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현~1.JPG
나는 고향을 떠나 거의 50년 동안 객지 생활을 했고 직장을 퇴임하면서 곧바로 내가 태어나서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마침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안채가 옛 모습으로 살아났으며 연이어 사랑채와 행랑채를 보수하여 정상을 찾았다. 내가 어렸을 때 모습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관리하던 친척분이 자기 집을 인근으로 지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이 집은 주인을 기다리는 양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서산 김기현 가옥 사랑채 전경>
이제 고택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다. 여러 가지로 설은 것이 많아 할 일도 참 많았다. 우선 그동안 정원수가 없었기에 조경을 먼저 시작했다. 뒤란에는 장독대와 함께 오래된 감나무 두 그루와 회화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는데 주변 텅 빈 공지에 주목 두 그루와 잡풀을 제어하기 위하여 맥문동과 달맞이꽃을 심었다. 사랑방 앞은 낮은 소나무 세 그루와 앉은뱅이 주목으로 사각 테를 둘렀고, 집 외부에도 은사시나무와 사철나무, 내가 좋아하는 백일홍과 정원수 소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이 고택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눈은 각양각색 이다. 어떤 사람은 당당하게 들어와 내가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니거나 마루에 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대문 안에 들어오기를 망설이는 사람도 있다. 가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질문은 이 집에 사람이 살고 있느냐, 겨울에 추어서 어떻게 사느냐, 관리하기 힘들고 어렵지는 않느냐 등등 이다.
한옥은 흙과 나무와 돌로 짓는다. 지붕에도 흙이 올라가 있고, 기초도 흙이며, 벽도 흙이다. 나무와 흙은 춥거나 더운 날씨, 습도에 매우 약하다. 그러니 사람이 살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면 흙이 떨어지고, 사람 냄새가 없으면 거미나 개미 등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이런 고택은 뒤에 산을 등지고 있어서 많은 짐승들이 들락거린다. 들고양이, 뱀, 청솔모,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쥐들이다. 사람이 살아도 이들과 동거하는 것이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들이 주인이다. 요새말로 웰빙이란 말은 자연 그대로인 것이다. 맑은 공기, 맑은 물, 흙을 밟으며 사는 것이며, 아파트 20층에서 살기보다 땅을 밟고 사니 지기가 승하고 인체의 에너지가 활발하기 마련이다.

황금찬 시인과 함께 1.jpg
<황금찬 시인(右)과 함께>
난방은 관리인이 기름보일러를 쓰던 것을 심야 전기로 대체하였으며 구들을 살려서 화목을 땐다. 구들 위에는 더운 물을 순환시키는 파이프도 있고 아궁이에 불도 때니 방의 온기가 불을 안 때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을 안 때다가 불을 때니 순순히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지 않고 아궁이로 연기가 도로 나온다. 경험이 없는 나로선 고민이다. 부채질하며 연기를 굴뚝으로 나가도록 하려 하나 말을 듣지 않는다. 온돌 경험이 있는 여러 사람을 불렀지만 신통치 않다. 방으로 연기가 새고 아궁이로 연기가 나는 것은 매 일반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집도 많이 없어지고, 나이가 70정도는 먹어야 구들 경험을 갖고 있으니 사람 구하기도 어렵다. 하여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족한 상태가 아니어서 계속 보수가 필요하겠지만 이제 제대로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고 방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온돌의 기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원리로 불을 때서 방이 뜨거워지고 연기가 순연히 굴뚝으로 나가느냐는 원리의 체득이다. 불을 때면서 굴뚝 바라보며 연기가 나가는 것을 보는 취미가 생겼다. 이런 것은 조상들의 숨결을 체득하고 그들의 과학적 온돌 구들 방법을 신통하게 알아서일까?
한옥에 살면서 현대 생활과 비교했을 때 불편이라면 화장실과 부엌이다. 재래식 화장실은 독한 냄새가 나고 그 냄새는 멀리까지 간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없이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하였고 방안에도 화장실을 하나 만들었다. 이럭저럭 현재 이 고택에는 화장실이 전부 5개로 늘어났다. 옛날에는 안채 안에 화장실과 목욕탕이 있었고 행랑채에 사랑방 주인의 화장실과 일꾼들의 화장실 모두 합하여 셋이 있었으며 화장실을 어렸을 때는 변소라고 불렀다. 변소는 측간의 다른 말로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밤에는 요강을 쓰고 아침에 깨끗이 닦아서 방에 놓았다가 저녁에 다시 썼다. 나는 내방에 화장실이 없고 대청을 건너서 건너 방에 화장실이 있어서 요즘도 요강을 쓴다. 뚜껑이 없어서 좋은 요강을 사려 인사동에 갔더니 50만원이나 된단다. 물론 놋요강이지만 다음으로 미루었다.
