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선교장 이야기> 곳간의 역사



동진학~1.JPG

 


  곳간의 역사


 “동해안 양양에서 삼척 주변까지 거의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닌다.” 배다리 이통천집(李通川宅ㆍ선교장)의 부(富)를 강원도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북쪽에서 생산되는 곡식은 주문진의 북창(北倉)에, 남쪽에서 나는 곡식은 묵호(현 동해시)의 남창(南倉)에 보관했습니다. 풍년에는 곳간 가득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곳간에 쌓아 둔 곡식을 풀어 소작인이나 굶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곤 했었지요. 나라에서도 하지 못하는 백성에 대한 구휼의 중요한 소임을 선교장에서는 스스로 나서서 그 몫을 감당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기꺼이 나눔으로써 복을 지은 덕분일까요? 선교장의 역사는 삼백 년간이나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강원도 사람들은 감기가 들어 재채기만 나도 이통천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또 “새야, 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말고 저 건너 이통천집으로 가라.”라며 다소 주술적인 내용을 담은 메나리를 부르곤 했는데, 이는 어떤 것도 너그럽게 감싸며 포용할 줄 알던 저희 선교장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느 날, 선교장에서 베푸는 후덕한 인심을 늘 고맙게 여기던 마을 사람들이 한지에다 각자의 이름을 쓰고 기름을 먹여 우산을 만들어 바쳤는데, 이름을 적은 숫자가 족히 만 명이었지요. 이때 받았던 우산을 ‘만인솔’이라 하여 선교장에서는 지금도 고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곳간은 한때 강원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동진학교(東震學校) 건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 변변한 교육시설 하나 없던 우리 민족과 지방의 취약한 교육실정을 안타깝게 여긴 증조부님께서 곳간을 개조해 1908년 영동 지방의 인재양성을 위한 중등 과정의 동진학교를 세우신 것이지요.

 

 이 학교를 통해 강릉 지방의 젊은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고, 조국의 독립과 고향 발전에 한 축을 담당할 지성인을 양성하고자 했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을 영어 교사로 등용하고, 피신 중이던 백범 김구 선생, 이시형 선생 등을 강사로 초빙하여 민족주체성과 자주독립 쟁취를 위한 정신을 불어넣으며, 나라의 기둥이 될 젊은 인재들을 가르치는 데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동진학교는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던 일제의 계속되는 강력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 오다가 개교한 지 3년 만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폐교당하고 맙니다. 당시에 사용하던 교과서, 졸업장, 학교에 게양했던 태극기 등은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지요.

 

 지금도 이 곳간 앞에 서면 독립의 염원과 민족 교육의 절실한 필요성에 고심하시던 증조부님의 활달한 모습을 실제로 가까이서 뵙는듯하여 눈시울이 더워지곤 합니다.

 

 이처럼 선교장 곳간의 역사는 물건을 쌓아 두는 단순한 창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하늘에 덕을 쌓아 후손을 무궁번창하게 하는 ‘천상의 보물 창고’였던 것입니다.

 

 <글쓴이 碧童>



 News & Company

법인명 : 주식회사 리몽 | LEEMONG corp.

등록번호 : 강원 아00093 |  발행일자 : 2011. 9. 5

발행인 :  이원석 | 편집인 : 이진경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은미 기사배열 책임자 : 이원석

[25464] 강원도 강릉시 운정길 63 강릉선교장

63, Unjeong-gil, Gangneung-si, Gangwon-do,[25464] Republic of Korea

Email : kchnews@naver.com T : 02-733-5270 F : 02-6499-9911

 ⓒ문화유산신문 당사의 기사를 동의 없이 상업적으로 링크, 게재하거나 배포하실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19 KCHN All rights reserved. Hosting &  Powered by Leemong corp.