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선교장 이야기> 선교장의 정월 대보름



선교장의 정월 대보름

 

옛날 선교장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어떻게 맞이했을까요?

 

정월 대보름 행사는 먼저 지신밟기부터 시작되었지요. 경포 달맞이 농악대가 지신밟기를 하며 온 동네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선교장도 예외가 아니어서 농악대는 선교장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지신(地神)께 선교장 집안사람들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선교장의 수호신인 오백 년 된 회화나무 앞에서는 한 해의 무탈함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가 끝난 뒤부터 정월 대보름 놀이가 잇따랐는데, 건물 뒤편 산등성이에서는 쥐불놀이를, 앞마당에서는 달집태우기를 하며 하늘에 덩두렷하게 떠오른 정월 대보름달을 바라보면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소원을 빌곤 했습니다.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선교장에서는 정월 대보름 잔치를 아주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사당패를 불러 온 동네잔치를 벌였는데, 집안사람과 소작인들, 동네 사람들을 다 합쳐 오백 명이 넘게 모였다고 합니다. 앞마당에는 수십 개가 넘는 천막이 설치되었고, 환하게 장작불을 피워놓아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이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겨운 가락 속에서 환호성을 질러가며 오달지고 재미나게 대보름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답니다. 잔칫상 그득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술을 권하고, 씨름ㆍ윷놀이ㆍ가무를 즐기면서 일 년 중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잔치가 파할 때쯤이면 인심 후하기로 소문난 선교장 주인은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잔뜩 들려 보냈습니다. 초대한 농악대와 사당패, 소리꾼, 춤꾼에게도 섭섭지 않게 행하(行下)를 쥐여 보내 잔치 때마다 그들은 앞다투어 선교장에 공연하려고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전쟁 이후 그 많던 동네 사람들은 도시로 어디로 뿔뿔이 흩어지고, 친척들마저도 서울로 올라가 버려 흥성거렸던 선교장 정월 대보름날 풍경은 이제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저의 조부님께서는 항상 이맘때가 되면 아름다운 그 시절 정월 대보름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벽동아, 너 나중에  큰 인물이 되어서 이 집안에 옛 영화가 되살아나게 해라.”

 

그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이제 머지않은 날 흥겨운 정월 대보름 잔치를 한판 거방지게 벌여 조부님의 소원을 꼭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글쓴이 碧童>

 



 News & Company

법인명 : 주식회사 리몽 | LEEMONG corp.

등록번호 : 강원 아00093 |  발행일자 : 2011. 9. 5

발행인 :  이원석 | 편집인 : 이진경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미 기사배열 책임자 : 이원석

[25464]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강릉선교장

63, Unjeong-gil, Gangneung-si, Gangwon-do,[25464] Republic of Korea

Email : kchnews@naver.com T : 02-733-5270 F : 02-6499-9911

 ⓒ문화유산신문 당사의 기사를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링크, 게재하거나 배포하실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19 KCHN All rights reserved. Hosting &  Powered by Leemong co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