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중 정원가 예찬 25] 맑고 깨끗한 세상을 꿈꾼 조선 문인들의 낙원, 담양 소쇄원의 양산보 편



중국 대표적 정원서 《원야》의 흥조론에서는 원림을 조영할 때 시공자(장인)보다 설계자(주인)의 역할이 중요함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정원을 조영할 때 전체적 비중에서 7할이 주인에 해당되고 3할이 장인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정원에서 설계자를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정원소유주가 실제 설계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음을 대변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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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소쇄원 전경>


 이번호에 소개할 한국의 정원가는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두고 인간의 사상을 원림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구체화한 정원설계자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조선 최고의 정원 소쇄원을 조영한 양산보(梁山甫, 1503~1557)다. 

 조선 시대 이름난 정원의 소유주들은 그 관직과 치적이 높고 정원조성 이전부터 명망을 얻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양산보의 경우를 보면 소쇄원이라는 자신의 정원을 통해 부각되는 면이 훨씬 크다. 이런 점은 오히려 정원가로서 돋보이는 점이라 하겠다. 지석리에 위치해서 지석명원이라고도 불렸던 소쇄원은 그 유명세로 인해 그 후손들까지도 정원명문가로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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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처사양공지려>


 양산보의 자는 언진(彦鎭)이고, 호는 소쇄처사(瀟灑處士)이다. 원래 처사는 세상살이에 표면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일컫는다. 양산보는 소학을 실천하며 사서와 오경을 늘 옆에 두고 역의 변화를 깊이 탐구하였다. 소쇄원사실에 보면 평소 동진의 도연명과 송나라의 주무숙을 흠모하여 그들이 저술한 귀거래사, 오류선생전, 산해경과 통서, 애련설, 태극도를 머리맡에 놓고 항시 읽었다고 한다. 그의 가계가 창평으로 옮겨온 시기는 아버지 창암 양사원(蒼巖 梁泗源) 때부터이며 별서 소쇄원의 본가인 창암촌도 양산보의 부친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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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각자탁본>


 양산보는 15세 때 서울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17세 약관의 나이로 현량과에 응시하는 등 어린나이에 임금의 총애를 얻었으나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나자 그 후로 낙향하여 지석리로 돌아오게 된다.제월당

 그의 호와 정원명에 함께 쓰인 소쇄(瀟灑)라는 말은 ‘맑고 깨끗하고 고상하고 소탈하여 세속을 벗어난 모양’이라는 뜻이다.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말고 깨끗한 성품을 지니고 그러한 세상이 오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긴 듯하다. 양산보는 고향에서 정자 한 채가 있었던 선친의 장소를 빌어 조선 최고의 정원을 조성하는 평생의 브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당시 선비들의 문화는 중국의 것을 차용하되 고유의 멋을 가미하여 새롭게 발전시켰다. 이를 두고 동양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에드윈 O, 라이샤워는 조선 시대의 문화를 중국과 유사하다 하면서도 개량된 중국형이라 적었다. 또 한국인들은 유교적 원칙들에 대하여 융통성 없이 그러나 성실하게 애정을 바치고 유교적 의식에 대해서도 거의 열광적으로 충실하다. 또 효성이 찬양되어 성실하게 실천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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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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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단>


 양산보가 남긴 저작은 극히 적어 구체적인 정원조성 행위는 기록에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가 지은 효부라는 글과 시의 일부에서 그것들이 나타난다. 

 양산보는 소쇄원의 조성에 유교적 원칙과 효를 중요하게 적용하였다. 이는 소쇄원의 정원요소들과 후손들의 소쇄원 재건운동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각 경물들은 제각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후손들은 퇴락된 양산보의 정원을 복원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저작 효부나 애양단, 애일가 등은 효와 관련된 것이다. 양산보는 애일이라는 가사를 지어 부모님의 경삿날에 자제들에게 부르게 했다고 한다(권수용,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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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단을 다르게 하여 건물 배치>


 효의 기본덕목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게 만드는 상하의 위계존중이다. 소쇄원은 경사를 이용하여 석축단의 높이를 다르게 하고 거기에 각 공간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위계에 따른 분리와 연계가 동시에 고려된 합리성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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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서 바라본 광풍각>


 소쇄원은 사림세력과 연관된다. 당시 사림파로 활동하는 지도층들은 거의 모두 별서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국의 정자중심의 산수원림은 시인묵객이나 풍류객들이 유유자적하는 공간이다(정동오,2001).

 소쇄원은 양산보가 평생을 거쳐 정원의 원형을 완성하고 그가 주변사람과 교유하며 살 수 있었던 수단이기도 했다. 당시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삶의 전형적인 모습인 별서생활은 양산보 평생의 직업이였다. 소쇄원은 양산보 자신의 처지에 대한 통한도 스며있다. 소쇄원 구경을 빌미로 찾아드는 문사들과의 교유는 그에게는 늘 즐겁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찾는 손님이 없는 날, 광풍각의 석축 난간에서 바라보는 바위골짜기는 깊고도 깊어 입신양명이 좌절된 처사의 고뇌를 함께 나눔직 하다.

 

 양산보는 중국 이덕유의 평천장고사를 인용하여 후손들에게 소쇄원의 풀한포기라도 소중히 하여 절대 남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소중히 지킬 것을 유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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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도 목판본>


 소쇄원은 계류와 단차를 이용한 독특한 조성과 소쇄원도라는 설계도와 오늘날 정원을 활용한 프로그램까지 갖춘 곳이다. 이러한 조영방식과 계획을 가진 곳은 우리나라에서 드문 사례이다. 정원관련 그림이 전해오는 곳은 조선 시대에 구례 운조루, 함안 무기연당 등이 있기는 하나 이들은 모두 정원의 형태를 지도처럼 펼쳐 그린 것이고 정원에서의 구체적 행위까지 계획되어진 그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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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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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문>


 소쇄원의 정원조성 기술 중 단연 으뜸은 석축이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에서 석공들을 불러와서 석축을 쌓았다고도 한다. 양산보는 바위가 좋은 계류변을 막아 자신의 담장 안으로 끌어들이고 주인의 공간과 객의 공간을 석축의 단차를 이용해 공간위계를 형성하고 담에 상징적 글귀를 적어 넣어 그 공간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애양단이나 오곡문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정원에 나무와 화초 한포기도 각각의 의미를 뽐내게 배치했다. 또 각 공간에 걸맞는 정원방문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문사들과 고안해서 고도의 원림문화를 창조해냈다. 여기에 동참한 인물들이 송순, 김인후, 고경명, 정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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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도는 정원생활의 설계도라는 사실이외에도 정원에서 자연을 닮아 심신을 도야하고 효를 통해 충에 도달하려는 은사들의 평생수련장을 표현한 교재이기도 한 셈이다.

 

<참고문헌>

김덕진(2007) 소쇄원 사람들, 다할미디어

권수용(2008), 소쇄원의 역사와 인문활동 연구,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정동오(2001), 원림문화 옛동산, 제30호

소쇄원시선편찬위원회(1995), 소쇄원시선

애드윈 O. 라이샤워 외2인 저 / 김한규 외 2인 역 동양문화사,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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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실

중국 북경대 세계유산센터 선임연구원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사)한국전통조경학회 편집위원

(사) 한국전통조경학회 집행이사

한국산업인력공단 출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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