다음은 부엌이다. 우리 집 부엌은 유난히 크다. 6칸 부엌은 드물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니 거의 100년 전에 본채에서 이어서 확장을 했다. 내자와 많은 토론을 거쳐서 바닥은 흙을 그대로 두고 고전형태의 원목 식탁과 의자를 거금을 들여 갖다놓으니 제법 잘 어울린다. 그리고 아궁이와 솥은 그대로 두었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는 솥에 물을 넣고 때지 않을 때는 물을 빼고 들기름으로 닦아야 쇠솥이 관리가 된다. 쇠솥 하나에 10만원이 넘으니 만만치 않다. 온돌에 몇 번 손을 보았지만 안방에 연기가 새서 요즘은 잠시 불을 때지 않고 있다.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 생각은 남자는 안채에 들어올 수 없고 여자가 사랑방에 갈 수 없는 것인데 어색하나마 하나씩 깨고 있다. 그래서 여자나 남자가 오면 부엌에서 차를 대접하니 응접실 역할도 한다. 나는 이곳을 현대식 카페라고 부르며, 요즈음은 시낭송회를 열기도 한다. 제일 좋은 것은 신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으니 편안하고 주방과 연접하여 차도 끓여 마시고 식사도 하고 여러 가지로 사용한다. 또 몇 달 전에는 심야보일러를 이용하여 바닥 밑에 열선을 깔아 아침기온을 0도에서 15도로 만들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고전과 현대가 ‘랑데부’를 하고 있다.
고택에 사는 것을 보는 눈은 단편적으로 보면 화려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내가 고택에 살며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무거운 공룡이 나를 관리하는 격이 된 느낌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이집에서 장손으로 태어났고, 지금은 이렇게 고즈넉한 한옥에서 책을 읽으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하루에 여섯 알의 약과 흡입기를 아침저녁 사용해야 숨을 쉴 수 있는 고질병에서 약을 끊어도 숨 쉴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서울 출신인 내자도 여기에 살면서 10년 전보다 10년은 더 건강해 보이며, 친구나 친척들도 이런 고택에 시집온 것을 부러워한다고 한다. 40년 전 내자를 처음 만나 내 자신을 소개할 때 내가 집안에서 제일 출세했고 백도 돈도 없는 시골사람이란 것으로 알고 결혼했다가 노년에 고택문화재 안주인이 되었다고 흐뭇한 내색은 안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 집을 깨끗하게 관리할까 고심하는 것을 볼 때는 공룡을 둘이서 쳐들고 있다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도 내 운명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김기현
서산 계암고택(김기현가옥)
한옥연구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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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향을 떠나 거의 50년 동안 객지 생활을 했고 직장을 퇴임하면서 곧바로 내가 태어나서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마침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안채가 옛 모습으로 살아났으며 연이어 사랑채와 행랑채를 보수하여 정상을 찾았다. 내가 어렸을 때 모습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관리하던 친척분이 자기 집을 인근으로 지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이 집은 주인을 기다리는 양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서산 김기현 가옥 사랑채 전경>
이제 고택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다. 여러 가지로 설은 것이 많아 할 일도 참 많았다. 우선 그동안 정원수가 없었기에 조경을 먼저 시작했다. 뒤란에는 장독대와 함께 오래된 감나무 두 그루와 회화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는데 주변 텅 빈 공지에 주목 두 그루와 잡풀을 제어하기 위하여 맥문동과 달맞이꽃을 심었다. 사랑방 앞은 낮은 소나무 세 그루와 앉은뱅이 주목으로 사각 테를 둘렀고, 집 외부에도 은사시나무와 사철나무, 내가 좋아하는 백일홍과 정원수 소나무를 심었다.
사람들이 고택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눈은 각양각색 이다. 어떤 사람은 당당하게 들어와 내가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니거나 마루에 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대문 안에 들어오기를 망설이는 사람도 있다. 가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질문은 이 집에 사람이 살고 있느냐, 겨울에 추어서 어떻게 사느냐, 관리하기 힘들고 어렵지는 않느냐 등등 이다.
한옥은 흙과 나무와 돌로 짓는다. 지붕에도 흙이 올라가 있고, 기초도 흙이며, 벽도 흙이다. 나무와 흙은 춥거나 더운 날씨, 습도에 매우 약하다. 그러니 사람이 살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면 흙이 떨어지고, 사람 냄새가 없으면 거미나 개미 등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이런 고택은 뒤에 산을 등지고 있어서 많은 짐승들이 들락거린다. 들고양이, 뱀, 청솔모,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쥐들이다. 사람이 살아도 이들과 동거하는 것이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들이 주인이다. 요새말로 웰빙이란 말은 자연 그대로인 것이다. 맑은 공기, 맑은 물, 흙을 밟으며 사는 것이며, 아파트 20층에서 살기보다 땅을 밟고 사니 지기가 승하고 인체의 에너지가 활발하기 마련이다.
