는 의미이다. 결국 “방법”이란 근본적으로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다.

 길의 그리스어 호도스(hodos)는 동시에 “떠나기”, “예의”, “생각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집 떠나면 길이요, 길은 예의이며 살아가고 찾아가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집을 떠난 사람은 누구나 나그네다. 나그네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주침의 예의요 헤어짐의 예의이기 때문이리라. 길을 떠난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타인이기 때문이다.

 

 집이냐? 길이냐? 묻지 말아라. 집이 곧 길이요, 길이 곧 집이다. 그러고 보니 집을 나서면 길이요,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집에 들 수 없다. 산다는 것은 매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요, 매 순간 길을 찾아 집에 드는 것이다. 길 찾기가 두려우면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고, 집 안에만 안주한다면 결국 인생의 길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동무들아, 언젠가는 우리도 마지막으로 길을 떠나야 할 것이고, 그 길을 떠나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길을 나서는 날 뒤돌아보면 아름다운 그런 집을 남겨두자꾸나. 마지막으로 집에 드는 그 날에도 편히 내딛을 수 있는 그런 길을 닦아두자꾸나.  

 

신창석 교수 

국가민속문화재 제282호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 소유자

1985년 경북대 철학과 석사

1993년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 철학박사

1993년 교육과학부 브레인 풀(Brain pool) 초빙교수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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