황금찬 시인과 함께 1.jpg
<황금찬 시인(右)과 함께>
난방은 관리인이 기름보일러를 쓰던 것을 심야 전기로 대체하였으며 구들을 살려서 화목을 땐다. 구들 위에는 더운 물을 순환시키는 파이프도 있고 아궁이에 불도 때니 방의 온기가 불을 안 때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을 안 때다가 불을 때니 순순히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지 않고 아궁이로 연기가 도로 나온다. 경험이 없는 나로선 고민이다. 부채질하며 연기를 굴뚝으로 나가도록 하려 하나 말을 듣지 않는다. 온돌 경험이 있는 여러 사람을 불렀지만 신통치 않다. 방으로 연기가 새고 아궁이로 연기가 나는 것은 매 일반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집도 많이 없어지고, 나이가 70정도는 먹어야 구들 경험을 갖고 있으니 사람 구하기도 어렵다. 하여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족한 상태가 아니어서 계속 보수가 필요하겠지만 이제 제대로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고 방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온돌의 기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원리로 불을 때서 방이 뜨거워지고 연기가 순연히 굴뚝으로 나가느냐는 원리의 체득이다. 불을 때면서 굴뚝 바라보며 연기가 나가는 것을 보는 취미가 생겼다. 이런 것은 조상들의 숨결을 체득하고 그들의 과학적 온돌 구들 방법을 신통하게 알아서일까?
한옥에 살면서 현대 생활과 비교했을 때 불편이라면 화장실과 부엌이다. 재래식 화장실은 독한 냄새가 나고 그 냄새는 멀리까지 간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없이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하였고 방안에도 화장실을 하나 만들었다. 이럭저럭 현재 이 고택에는 화장실이 전부 5개로 늘어났다. 옛날에는 안채 안에 화장실과 목욕탕이 있었고 행랑채에 사랑방 주인의 화장실과 일꾼들의 화장실 모두 합하여 셋이 있었으며 화장실을 어렸을 때는 변소라고 불렀다. 변소는 측간의 다른 말로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밤에는 요강을 쓰고 아침에 깨끗이 닦아서 방에 놓았다가 저녁에 다시 썼다. 나는 내방에 화장실이 없고 대청을 건너서 건너 방에 화장실이 있어서 요즘도 요강을 쓴다. 뚜껑이 없어서 좋은 요강을 사려 인사동에 갔더니 50만원이나 된단다. 물론 놋요강이지만 다음으로 미루었다.
다음은 부엌이다. 우리 집 부엌은 유난히 크다. 6칸 부엌은 드물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니 거의 100년 전에 본채에서 이어서 확장을 했다. 내자와 많은 토론을 거쳐서 바닥은 흙을 그대로 두고 고전형태의 원목 식탁과 의자를 거금을 들여 갖다놓으니 제법 잘 어울린다. 그리고 아궁이와 솥은 그대로 두었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는 솥에 물을 넣고 때지 않을 때는 물을 빼고 들기름으로 닦아야 쇠솥이 관리가 된다. 쇠솥 하나에 10만원이 넘으니 만만치 않다. 온돌에 몇 번 손을 보았지만 안방에 연기가 새서 요즘은 잠시 불을 때지 않고 있다.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있는 생각은 남자는 안채에 들어올 수 없고 여자가 사랑방에 갈 수 없는 것인데 어색하나마 하나씩 깨고 있다. 그래서 여자나 남자가 오면 부엌에서 차를 대접하니 응접실 역할도 한다. 나는 이곳을 현대식 카페라고 부르며, 요즈음은 시낭송회를 열기도 한다. 제일 좋은 것은 신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으니 편안하고 주방과 연접하여 차도 끓여 마시고 식사도 하고 여러 가지로 사용한다. 또 몇 달 전에는 심야보일러를 이용하여 바닥 밑에 열선을 깔아 아침기온을 0도에서 15도로 만들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고전과 현대가 ‘랑데부’를 하고 있다.
고택에 사는 것을 보는 눈은 단편적으로 보면 화려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내가 고택에 살며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무거운 공룡이 나를 관리하는 격이 된 느낌이 들 때도 많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이집에서 장손으로 태어났고, 지금은 이렇게 고즈넉한 한옥에서 책을 읽으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하루에 여섯 알의 약과 흡입기를 아침저녁 사용해야 숨을 쉴 수 있는 고질병에서 약을 끊어도 숨 쉴 수 있고 냄새도 맡을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서울 출신인 내자도 여기에 살면서 10년 전보다 10년은 더 건강해 보이며, 친구나 친척들도 이런 고택에 시집온 것을 부러워한다고 한다. 40년 전 내자를 처음 만나 내 자신을 소개할 때 내가 집안에서 제일 출세했고 백도 돈도 없는 시골사람이란 것으로 알고 결혼했다가 노년에 고택문화재 안주인이 되었다고 흐뭇한 내색은 안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 집을 깨끗하게 관리할까 고심하는 것을 볼 때는 공룡을 둘이서 쳐들고 있다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도 내 운명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김기현
서산 계암고택(김기현가옥)
한옥연구가.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